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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와 머시기

김양현 2003.12.10 19:02 조회 수 : 47835

이 글은 월간잡지 <전라도닷컴>에서 퍼온 글입니다.


이기갑
kiglee@mokpo.ac.kr
서울대 언어학과 졸, 동대학원 석·박사
국어문법학, 국어방언학, 국어담화론 등 전공 / 현 목포대 국문과 교수
  
'거시기'와 '머시기'


배우 박중훈이 계백장군으로 분한 영화 '황산벌'이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지 않아 그 세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만으로도 요즘 유행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의 대결 양상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두 지역의 사투리가 웃음을 자아내는 역할을 해 오고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세태를 순발력 있게 이용하여 황산벌에서의 계백과 김유신의 전투를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백제는 전라도뿐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다스렸으니, 백제의 언어가 반드시 전라도 사투리일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굳이 백제의 언어로 전라도 사투리를 선택한 것은 오늘날 양분화된 정치 세력과 이에 편승한 언어의 이분화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개그맨들이 대상으로 삼는 언어는 오직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뿐이다. 충청도나 경기도, 강원도 등 중부 방언이나 제주도 방언은 거의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과거 백남봉이나 남보원 같은 코미디언들은 이른바 팔도 사투리라 하여 북한 지역 사투리를 포함한 여러 방언을 비교함으로써 사람들을 웃기곤 하였는데, 요즘에는 오로지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만이 비교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두 방언이 여러 면에서 대립되는 두 지역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닐까. 선호하는 정당도 판이하게 다르고,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성향도 다르며, 이에 따라 북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경제력도 차이나는 등 여러 면에서 대립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을 좌우하는 두 세력의 언어를 선택, 대립시킴으로써 관중의 호응을 얻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이 영화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의자왕이 계백장군에게 내리는 전투 명령은 '거시기 해 불어'라는 말로 표현된다. 여기서 나오는 '거시기'는 시종일관 계백을 포함한 백제군의 슬로건처럼 쓰이는데, 아마도 영화 감독은 이 말을 전라도말의 전형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도 하다.

전라도 말 '거시기'는 지칭할 말이 분명치 않거나 말하기 거북할 때, 또는 하고자 하는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 흔히 쓴다. '거시기 말이여'라거나, '거시기, 거 멋이냐?',  '거시기 있잔헌가?'처럼 되묻기도 한다. 또한 '거시기' 외에 '거석허다'와 같은 말도 쓰이는데, '니가 허기가 정 거석허먼 내비 둬라'처럼 어떤 행위나 상태를 불분명하게 가리킬 때 쓰이곤 한다.

이처럼 '거시기'나 '거석허다'의 불분명함은 여기에 포함된 '거'로부터 생겨난 것이 틀림없다. '거'는 상대방에게 가까이 있는 사물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지시어 '그'로부터 변형된 것인데, 사람들이 말하면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흔히 말버릇처럼 쓰는 말이 바로 이 '거'인 것이다. 예를 들어 '거, 뭐냐면,...'처럼 쓰인다. 이러한 용법으로 쓰이는 것에는 '거' 외에도 '저'와 같은 지시어가 있기도 하다. '그'가 '거'로 형태가 바뀐 것도 아마 '저'에 이끌린 탓일지도 모른다.

일본말에서도 '저'에 해당하는 '아노(ano)'가 이러한 용법을 갖는 것을 보면, 적당한 말을 찾는 동안에 지시어를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보편적인 현상인 듯하다. 따라서 '거시기'나 '거석'의 '거'가 '그'에서 온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거'를 제외한 나머지 형태인 '시기'나  '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거시기'나 '거석허다'의 기원을 알려면 '무엇'이라는 의문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말 '무엇'이야 영어의 'what'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이 말이 15세기 중세 국어에서는 '무엇'이 아니라 '므스'나 '므슥'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자음 앞에서는 '므스'로 쓰였고, 모음 앞에서는 '므슥'으로 쓰였던 이 말이 나중에 '무엇'으로 변했던 것이다. 아마도 '므스'와 '것'이 합해진 '므스것'으로부터 '무엇'이 생겼을 것이다. 지금도 함경도 방언에서는 '무스거'나 '무스게'가 쓰이고, 제주도 방언에서도 '무스것',  '무슨것',  '무신거' 등의 여러 형태가 쓰이고 있는데, 이 모든 형태는 '무스'와 '것'의 합성에서 발달된 형태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전라도에서도 옛말 '무슥'과 유사한 '머석'과 같은 말이 쓰인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혼차 가기가 머석허먼 누구라도 한나 데꼬 가씨요'에서처럼 주로 '머석허다'로 쓰이는데, 표준어로 번역하자면 '무엇하다'에 해당된다. 표준말  '무엇하다'도 불분명한 행위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그 용법은 전라도말의 '머석허다'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하겠다.

'머석허다'의 '머석'은 중세 국어의 '무슥'에서 온 것이 확실한데, 이 '머석'에 주격 조사 '이'가 결합되어 '머석이'가 되면 표준말의 '무엇이'와 같은 뜻이 된다. 이 '머석이'가 자주 쓰이다 굳어지면 마치 하나의 명사처럼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 표기도 '머서기'로 쓸 수 있는데, 이 '머서기'의 형태가 약간 변하면 바로 '머시기'가 되는 것이다. '머서기'나 '머시기'는 하고자 하는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 쓰이는데, 예를 들어 '거 머시기말이여, 거 누구냐, 언능 이름이 생각 안 난디, 거, 옛날 우리 옆 집이서 살던 사람 있잔헌가?'에서 그 전형적인 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전라도말의 '머시기'와 '머석허다'의 쓰임새를 잘 관찰해 보면, 앞에서 언급한 '거시기'나 '거석허다'와 완전히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표현들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우선 이들 불분명한 표현을 먼저 말함으로써 보다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한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언어에는 기능이 같으면 형태마저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비슷해져 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언어학에서는 '유추(analogy)'라 부르거니와, '거시기'나 '거석'은 바로 이 유추에 의한 결과인 셈이다.

즉 지시어 '그'의 변형된 형태인 '거'에서 시작하여. 기능이 같은 '머시기'나 '머석'의 형태로부터 영향을 받아 '거시기'나 '거석'으로 발달했던 것이다. 따라서 '거시기'의 '시기'나 '거석'의 '석'은 애초부터 있었던 형태가 아니라 '머시기'나 '머석'을 본으로 삼아 생겨난 후대의 형태인 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라도 말에서 쓰이는 '거시기'와 '거석'의 형성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거시기'가 결코 전라도에서만 쓰이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어 사전을 찾아 보면 '거시기'는 버젓이 표준말로 등재되어 있고, '거석허다' 또한 '거식하다'의 형태로 올라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머시기'나 '머석허다'는 결코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사전에서의 처리가 다른 이유는 '거시기'나 '거식하다'가 중부지방에까지 그 사용 지역을 넓힌 반면, '머시기'나 '머석허다'는 아직도 전라도 지역에 국한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머시기'나 '머석허다'가 다른 지방으로 넓혀 사용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른 지방에서 '머시기'나 '머석허다'와 용법이 똑같은 '무엇'이나 '무엇하다'가 이미 사용되고 있어서 굳이 '머시기'나 '머석허다'와 같은 표현을 받아 들일 필요가 없었던 반면, '거시기'나 '거식하다'는 이에 대응하는 표현이 없었으므로 이를 수용하여 사용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출력  2003-10-30 19: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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