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화 - 사름
올해의 추석이 오늘로 딱 보름 남았다.
예년보다는 조금 이른 추석이기에 햇과일이 나오지 않는단다.
출․퇴근길에 보이는 논의 벼들도 하루가 다르게 초록을 벗고 노랑으로 변해 가고 있지만 보름 밖에
남지 않은 올해의 추석에는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햅쌀로 빚은 송편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은 모내기 이야기를 화두로 삼는다.
모내기를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일’이라고 정의할 때 이양기로 모를 심는 요즘 시대의
방식을 모내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모판에서 자란 모를 기계로 심는 것은 말 그대로 ‘이양’이고,
못자리에서 자란 모를 손으로 쪄 내어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심었던 것이 진정한 ‘모내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옛날 모내기의 하루를 묘사해 본다.
오늘은 아무개네 집 모내는 날.
논의 한 귀퉁이의 못자리에서 잘 자라고 있는 어린 모를 쪄낼 아짐씨들은 아침밥도 거른 채 새벽부터
하나, 둘씩 짝을 지어 그 논으로 향한다.
본격적인 모심기가 시작되기 전에 못자리의 모를 전부 쪄 내야 그 부분을 쟁기질하고 써레질하여 모를 심을 수 있다. 허리가 부실한 어떤 아짐씨는 비닐 속에 지푸라기 등을 담아 논바닥에서 깔고 앉을 수 있게 만든 방석을 준비하는 치밀함도 보인다.
초등학생인 우리들이 학교에 갈 때까지 계속되는 모를 쪄 내는 작업은
우리가 학교에 가는 길에 가져다주는 아침 도시락이 전달되면서 대충 끝이 난다.
그 아짐씨들이 늦은 아침밥을 먹는 동안,
이제는 아침밥을 집에서 먹고 나온 아제들이 미리 쪄서 지푸라기로 묶어 놓은 놓은 모(이를 ‘모춤’이라 한다)를 모를 지게로 저다 날라 오늘 모내기 할 논(한 곳에 있지 않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으로 운반하여 논의 곳곳에다 골고루 나누어 던져 놓는다.
이따가 모를 심을 때를 위해서다.
못줄을 잡을 사람은 세 사람인데 이들은 모를 본격적으로 심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일을 하여야 한다.
그 일은 논의 가운데를 대략 가늠하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가지 한 줄로 모를 미리 심는 것이다.
심어놓은 그 모는 이따가 가운데 사람이 잡은 못줄을 묶은 대(‘못줄대’라고 하자)가 놓일 위치가 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모를 심어보자.
가운데 못줄을 잡은 사람(‘갑’이라고 하자)이 먼저 못줄대를 미리 정하여진 위치에 놓으면 양쪽에서
못줄을 잡은 사람(‘을들’이라고 하자)도 따라서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이 되게 못줄대를 놓아 주어야 한다. 그러면 모를 심는 사람은 못줄에 빨간색 리본으로 표시된 그 위치에다 잽싸게 모를 심는 것이다.
‘갑’은 이쪽저쪽을 다 살펴 양쪽이 다 모가 심어지면 큰소리로 ‘넘기고’하면서 못줄대를 다음 위치에 놓는다. 그러면 양쪽의 ‘을들’도 따라서 못줄대를 옮긴다. 이 때 ‘갑’은 양쪽의 상황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 어느 한 쪽은 빨리 심고 어느 한 쪽이 더디게 심는다면 빨리 심는 쪽 사람 중 한 사람을 더디게 심는 쪽으로 보내 주어 소위 경제용어인 병목현상이 없게 하여야 한다.
모를 심는 사람의 곁에는 항상 모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등 이 병목현상을 없애야 하는 작업은 여러 곳에 존재한다. 모를 준비시켜 주는 아제들은 일부러 조금은 이쁜 아짐들에게 장난도 치는데 그것은 일부러 못단을 그 이쁜 아짐씨 옆으로 던져 흙탕물이 그 아짐씨에게로 몽땅 튀게 하는 것이다. 그 아짐씨도 겉으로는 욕을 해대며 못하게 하지만 웃는 얼굴과 목소리로 보아 분명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위 ‘못밥’이라고 불리는 점심을 먹는 시간은 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아까의 새참 때 한 잔 밖에 못 마셨던 농주도 이때는 양껏 마실 수 있고, 학교에 간 자녀들이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자기네 엄마, 아부지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와서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자주 먹을 수 없는 콩이랑 녹두를 넣어서 지은 먹음직스런 쌀밥이랑 있는 것 없는 것 아끼지 않고 해 내온 반찬들을 그 날 하루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맛있게 자식들에게까지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우리 아부지가 거기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 날, 그 시간만큼은 지나가는 어느 누구라도 불러서 점심을 같이 먹는 우리 농부들의 후한 풍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서서히 여름날의 긴긴 해가 멀리 천관산으로 뉘엿뉘엿 떨어져 간다.
그 날 모내기를 한 집의 논의 면적에 따라 모내기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대략 결정되는데, 참 신기하게도 초여름의 해가 이제 막 서산을 넘어가려고 마지막 광채를 뿜어내는 그 시간이 되면 오늘의 모내기도 끝이 난다는 것이다.
오늘도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친 우리네 엄마, 아부지들은 내일 또 기약된 다른 집의 모내기를 위하여 곤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라왔던 것이다.
이렇게 심어진 모는 약 일주일 정도 지나면 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이렇게 뿌리를 내리는 일을 ‘사름’이라고 하고 국어대사전에서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모춤 - 보통 서너 움큼씩 묶은 볏모나 모종의 단.
사름 - 모를 옮겨 심은 지 4~5일쯤 지나서 모가 완전히 뿌리를 내려 파랗게 생기를 띠는 일. 또는 그런 상태.
(2009년 추석을 보름 앞둔 초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