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 파수(波收)
우리 금산의 대흥(둔병치)에서 섰던 5일장이 사라진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8년 이쪽저쪽이라면 대략 40년은 넘은 것 같다.
(시골 초등학생인 우리의 눈에 비치는 시골장날의 풍경은 그야말로 호화롭고 풍성하였는데 이 장날의 풍경과 느낌은 ‘쇠머리의 추억’ 「초등학교 시절」에서 쓴 적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우리 금산은 2일∙7일에 장이 섰고 녹동은 3일∙8일에 장이 섰는데 왜 5일마다 장이 섰을까?
그 유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
「5일장이 서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시대 15세기 말 시작한 열흘 간격으로 열리던 장시(場市)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수가 증가하여 17세기 후반에는 5일 간격으로 열리게 된다. 열흘간격이 닷새간격으로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바로 보부상이다.
부보상들은 생산된 물품들을 무리를 지어 혹은 개별적으로 지역을 정해놓고 짊어지고 다니는데 시장과 시장을 옮겨 다니는데 알맞은 기간이 5일이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상업의 발달로 이 보부상이 활성화되면서 시장도 한층 더 활성화가 된 것이다.
5일장은 한 지역에서 한 달에 여섯 번을 서게 되지만 큰 마을 단위로 서므로 한 군에서 3~5군데서 장이 날짜를 번갈아 가면서 는데 군을 하나의 범위로 보면 한 달 내내 장이 옮겨 다니면서 열려 한 달 중 20일 가까이 장이 선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 시장체계의 형성은 적어도 한 군의 범위에서 교환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지금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뿐만 아니라 상설시장이나 농협연쇄점에 밀려 전통의 5일장이 점점 사라지고 몇몇 교통이 좋은 면(읍)단위의 시골에서나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데 우리 고흥군의 경우 녹동장, 고흥장, 과역장, 동강장 등이 아직까지 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5일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기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깥출입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아낙네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소통의 장소요,
일상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는 탈출구의 장소로도 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장에 가서 그 화려하고 예쁜 상품들을 굳이 사지 않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장에 갔다 왔다’는 큰 만족을 느꼈으니 요즘의 아이쇼핑의 근원이라고나 할까?
일전에 나는 고흥 과역장에 들러서 느낀 소회(펑튀기 장면, 대장간 풍경 등)를 짤막한 글로 표현한 적이 있는데 점점 사라져 가는 우리의 생활문화가 하 아쉽기만 하다.
나는 오늘 우연하게 5일장과 그 맥이 닿는(?) 파수(波收)라는 단어를 설명하고자 5일장을 소재로 글을 썼는데 생각지도 않게 (우리가 항시 일상적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시장(市場)이라고 하는데) 그 시장을 거꾸로 쓴 장시(場市)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장시(場市)와 대립되는 시전(市廛)이라는 단어를 접하여 이 글이 더욱 생명력을 얻게 된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맺는다.
각 단어의 풀이는 아래와 같으니 각자 그 차이를 느껴보기 바란다.
장시(場市) - [역사] 조선 시대에, 보통 5일마다 열리던 사설 시장. 보부상이 라는 행상이 있어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따위를 유통시켰 다.
시전(市廛) - ①시장 거리의 가게.
②<역사> 조선 시대에, 지금의 종로를 중심으로 설치한 상설 시장. 관아 에서 임대하여 주고,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과 난전을 금지하는 특 권을 주는 대신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바칠 의무를 부과하였다.
파수(波收) - ①닷새마다 매매한 물건 값을 치르던 일. ②장날에서 다음 장 날까지의 동안. ③여러 번 있는 일에서의 어느 한 번. 또는 어느 한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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