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 반살미
나는 요즘의 젊은이들을 만나면 우리나라의 인구에 대한 실상을 설명하고는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고 능력이 되는 한 자식은 많이 낳으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십중팔구는 나의 의견에 동조는 하면서도 본인이 그렇게 하기는 싫다고 답변한다.
빠른 결혼의 권유에 대하여는 결혼이라는 굴레에 얽매이기 싫다는 것이고,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권유에 대하여는 과중한 생활비(특히 교육비) 부담과 자아실현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주원인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다시 좀 더 심층적으로 우리나라의 인구수 및 연령대별 구성비를 설명하고 이 상태라면 얼마 되지 않아 피부양자(직장이 없는 노인)가 부양자(세금을 내는 직장인)보다 많아지는 시대가 올 것이며,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보면 우리 한민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극한 상황까지도 예측된다고 열변을 토해 보지만 막무가내다. 하기야 내가 낳아 기른 내 딸마저도 나의 이런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니 말해서 무엇하랴만.
우리나라의 인구정책이 왜 이런 상황에까지 내몰려 왔을까?
돌이켜보면 우리 같은 50년대 출생자들이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1970년대 후반부터 인구 밀도가 세계 몇(?) 위라고 걱정하면서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고 외치며 산아제한을 국가의 최우선시책으로 삼았던 것이 그 주요 원인일 것이다.
국가의 3대 요소가 국토, 국민, 주권이라면 국토는 한정되어 있어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위적으로 늘릴 수 없기 때문에 국민의 많고 적음이 곧 국력의 크고 작음의 지표가 된다는 것을 당시의 위정자들은 정말 몰랐을까?
교육정책이 백년대계라면 인구정책은 천년대계 아니 영구대계일진데 이렇게 불과 몇 십 년 뒤를 예측하지 못하고 산아제안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했던 그 사람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당시 공무원의 신분이었던 나도 서슬이 퍼런 군부정치 하에서 그들의 무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이 2명의 자녀만 두고 어떤 시술을 받아야만 했으니, 결혼하기 전부터 아들 둘, 딸 하나를 원했던 나로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 그러나 길어지므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오늘의 단어에 대해서만 얘기하자.
옛날 시골의 각 자연마을은 거의 모두가 친․인척으로 맺어진 자자일촌이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결혼을 하면 친․인척들이 가까운 순서에 따라 신랑․신부를 자기 집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며 서로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정겨운 풍습이 있었는데 이렇게 「갓 혼인한 신랑이나 신부를 일갓집에서 처음으로 초대하는 일」을 ‘반살미’라고 한다.
요즈음은 대부분 자녀의 수가 2명뿐이니 일가라는 말이 사라져가고, 그나마 각자의 사정에 따라 고향을 등지고 전국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생활방식에서는 반살미 같은 아름다운 풍습들이 이어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새로이 한 가족이 되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또 다른 우리만의 어떤 아름다운 풍습을 우리들이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근친(覲親) -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부모를 뵘.
배내리 - 시집간 색시가 친정에 가서 어른들을 뵘.
풀보기 - 신부가 혼인한 며칠 뒤에 시부모를 뵈러 가는 일.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아침인데도
기분이 개운하지 않고 뭔가가 찜찜하다.
월요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