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바다와 고라금 해수욕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거금도의 새벽은 고요했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사방은 조용했다. 바다 냄새가 묻어 있는 바람이 우리가 자고 있는 마루방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한여름의 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시원해 좋았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우리 일행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늦게까지 마시고 노느라 잠이 조금 부족한 듯했다. 그러나 몸이 가쁜했다. 섬이라는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새벽의 설레임 때문인지도 몰랐다.
새벽의 섬 마을 풍경이 보고 싶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일행도 필자의 인기척 때문에 깨었는지 일어나 따라나왔다.
집을 찾지 못한 게들이 한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빨갛게 단장한 예쁜 게가 우리들이 다가가면 쏜살같이 돌 틈이나 풀섶으로 숨었다. 저 게들은 아마 바람난 게일 거라고, 밤새 술을 잔뜩 마시고 집을 못 찾아 간 게일 거라고 농담을 하며 선착장으로 갔다. 드넓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시원했다. 그 시원함도 좋지만 파도가 너무 높아 오늘 일정이 걱정되었다. 금당도와 꽃섬에 가기로 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다. 그 걱정도 잠시 넓은 바다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선착장에 묶인 배들이 파도에 흔들리며 철퍽이는 소리가 들렸다. 떠나고 싶은 몸부림 같기도 하고 파도하고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한 그 소리를 음미하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른 일행도 별 말없이 바다바람을 맞으며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섬들의 풍경이 흐린 날의 고독 같이 펼쳐져 있었다.
아침 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전갈이 와 다시 진일 씨 집으로 향했다. 그새 이선용 씨와 진일 씨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차에서 무엇인가 내리면서 분주했다. 알고 보니까 우리에게 대접할 싱싱한 횟감을 구하기 위해 진부석 씨 배를 타고 녹동항에 다녀온 것이었다.
아침 식탁에는 구수한 토속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박 된장국, 무청김치, 젓갈, 깻잎 등 한결같이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었다. 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진일 씨 어머니와 며느리(진일 씨 부인 김영주 씨)에게 너무도 고마웠다. 늦도록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밥 한 그릇씩 다 비우고 추가로 더 먹기도 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흐렸다. 흐린 날은 회색빛이었지만 그런 대로 운치가 있었다. 비가 올 듯하다. 비가 오면 오늘 일정이 차질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비가 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벌써 한 달째 가뭄으로 인하여 밭작물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약간의 바람에도 황사가 일 정도의 심각한 가뭄이었다. 우리 일정이야 계획을 달리하면 그만이고 또 더운 여름이라 비를 맞고 쏘다녀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진일 씨의 안내에 따라 선착장으로 갔다. 배를 타고 거금도 주변의 섬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진일 씨의 친구인 진부석 씨가 배를 대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센 파도를 거침없이 가르고 헤쳐나갈 듯한 사나이, 섬 마을의 뚝심 있는 투박한 얼굴을 한 그는 별 말없이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 일행은 설레는 가슴으로 배에 올라탔다. 그런데 인원이 많아 필자와 이선용 씨 그리고 진일 씨는 타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녀온 곳이므로 그렇게 서운치는 않았다. 또한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고라금 해수욕장에서 준비해야 할 일이 있기도 했다. 서로 손을 흔들며 잠시 작별한 뒤 진일 씨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먹을 음식을 봉고차에 싣고 고라금 해수욕장으로 갔다. 탁 트인 바다가 너무도 시원해 보였다. 물도 꽤 맑았다. 이 정도의 해수욕장이면 사람들이 한창 많을 때인데 장사하는 사람 하나 없이한산했다. 진일 씨의 말은 좋은 해수욕장인데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끼리 호붓이 즐길 수 있어서 차라리 좋았다.
우리는 해안가 소나무 밑에 다 같이 모여서 먹을 자리를 마련하기에 분주했다. 생선 끓여 먹을 것을 대비해 부탄까스 놓을 자리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앉을 수 있는 면적 등을 고려해서 장소를 물색했다. 대강 정리하고 진일 씨 가족들이 흥겹게 물놀이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을 때였다. 진부일 씨가 금당도로 회원들을 싣고 갔던 배가 돌아오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회원들은 한결같이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다녀 온 곳이 어떻더냐고 물어보니 하나 같이 좋았다는 대답이다. 특히 금당도의 오페라하우스가 환상적이라고 했다. 역시 예측 대로였다. 지층의 변화로 인해 솟아난 암석이 호주의 오페라 하우스 모양으로 솟아나 있는 해안이 아주 장관인 곳이다. 그런 절경들이 금당도의 연안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녀온 회원들은 그 절경을 깔고 앉아 한나절 술잔을 기울이며 시라도 읊조리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무척 아쉽다고 했다.
배를 모랫벌 가까이에 댄 진부석 씨는 아예 배 위에서 먹거리를 즐기자고 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먹어보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 아닌가. 소나무 아래 이미 준비해 두었던 부탄까스며 양념장 그리고 고추와 마늘 들을 가지고 와서 선상에 펴놓았다. 선창 바닥 저장고에 있는 커다란 문어를 꺼내 삶고 펄떡이는 생선을 잡아 진일 씨와 진부석 씨가 회를 떴다. 소주잔이 돌았다. 선상에서 먹는 기분이 색달랐다. 뱃전에 걸터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금방 배가 불렀다. 소주도 많이 마셨는데도 이상하게 취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먹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 소나무 밑으로 갔다. 먹다 지친 우리 일행은 서서히 배에서 내려와 주변 경치를 둘러보고 일부는 물놀이를 하고 일부는 그냥 그렇게 쉬고 있기도 했다.
필자는 이인평 시인의 꼬임에 넘어가 물놀이를 했다. 이인평 시인은 물만 보면 들어가지 않고는 못 견뎌 했다. 수영 실력도 대단했다. 필자에게 수영을 가르쳐 준다고 수영자세를 일러주기도 했지만 도무지 익혀지지 않아 그냥 물장난만 하고 놀았다. 해수욕장 연안이 완만하여 필자 같이 수영 못하는 사람이 놀기에는 아주 적격이었다. 한참을 놀고 있자니 다른 시인들도 하나 둘씩 물에 들어왔다. 윤준경 시인도 아주 유연한 동작으로 수영을 하며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멋있어 박수를 보냈다.
한참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꾸물거리던 날씨가 드디어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문득 선상에 있는 시인들과 음식들이 걱정이 되어 바라보았다. 텐트도 없기 때문에 비를 피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헌데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진부석 씨가 커다란 파라솔 2개를 펴고 있었다. 그거면 비를 피하는 데는 충분할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다 젖어 있어 비 내리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더 즐거웠다. 빗방울이 떨어져 바다물에 꽂히는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어느 시인의 시집에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구절이 바로 이 광경이구나 생각되었다. 그 풍경에 탄성을 지르며 물놀이를 실컷 하였다. 그런데 지칠 줄 모르고 선상에서 계속 술잔을 기울이는 시인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임보 시인과 홍해리 시인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좀더 정확하게 말해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2시까지 줄곧 선상에 앉아 주회(酒膾)를 즐기는 거였다. 거기다가 이선용 씨, 진일 씨, 진부석 씨는 무슨 할 말들이 많은지 여전히 회를 떠서 먹으며 이야기를 거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고 대단하다, 젊은이들 못 당하겠다고 하며 깔깔거렸다.
물놀이에도 지치자 일부 시인들은 비를 피해 진일 씨 집으로 갔다. 몇 사람이 남아 뒷정리를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빗방울이 더욱 거세지고 파도가 점점 드세졌다. 진부석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배를 몰았다. 얼마나 세게 몰던가 빗줄기가 우박처럼 아프게 얼굴을 때렸다. 빠른 속력에 질렸는지 여류시인들이 들고 있던 포도를 놓쳐 선상에 뒹굴고 있었다.
집에는 온통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들로 넘쳐 났다. 목욕할 장소가 모자라 남자 시인들은 칸막이도 없는 뒤란에서 목욕하고 여류 시인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욕탕에서 목욕하느라 줄을 섰다.
◆ 거금도를 돌며 흩어진 마음의 섬 잇기
오락가락 하던 날씨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축축했던 마음 마저 걷히는 듯했다. 지겹도록 놀아서인지 다들 지쳐 방에서 쉬고 있었다. 맹숭맹숭 흐르는 시간이 아쉬웠다. 이 때 박희진 시인을 비롯해 몇 분이 이곳 섬을 돌아보자 했다. 어차피 이곳까지 왔으면 피곤하더라도 섬을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여 희망하는 사람에 한하여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은 월포였다. 국악원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거대한 팽나무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팽나무의 굵기가 필자의 아름으로 자그만치 5발이나 되었다. 그 나무의 기상이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 같았다. 나도 저 나무처럼 푸르고 위풍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편으로 탁 트인 바다, 은빛 갯벌과 바다물결 건너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해넘이가 아름다워 거금도의 팔경에 속한다고 했다.
다음에 찾아간 홍연 마을은 거금도의 오지다. 산자락이 높고 깊어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마을이다. 산자락의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오죽했으면 고산 윤선도 선생이 낙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팽나무를 심고 갔을까. 마을 바로 뒷자락에 고산이 심었다고 하는 고산목이 아직도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오랜 풍상에 가지는 떨어져 나가고 몸통은 깊이 패여 있었다. 그러나 병풍처럼 높게 자리잡은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는 고산목은 터주신과 같은 신비함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천은 몽돌해안으로 유명하다. 파도 치는 해안가에 몽돌이 끝없이 깔려 있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돌 하나 하나가 마치 조각해 놓은 것처럼 둥글넓적했다. 억겁 세월의 물결에 다듬어진 맑은 형상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천을 지나자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가 시작되었다. 도로 주변으로 펼쳐지는 해안풍경들이 절경이었다. 꼬불꼬불 나있는 길 따라 우리의 마음도 달리고 수시로 변하는 풍경에 도취되면서 용두봉에 도착했다. 용두봉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생긴 산봉우리 이름이다. 완만하게 그리고 거대하게 자리잡은 산자락의 위용이 감히 사람들을 범접케 하지 못하는 기상을 지닌 듯했다. 그런데 산모롱이를 돌아보니 그 거대한 산자락 중턱이 사정없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경악을 금치 못할 풍경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오석이 질이 좋아 대부분이 일본으로 팔려간다고 한다. 마치 우리 땅을 일본에게 팔아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채석을 한 자리는 호수처럼 패여 물이 차 있었고 그 주변에는 파헤쳐진 돌들이 볼썽사납게 석산을 이루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발길을 옮겼다.
가파르고 미끄러운 언덕길을 겨우 지나 대흥리에 도착했다. 대흥리에는 김일 공원이 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 붐을 이루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우상이었던 프로레슬러 김일.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낸 우상이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김일을 좋아한다. 우리 고향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고 텔레비젼이 한 동네에 겨우 한두 집 있을 때 우리는 그 레슬링 경기를 보기 위해 저녁을 굶으면서까지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지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금산면 양조장으로 갔다.
금산양조장은 이곳의 특산물인 유자로 막걸리를 빚고 있었다. 양조장 안에는 막걸리통이 흐르는 지하수에 시원하게 담겨져 있었다. 큰소리로 주인을 찾자 아주머니가 나왔다. 진일 씨가 막걸리 5병을 사자 아주머니는 선 듯 막걸리 두 대접을 가득 담아 마시라고 주었다. 기다리는 일행을 생각해서 단숨에 마셨다. 유자 향기가 배어 있는 달콤한 막걸리였다. 일행들 몰래 마시는 술이어서 더욱 맛이 있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거금도 해안도로를 따라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진일 씨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오늘 겪었던 일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해안 도로 일주 이야기도 있었지만 특히 고라금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고라금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소재로 영화제목을 만든다면 어떤 제목이 좋겠느냐고 했다. 저마다 내놓은 기발한 제목들에 우리는 낄낄대며 웃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우리는 시에 대한 담론을 하기 위해 방으로 모두 모였다. 오늘의 담론 발제는 임보 시인이다. 평소 시에 대한 깐깐한 이론과 담론으로 우리에게 많은 일깨움을 주는 우이시 회장이다. 담론의 주제는 우리의 고전인 한시를 어떻게 현대시에 접맥시키는가 하는 것인데, 만해 한시 두 편(「思鄕苦」와 「悟道頌」)을 들어 감상하면서 한시의 깊이를 논하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한시와 고전 속에서 현대시를 살지게 하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더위를 참아가며 함께했던 담론 시간은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담론이 끝나고 우리는 마루로 나왔다. 양조장에서 사온 유자막걸리를 먹으며 이틀 동안의 일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우리 식사와 잠자리들을 마련하느라 고생하신 진일 씨 어머니와 진일 씨 부인인 김영주 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모두 모여들 앉아 밤늦도록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아 필자는 약간 피곤해 보이는 정성수 시인과 진병일 씨 집으로 갔다.
◆ 돌아오는 길에
―결국 우이시 회원이었다
새벽녘, 약간의 미명이 스며들어와 잠을 깨웠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누워 있는 것보다는 새로운 아침 풍경을 보고 싶었다. 곁에 다른 일행들을 세상 모르고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들이 깰까봐 살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일찍 일어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일부는 마을 뒷산을 오르고, 일부는 오천 몽돌해안으로 다시 가고, 일부는 인근 마을 바닷가를 돌고, 몇 사람은 시비 공원에 들렀다. 모두가 바쁘게 돌고 때 맞춰 아침 식사하기 위해 모였다.
거금도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다. 새삼 모든 음식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아마도 서울에 올라가서 한동안은 이 음식들이 생각날 것이다. 모두 잘 먹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짐들을 챙겼다. 진일 씨 어머님께서 서운하다고 양파와 마늘을 잔뜩 싸 주었다. 이틀 동안 잠자리를 제공해준 진병일 씨댁과 특히 장구 치고 소리를 해 주신 진양동 씨께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다. 진양동 씨 부인되시는 분이 골목을 나와 우리에게로 왔다. 검은 비닐에 퍼덕이는 물고기를 보이며 우리 서울 손님들 회 떠드시라고 가져온 거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고, 마음 만으로라도 고맙다고 먹은 거나 진배없다고 인사를 했다. 그래도 서운해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도 다감하게 느껴졌다.
아침 9시, 금진에서 녹동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거금도여 안녕. 우리는 떠난다. 정든 사람들이여! 잘 있으시라.
올라오는 길에 낙안읍성에 들르기로 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선사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향토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낙안의 역사와 생업, 의례, 풍속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돈되어 있다. 우리 선조들의 삶을 다시 생각하고 옛날 고향의 정취를 흠뻑 느끼며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주막집 같이 운치 있는 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더위는 점점 더 심했다. 그러나 그 더위도 즐거움에 별로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하여 조계산 동쪽에 있는 선암사를 추가로 더 둘러보기로 했다.
선암사는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仙巖寺라고 한다. 이 절은 선종·교종 양파의 대표적인 가람으로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고태어린 매화나무와 와송 그리고 백일홍나무를 보고 산사의 고요함을 가슴에 담고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차안에서는 다시 음주 가무가 시작되었다. 너무도 먼 거리이기 때문에 따분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흥이 넘쳐 그런 것 같았다. 그 많은 시간 동안 그렇게 깔깔거리고 논 것은 아마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 노래 중 변규백 선생님의 빨간딱지 노래 <옹달샘> <첫날밤에> <하늘이 들썩> <뽕밭에서 나왔다고> 등 여러 노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는 <마음만은 돼도>라는 노래였다.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그리고 즐겁게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노래하는 사이에 서울에 도착했다. 저녁 10시가 지났다.
그렇게 우이시 하계수련회는 끝났다. 2박 3일 동안 내내 함께 한 것은 사람들의 정이었다. 진양동 씨와 진부석 씨, 진병일 씨 그리고 신양리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줄곧 함께한 이선용 씨와 진일 씨 이들의 따스한 정이 있어 이번 수련회는 더욱 좋았다. 정성수 시인의 말대로 이번 수련회는 외국에 다녀온 것보다도 더 좋았다. 함께 했던 우이시 회원들 간에도 더 많은 정을 쌓았다.
이번 수련회에서 필자는 보았다. 우이시 회원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질실을, 그리고 느꼈다. 우이시 회원들의 인간적인 따스한 정을, 그리하여 우이시는 발전할 것이고, 우이시 미래는 밝다는 생각을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번 같이만 함께 할 수 있다면 우이시는 영원할 것이다.
거금도의 달밤 마루방에서
―정성수 선생님께
거금도의 달빛에는 바닷바람이 묻어 있었지요
서울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구경나와 놀아주던 사람들같이
달빛이 추녀 밑을 파고 들어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함께 했지요
혹시 더울까 봐 창문 열어주고 보살펴주던
섬마을의 어머니 마음같이
선선한 바람이 불어 왔지요
이틀 동안 함께 했던 마루방은 꿈 많은 내 유년의 방이었지요
고독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선생님과
고독을 모르고 좋은 사람이나 찾는 철부지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꿈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우이시' 여류 시인들과 있었던 한낮의 풍경을 놓고
'눈뜨고는 도저히 못 봐주겠네'
'인어공주가 모랫벌로 나온 까닭은'
'빈 배 타고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영화 제목을 지으며 낄낄거렸지요
모두가 사랑이었지요
어느새 형제보다 연인보다 아름다운 동업자가 되어
한 사나이와 또다른 사나이가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는 밤은 그렇게 깊어 갔지요
나는 알지요
시집을 내준다는 곳도 없으면서
문단도 모르고, 알아주지 않아도
목숨 걸고 시를 쓰는 이유를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시인이란 걸 나는 알지요
바닷바람이 묻어 있는 달빛이 스러지고
우리는 드넓은 바다 갈매기의 꿈을 꾸며 잠들었지요
* 이대의 시인은 199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현재 <풀밭>동인으로 활동중이며 방통대학 신문사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우이시회>라는 곳에서 2001년 8월6일~8일(2박3일)동안 회원님들께서 고향 거금도를 방문하셔서 고향에 대한 느낌과 여운을 글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출처 홈: http://www.wooisi.or.kr
발췌 페이지 : http://www.wooisi.or.kr/month/month_main01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