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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찾아왔고 사위는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내 삶을 국민에게 고하고, 역사에 바치는 마지막 의식으로 알고
지난세월을 경건하게 풀어 보겠다.
막상 마지막이라니 후회 없는 삶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일생이 고난에 찼지만 결코 불행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는 존경하는 인물들이 숱하게 많다.
그들과 교감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얻어 나를 성장시켰지만 어떤 위인의 생과도
나의 일생을 바꿀 생각이 없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열 번 다시 태어나서 똑같이 살라 해도 기꺼이 되풀이해서 살 것이다.
격동의 굽이굽이를 헤쳐 여기에 서 있다.
돌아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를 퍼 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제 강점기,해방,군정,전쟁,분단의 시대를 살았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험한 시기가 있었던가.
격랑,격변,격정의 세월이였다.
나는 세상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옳다고 여기면 정면으로 부딪혔다.
어떤 협박과 회유에도 꺽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 삶은 윤택하거나 고상하지 않다. 

일생 동안 악의 속삭임에 무수히 흔들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하느님과 국민들을 배반 할 수 없었다.
굳건하게 나를 지켜준 아내를 낙담하게 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칠 수 없었다.
또 이러한 노력들이 당대에 평가받지 못하더라도 역사가 평가하리라 믿었다.
역사의 뒤편에는 정의와 진실을 주관하는 신이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왜 정치를 시작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였다.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일어난 정치 파동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나는 정치를 증오하거나 정치인을 폄훼하지 않았다.
정치인은 현실의 장에서 국민과 힘을 합쳐 국민을 괴롭히는 구조적인 악을 제거 해야한다.
사람을 근본으로 여기고,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여는 정치야 말로
어쩌면 가장 성스러운 것 아닌가.
나는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더러는 그런 나를 '대통령병 환자' 라고 매도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정치를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라 여겼다. 

악을 보고 행동하지 않는 은둔과 침묵은 기만이고 위선이다.
내가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치인으로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늘 길 위에 있었기에 고단 했지만
내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경계하였다. 

지식의 정점에 서있는 철학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 의사당에 앉는 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6년간 감옥에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
대통령 후보, 야당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 일이 있었다.
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정적들은 나를 '용공'으로 몰았다. 또 지역감정이 내 생을 따라 다녔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수렁 속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수없이 분노하고 좌절했고, 다시 수없이 인내하고 일어섰다.
그들이 부끄러워 할 날이 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생전에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또 어떤가.
우리에게는 모두에게 공평한 역사가 있잖은가.
아쉽지만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일생동안 꾾임없이 공부했다.
숱한 시련과 실패 속에서도 내일을 준비했다.
사망의 계곡에 떨어졌을 때도 절망하지 않았다.
두려워 울면서 미래를 설계했다.
민족과 조국에 나를 바칠 그날을 기다렸다. 

사형수와 대통령
그것은 내 삶의 상징이다. 

사형수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 기적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국민들이 일궈 낸 현대사의 기적일 것이다.
인생 끄트머리에서 돌아보니 너무도 많은 고비들이 있었다.
그 고비마다에는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뜬 사람도 있지만
나와 아직도 동시대를 호흡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
나 때문에 고통을 받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얼마 많은가.
나는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물을 제대로 닦아 주지 못했다.
그들에게 진정 용서를 구하고 싶다. 

자서전을 통해 다시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서전만은 진솔하게 기록하고 싶다.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고,
혹시 나의 발자취가 '겨레의 길'을 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면 다시 용서를 구할 일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지난날들을 펼쳐보니 모두 아름답다. 

나의 자서전은 미래 세상의 주인공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이기도 하다.
백성들이 주인인 세상에서 모두 평화롭기를 빈다.
                                                                           봄날 동교동에서 김대중. 

나는 마지막 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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