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고추를 따먹히고 티밥을 얻어먹던 조무래기들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두 해 정도가 더 지나면 아이들은
더 이상 티밥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서지 않는다.
물론 고추를 따먹히는 대상에서도 제외가 된다.
주변의 눈을 의식할 줄 알게 되고 티밥을 얻어먹는 일이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자각이 생길 때쯤이면 이런 일들은 동생들의 몫이 되고
놀기가 본업인 유년시절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반 농, 반 어촌의 특성으로 인해 사철이 바쁜 우리 고향의 어린 일꾼의
삶이 부여되면서 서서히 고달픔이 시작되는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소를 먹이러 다녀야 하고 여자아이들은
온갖 집안 일을 거들어야 했다.
거기다가 틈틈이 짬이 나면 나무도 해서 날라야 되고.
겨울에는 걸음만 걸을 줄 알면 손을 빌린다는 해우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 해 보면 우리네 부모님들은 참 알뜰하게도 우리를 부려먹었던 것 같다
자식이 한 밑천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하지만 어디 그러고 싶어서 그리 했을까?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로 우리의 부모님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논과 밭 그리고 바다에서 허리가 휠 정도로 일을 하셨다.
허리 한 번 맘놓고 필 사이 없이,
그래도 사는 것은 어찌 그리 힘들었는지......
까맣게 그을린 일에 지친 모습으로 떠오르는 우리 부모님들의 젊은 날의 초상은
그 좋은 시절을 일만하다 다 보내 버린 것 같아
안쓰럽고 가엾어서 마음이 아프다.
특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관계로 다른 집보다 갑절은 더 힘들었을 우리 집 어른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안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겨우내 외양간에서 여물을 먹고 지내던 소들은 봄이 되어 세상이 온통 연두색으로
물이 오를 때쯤이면 산으로 외출을 시작했다.
봄부터 시작해서 늦가을까지 계속되는 소먹이기는 주로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드물게 할아버지들이나 우리 집처럼 아들이 귀한 집에서는 여자아이들도 동참을
했지만 대체로 소수였고 그 맴버들도 들쑥날쑥했다.
소먹이기는 사장나무 조무래기 시절을 졸업한 남자아이들에게 그 시절의 연장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입문이었다.
소를 산에 갔다 놓음과 동시에 확보되는 오후의 긴 자유시간,
그 속에서 그들은 무궁한 놀이거리들을 찾아냈다.
자치기, 닭싸움, 씨름, 기마전, 팔씨름에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했던 각종 서리들까지...
놀다가 더우면 가까이 있는 물을 찾아 망설임없이 옷을 벗어던지고 자맥질하고,
그것도 시들해지면 풀 잘 뜯고있는 소들 끌어다가 뿔싸움을 시키면서 대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동네 소들의 싸움순위가 매겨지기도 했는데 싸움짱으로 등극 된 소 주인의
흡족함과 긍지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사장나무 시절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놀기의 참맛을 알았던 또 다른 황금시절이었다.
후회 없이 놀면서 그 속에서 싸우면서 친구를 만들고, 우정을 쌓고, 추억을 만들고,
인생을 배워 갔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의 길은 고달프고 외로운 법,
이처럼 활력 있고 재미있는 소먹이기가 여자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미 이 시기쯤이면 남녀가 유별해서 남자 여자가 같이 노는 법은 거의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그저 관찰자에 불과했고 그냥 떠도는 섬이었다.
재미있게 놀려면 어느 정도의 충분 조건의 인원이 필요했는데 여자아이들은
이것이 확보되지 않았고 또 어렵사리 몇 명이 모아져도 너무 나이차이가 나서
그 차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에게 소먹이기는 상당히 지루하고 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계셨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관계로
할아버지는 일을 하시고 언니와 나, 남동생 중에서 번갈아 소를 먹이러 다녔는데
나는 그 일이 정말로 하기 싫었다.
평소에는 별로 겁이 없는 편이었는데 성질 더러운 우리 집 소한테 왼손을 밟힌
뒤로 소가 겁도 나고 또 나랑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중에는 나처럼 소를
먹이러 다니는 아이가 거의 없어서 몹시 심심했다.
내가 소 먹이러 가는 당번으로 정해질 때마다 안가겠다고 버텨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할아버지로 기억되는 자상하고 인자한 우리 할아버지의
칭찬 몇 마디때문에 싫다는 말도 못하고 꾸역꾸역 다녔지만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소먹이기를 싫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소를 잃어버리고 돌아올 때의 참담함 때문이었다.
학교 갔다와서 바로 소와 함께 산으로 갔는데 같이 갔던 소를 잃어버리고 어둑어둑
해진 길을 혼자 돌아오면서 느끼는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공포와 난감함이란......
가슴은 쉴새없이 두근 거리고 동네에서 반짝이는 불빛마저도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 완패한 병사의 모습으로 새가슴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어른들에게
개미 만한 목소리로 소를 잃어 버렸다고 말하기까지의 과정과
상황들은 지금 생각해도 다시 겪고 싶지 않는 악몽이자 비참함의 결정체였다.
소를 잃어 버렸다고 맞았다거나 심하게 야단을 들은 기억은 거의 없는데
그래도 소를 잃어 버리는 일은 항상
몹시 무서운 일이었다.
이상하게 독립적이었던 우리 집 소들은 동네 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따로
놀아서 소를 자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내내 소 뒤를 졸졸 따라 다녔는데 꼭 막판에 한눈을 팔아서 소를 잃어 버렸다.
내 딴에는 다른 애들처럼 잘 놀지도 않고 정말 열심히 소를 지켰는데
번번히 소를 잃어버리는 현실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한가로이 거닐면서 마음껏 풀을 뜯어먹어야 할
소 뒤를 계속 따라 다니니 겁이 많은 소가 신경이 쓰이고 불안해서
마음대로 못하다가 잠깐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잽싸게 돌파구를 찾아서
숨어버린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헤아릴 만한 분별보다는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소를 잃어버린 날 밤에는 소가 밤사이 바다를 헤엄쳐서 멀리 육지로 도망가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다행히 잃어버린 소는 그 다음날 빠르면 오전 늦어도 오후에는 대부분 찾아졌지만
다른 사람보다 자주 소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 남달랐던 기억력으로 인해 그래도 제법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았던
나로 하여금 몹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이래저래 소먹이기는
나에게 애쓴 보람도 없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우연한 기회에 어린 시절 얘기를 하다가
남편에게 이때의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너무나 뜻밖의 말로 내 뒤통수를 쳤다.
시골출신이었지만 소가 집에 없었던 남편은 소먹이로 가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나!
그래서 빈 새끼줄을 들고 소를 끌고 가는 흉내를 내면서
친구들을 따라 다녔다는......
훗날 이렇게 만날 줄 알았다면 그때 데려다가 데릴사위로 삼아 마음껏 부려먹을걸,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아서 아싸!, 앗싸! 했을 텐데......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미래의 오지 않는 시간들을...
인생은 예측불허여서 그 의미를 갖는다지만
때때로 너무나 불공평해서
헛웃음 짓게 만들고
그로인해 사는 것이 덜 지겨운지도 모른다..
고추를 따먹히고 티밥을 얻어먹던 조무래기들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두 해 정도가 더 지나면 아이들은
더 이상 티밥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서지 않는다.
물론 고추를 따먹히는 대상에서도 제외가 된다.
주변의 눈을 의식할 줄 알게 되고 티밥을 얻어먹는 일이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자각이 생길 때쯤이면 이런 일들은 동생들의 몫이 되고
놀기가 본업인 유년시절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반 농, 반 어촌의 특성으로 인해 사철이 바쁜 우리 고향의 어린 일꾼의
삶이 부여되면서 서서히 고달픔이 시작되는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소를 먹이러 다녀야 하고 여자아이들은
온갖 집안 일을 거들어야 했다.
거기다가 틈틈이 짬이 나면 나무도 해서 날라야 되고.
겨울에는 걸음만 걸을 줄 알면 손을 빌린다는 해우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 해 보면 우리네 부모님들은 참 알뜰하게도 우리를 부려먹었던 것 같다
자식이 한 밑천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하지만 어디 그러고 싶어서 그리 했을까?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로 우리의 부모님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논과 밭 그리고 바다에서 허리가 휠 정도로 일을 하셨다.
허리 한 번 맘놓고 필 사이 없이,
그래도 사는 것은 어찌 그리 힘들었는지......
까맣게 그을린 일에 지친 모습으로 떠오르는 우리 부모님들의 젊은 날의 초상은
그 좋은 시절을 일만하다 다 보내 버린 것 같아
안쓰럽고 가엾어서 마음이 아프다.
특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관계로 다른 집보다 갑절은 더 힘들었을 우리 집 어른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안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겨우내 외양간에서 여물을 먹고 지내던 소들은 봄이 되어 세상이 온통 연두색으로
물이 오를 때쯤이면 산으로 외출을 시작했다.
봄부터 시작해서 늦가을까지 계속되는 소먹이기는 주로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드물게 할아버지들이나 우리 집처럼 아들이 귀한 집에서는 여자아이들도 동참을
했지만 대체로 소수였고 그 맴버들도 들쑥날쑥했다.
소먹이기는 사장나무 조무래기 시절을 졸업한 남자아이들에게 그 시절의 연장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입문이었다.
소를 산에 갔다 놓음과 동시에 확보되는 오후의 긴 자유시간,
그 속에서 그들은 무궁한 놀이거리들을 찾아냈다.
자치기, 닭싸움, 씨름, 기마전, 팔씨름에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했던 각종 서리들까지...
놀다가 더우면 가까이 있는 물을 찾아 망설임없이 옷을 벗어던지고 자맥질하고,
그것도 시들해지면 풀 잘 뜯고있는 소들 끌어다가 뿔싸움을 시키면서 대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동네 소들의 싸움순위가 매겨지기도 했는데 싸움짱으로 등극 된 소 주인의
흡족함과 긍지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사장나무 시절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놀기의 참맛을 알았던 또 다른 황금시절이었다.
후회 없이 놀면서 그 속에서 싸우면서 친구를 만들고, 우정을 쌓고, 추억을 만들고,
인생을 배워 갔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의 길은 고달프고 외로운 법,
이처럼 활력 있고 재미있는 소먹이기가 여자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미 이 시기쯤이면 남녀가 유별해서 남자 여자가 같이 노는 법은 거의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그저 관찰자에 불과했고 그냥 떠도는 섬이었다.
재미있게 놀려면 어느 정도의 충분 조건의 인원이 필요했는데 여자아이들은
이것이 확보되지 않았고 또 어렵사리 몇 명이 모아져도 너무 나이차이가 나서
그 차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에게 소먹이기는 상당히 지루하고 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계셨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관계로
할아버지는 일을 하시고 언니와 나, 남동생 중에서 번갈아 소를 먹이러 다녔는데
나는 그 일이 정말로 하기 싫었다.
평소에는 별로 겁이 없는 편이었는데 성질 더러운 우리 집 소한테 왼손을 밟힌
뒤로 소가 겁도 나고 또 나랑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중에는 나처럼 소를
먹이러 다니는 아이가 거의 없어서 몹시 심심했다.
내가 소 먹이러 가는 당번으로 정해질 때마다 안가겠다고 버텨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할아버지로 기억되는 자상하고 인자한 우리 할아버지의
칭찬 몇 마디때문에 싫다는 말도 못하고 꾸역꾸역 다녔지만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소먹이기를 싫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소를 잃어버리고 돌아올 때의 참담함 때문이었다.
학교 갔다와서 바로 소와 함께 산으로 갔는데 같이 갔던 소를 잃어버리고 어둑어둑
해진 길을 혼자 돌아오면서 느끼는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공포와 난감함이란......
가슴은 쉴새없이 두근 거리고 동네에서 반짝이는 불빛마저도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 완패한 병사의 모습으로 새가슴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어른들에게
개미 만한 목소리로 소를 잃어 버렸다고 말하기까지의 과정과
상황들은 지금 생각해도 다시 겪고 싶지 않는 악몽이자 비참함의 결정체였다.
소를 잃어 버렸다고 맞았다거나 심하게 야단을 들은 기억은 거의 없는데
그래도 소를 잃어 버리는 일은 항상
몹시 무서운 일이었다.
이상하게 독립적이었던 우리 집 소들은 동네 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따로
놀아서 소를 자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내내 소 뒤를 졸졸 따라 다녔는데 꼭 막판에 한눈을 팔아서 소를 잃어 버렸다.
내 딴에는 다른 애들처럼 잘 놀지도 않고 정말 열심히 소를 지켰는데
번번히 소를 잃어버리는 현실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한가로이 거닐면서 마음껏 풀을 뜯어먹어야 할
소 뒤를 계속 따라 다니니 겁이 많은 소가 신경이 쓰이고 불안해서
마음대로 못하다가 잠깐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잽싸게 돌파구를 찾아서
숨어버린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헤아릴 만한 분별보다는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소를 잃어버린 날 밤에는 소가 밤사이 바다를 헤엄쳐서 멀리 육지로 도망가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다행히 잃어버린 소는 그 다음날 빠르면 오전 늦어도 오후에는 대부분 찾아졌지만
다른 사람보다 자주 소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 남달랐던 기억력으로 인해 그래도 제법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았던
나로 하여금 몹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이래저래 소먹이기는
나에게 애쓴 보람도 없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우연한 기회에 어린 시절 얘기를 하다가
남편에게 이때의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너무나 뜻밖의 말로 내 뒤통수를 쳤다.
시골출신이었지만 소가 집에 없었던 남편은 소먹이로 가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나!
그래서 빈 새끼줄을 들고 소를 끌고 가는 흉내를 내면서
친구들을 따라 다녔다는......
훗날 이렇게 만날 줄 알았다면 그때 데려다가 데릴사위로 삼아 마음껏 부려먹을걸,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아서 아싸!, 앗싸! 했을 텐데......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미래의 오지 않는 시간들을...
인생은 예측불허여서 그 의미를 갖는다지만
때때로 너무나 불공평해서
헛웃음 짓게 만들고
그로인해 사는 것이 덜 지겨운지도 모른다..
지친 하루의
고단함을 달랠 수 있다면(나그네들)
언니는 엄청난 보시를 한 거라고 봐!
어쩌나 !
혼자 복 다 받겠네!
과거(추억)가 우리들의 미래는 될 수 없어도
작은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오늘의 숨 가쁨도 조금은 여유로워 질 거라고 봐!
그믐날 저녁에 소라도 잃어버리면
그 암흑속에서 느낀 공포란
상상초월!
소를 잃어버린 덕분에 온 천지를
해매느라 (이 산 저 산 이 골짝 저 골짝)
이렇게 지리감각이 좋아졌나!
우리들의 팥쥐 엄마는
노동력 착취를 통해서
형제들을 자립적, 독립적으로
성장시키는 탁월한 교육감각을 지니셨던 것 같아 -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