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이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서 이름으로 불려지는 대상들이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고유명사로 불리며 동네를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
동네의 터줏대감이지만 동네사람들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말 없이 떠있는 섬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살아서 슬프고 가엾은 사람들,
동네의 관찰자일 수밖에 없어서 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멸시와 질시의 대상이 되어서
영혼이 춥고 외로운 이 사람들은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는데
지능이 약간 모자란다거나 정신적 신체적 결함등으로 자신의 의사 표현에 문제가 있었다.
한마디로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요즘이야 이런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나 복지가 많이 좋아져서
옛날보다 형편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네 정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시선이 그렇게 고운 편이 아니라서 안 그래도 외롭고 슬픈 영혼들을
더 힘들고 쓸쓸하게 한다. 오늘은 이렇게 외로운 영혼이면서도
우리 동네 아래뜸 아이들과 유년의 한 시절을 같이 하며 기억의 한페이지를 장식했던 한 친구를 소개할까 한다.
"여남례", 모두로부터 불려지던 그 친구의 이름이다. 본래의 이름이 연함인지 아니면 여남녀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한씨라는 성을 가졌지만 나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은 모두 성을 빼고
그냥 '여남례'라고 불렀다. 나이는 나보다 7~8살이 더 많은 걸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나나 내 친구들은 여남례를 언니나 누나로 부르는 일은 없었다.
나보다 더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남례는 선천성 뇌성마비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지능은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은데 신체장애가 심하고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걸어 다니는 것은 한 쪽 다리를 끌면서 불안정하게나마 걸어 다녔는데
손이나 팔은 꼬이거나 뒤틀림이 심해서 일반적인 일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장애 정도가 심해 학교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며 의사 표시는 고개로 Yes 또는 No를 나타냈고
가끔은 손짓이나 단발마 같은 이상한 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할 때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본인도 아주 급할 때 아니면 대체로 침묵했다.
희노애락은 대부분 얼굴로 표현했는데 이또한 장애인 특유의 근육일그러짐으로 인해 분명하지가 않아서
제대로 표현이 되지 못했다. 여남례에게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눈이었다.
끈임 없이 눈알을 굴리면서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폈고
하고 싶지만 표현해 내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가 눈 속에 들어 있었다.
가끔 억울한 일을 당하여 울 때가 있었는데 그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마음에도 안되보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남례는 여러 형제중의 막내였는데 내가 기억할 무렵의 여남례 가족은
오빠와 언니들은 모두 객지로 돈을 벌러 나가고 아버지,어머니랑 3명이 살았다.
여남례는 신체장애가 심해서 부엌일을 포함한 일반적인 가사일을 하지 못했다.
마당을 쓸고 걸레를 빨아 집안팎을 닦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레 한 두 개를 들고 동네 빨래터를 왔다 갔다 했다.
여남례네 집은 내 어릴 때 기억으로 우리 동네에서 제일 깨끗한 집으로 각인이 되어 있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마루가 반들반들하고 마당에는 티끌하나가 없었다. 아이들이 없어서 어지르는 사람도 없었지만 여남례 엄마가 워낙 깔끔하셨다. 여기에 여남례의 정성이 더해져서 여남례네 집은
찬바람이 돌만큼 깨끗하고 정갈했다.
날마다 아침해는 떠오르고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다른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였지만
그것은 여남례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빨래터 몇 번 다니고 집 한 두 번 닦고 나면 여남례를 기다리는 것은 하염없이 늘어지는 남아도는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어슬렁거리며 아이들을 찾아 동네를 돌아 다녔는데 아이들은 선뜻 여남례와 놀려고 하지 않았다.
몹시 불안정해 보이는 걸음걸이에 심하게 꼬이는 팔과 손,
그리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이 잘 안 되는 표정에 무슨 말인가 의사 표현을 하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내리는 침까지...... 매일 보니까 무서울 것까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썩 친해지고 싶은 모습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여남례와 아이들이 가끔씩 밀월관계를 유지할 때가 있었는데
그 매개체는 여남례 손에 들려 있는 맛있는 먹거리와 여남례 주머니 속의 지폐였다.
용돈이라는 것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나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와 달리
여남례한테는 누가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짬짬이 지폐가 있었고
우리는 그걸로 과자를 사서 우리 것인 양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그러고 나면 선심쓰듯 우리가 노는 데에 여남례를 끼워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체장애가 심한 여남례가 우리랑 같이 놀 수는 없었다. 우리가 놀고 있는 가까이
여남례를 붙여주고 한번씩 쳐다보면 눈을 맞추고 웃어 주는 정도였다.
여남례는 가까이에서 우리가 놀고 있는 것을 쳐다보게 해 주는 것만으로 만족했고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지폐가 없으면 떡이라든가 밀개떡같은 맛있는 것들을 손에 들고 나타났는데
정작 본인은 아껴아껴 먹으면서 우리가 달라고 하면 웃으면서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한동안 아이들의 친절이 여남례한테 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약발은 오래 가지 못했고 약발이 떨어지면 아이들은 다시 여남례를 모른 척 했다.
더러는 여남례 흉내를 내면서 놀리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면 여남례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지금 생각 해 보면 참 어이없고 악질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당시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고 또 같이 놀기에 여남례는 좀 부담스러운 존재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약간은 재미를 느끼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한 일련의 행동들,
어른이 되어서 가끔 내 어린 시절이나 또래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제법 악동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100%공감을 못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특히 나와 여남례는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사이가 각별했는데
여남례네 집이 우리 집 바로 옆집이어서 이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할머니나 엄마에게서 들은
'불쌍한 여남례'라는 말에 알게 모르게 세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다른 아이들보다 자주 아는 척을 해 주었고
또 혹시라도 누가 여남례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되면 빨리 달리지 못하는 여남례를 대신해서
잽싸게 쫒아가 못하게 하거나 혼을 내 주기도 했었다.
가끔씩 속상해서 울고 있는 여남례의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마음이 좋지않아서
누가 그랬냐고 꼬치꼬치 물어 보곤 했다.
말을 못하는 여남례는 손짓으로 저멀리를 가리키며 뭐라고 의사표시를 하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잡히기만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공갈성 엄포를 놓으며 화를 내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여남례가 베푸는 물질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가끔은 나만을 위해서 잘 펴지지 않는 손으로 수줍게 내미는 떡이나 밀개떡을 받아먹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 떡을 찝찝하다는 느낌 없이 맛있게 받아 먹었고 떡 값을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여남례의 변호인 내지는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어린 동심의 변덕은 또 한번 여남례를 슬프게 했으니.....
나를 비롯하여 비교적 여남례한테 관대했던 아이들도 초등학교 3~4학년이 지나면
더 이상 여남례하고 놀려고 하지 않았다.
머리가 조금 더 커지면서 왠지 여남례하고 노는 일이 자존심 상하고 체면이 안서는 것 같아서
여남례를 외면하곤 했다. 그때부터는 여남례의 먹거리도 더 이상 유혹이 되지는 못했다.
여남례는 슬픈 눈으로 우리들을 쫒았지만 외면하는 우리들 때문에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더 어린아이들, 즉 우리들의 동생들 중에서 새로운 친구를 찾아야 했다.
다시 세월이 흘러서 동생들이 자라면 여남례는 또 다른 동생들과 놀아야 하는 ....
그렇게 여남례는 우리동네 아래뜸 아이들의 어린 시절 한 부근에서 친구로 지내다가 퇴장을 당하곤 했다.
세월이 지나 학교를 졸업하고 객지에 나와 지내다가 한 번씩 다니러 가는 고향,
함께 자란 아이들은 소식도 알 수 없고 갈 때마다 고향의 모습도 조금씩 변해 가는데
사장나무처럼 항상 같은 모습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는 내 어린 날의 친구 여남례,
오랜만에 보는 옛친구인 나를 향해 덥석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아는 척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괜히 콧날이 시큰해졌다.
"여남례 오랜만이네" 먼저 인사를 건네면 수줍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그래서 마음을 더 짠하게 했던 내 옛친구는 어린 시절의 그 코흘리개들이 한껏 차려입고
고향을 방문 할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 지......
세월은 나이를 먹게 하고 사람을 철들게 한다고 했던가?. 언제부터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고향을 갈때마다 나는 여남례에게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아주 드물게 세종대왕이 나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율곡 이이 한 장이나 퇴계 이황으로
다섯장 정도를 주곤 했는데 다행인 것은 내가 집을 떠나 올 무렵이면 우리 집 밑이라든가
광장에서 항상 만나지곤 해서 좋은 마음으로 용돈을 줄 수 있었다.
내가 집에 가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또 돌아오는 날자를 여남례에게 이야기 한 적도 없는데 매번 만나지는 것이
신기해서 남편에게 그 부분을 이야기 했더니 남편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그건 우연이 겹친 것이 아니라 여남례의 눈물겨운 노력 때문일거라고......
나는 아마 여남례에게 용돈을 주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어 내가 오면 언제 갈까 항상 긴장을 하며
우리 집 주위를 서성일 거라는...... 그러니까 여남례 불안하게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집에 가자 마자
여남례 만나거든 바로 용돈을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충고와 함께......
나는 설마 했지만 남편의 믿을 수 없는 얘기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 할 수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고향에 가자 마자 내 옛친구의 용돈부터 챙긴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내 동생들과 여남례의 이야기를 하다가 내 동생들도 나처럼
여남례한테 용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어린 시절 궁금했던 여남례의 비밀 한자락을 풀어낸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에도 여남례를 가엾게 여긴 어른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어른들의 마음 씀씀이 덕분에
내 옛친구가 조금은 덜 쓸쓸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너무 멀어서 자주 못가는 고향이지만 나를 기다려 주는 어머니와 사장나무,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는 내 옛친구가 있어서 더 그립고 애틋한 곳,
고향통신에 따르면 이제 40대 후반이 된 여남례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동네 아이들이 사라져 버린 내 고향마을, 같이 어울릴 친구가 없어서 더 외롭고 쓸쓸해져 버린
내 어릴 적 친구의 건강을 걱정하며 이 글을 읽는 이에게 부탁한다.
혹시 석정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설경구, 문소리가 주연을 한 영화
'오아시스'속의 '공주' 같은 이를 만나거든 따뜻하게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고 아는 척을 좀 해 주었으며.....
그게 어렵거든 반갑게 한 번 웃어 주어도 좋겠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다면 퇴계 이황 할아버지라도 좋으니까 잘 펴지지 않은 그 손에
좋은 마음을 담아 건네어 주기를 .....
그로 인해 며칠이 행복해질 내 어릴적 친구를 위해 부끄럽지만 염치없는 부탁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눈물이 흔해져서...)
신체적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것 같아서
괜스리 마음이 숙연해 지는 데
특히, 여남례는...
철부지 시절에 여남례의 다리 저는 것을
흉내냈었는데 그날 따라 울엄마가
"다리 저는 것 흉내내면 다리병신된다." 고 하는
초강력 처방덕분에 6개월 남짓 내 다리에
신경썼던 기억이 떠오르네.-계모가 분명해
그러고 보면
석정 사람들은 동네 이름 때문인지, 교육효과인지(부모님들)
모두가 선한 사람들인 것 같아!
그마음 그렇게 다들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졸음오는 시간에 커피보다 진한 여운으로
다가오는 언니글 덕분에
이제 정신차리고 *** 열심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