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와 박씨가 주류를 이루는 우리 마을,
내 어릴 때의 기억으로 김씨나 박씨들은 한 집 건너 옆에 옆에
일가붙이들이 모여 살았고 이들 씨족들은 집안 행사라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힘을 합하면서 돈독한 우애를 자랑하며 살았다.
가끔 자기들끼리 분란이 생겨 다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서로 도와 가면서 사이좋게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이 김씨 박씨 외에 몇 몇 소수의 다른 성씨들도 있었는데 우리 집도 여기에 해당됐다.
우리 집의 원래 고향은 녹동을 지나면 나오는 도덕면 내에 있는 장전이라는
마을이었는데 할아버지 대에 금산으로 들어오셨다.
상당히 뼈대있는 양반의 후예였는데 선대의 잘못으로 일가가 풍비박산이 나고
그래서 살기가 막막해진 총각시절의 할아버지는 어찌어찌 해서 금산까지 머슴을 살러
오시게 되었단다.
머슴을 살면서 섬사람들에게 잘 보였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똑똑한 금산 처자를 만나서
혼인을 하고 금산하고도 석정이라는 마을에 정착을 하셨단다.
할아버지는 위로 형님 한 분과 아래로 여동생 한 명을 두셨는데 형님은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가시고 여동생은 육지에 있는 방촌이라는 곳의 군수 며느님으로 출가를 하셨다.
고모 할머니는 내가 객지에 나오기 전까지 그 먼데서도 당신의 부모님제사에는 꼭
참석을 하셨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할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작은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함구하셨는데
미루어 가슴아픈 사연이나 말못할 무슨 곡절이 있지 않았나 싶다.
특히 일본으로 돈 벌러 가신 뒤 딱 한 번 돈과 함께 소식이 온 뒤로 연락이 끊긴
형님을 오랫동안 기다리셨는데 할아버지 말년에는 제사를 지내야 할텐데
날짜를 몰라서 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표현을 아끼셔서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분은 아니셨지만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언니나 나는 할아버지 등에서 컸다고 한다.
워낙 부지런하셔서 일하시기 바쁜 할머니보다는 훨씬 아기를 잘 돌보고
또 똥오줌 같은 것도 더럽다 아니하시고 잘 처리 하셔서
아기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고 한다.
40 여 년도 더 전 남자 여자의 역할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하고 시부모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 자식도 아니고 손녀들을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바쁜 며느리를 위해 등에 붙이고 다니셨던 할아버지는 시대를 앞선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나싶다.
불을 때서 밥을 하던 그 때, 며느리 밥하라고 나뭇단을 갖다 주셨는데 나무가 찌꺼기라
불때기가 힘들겠다 싶으면 "불은 내가 때 줄 테니까 너는 반찬이나 만들어라" 하셨단다.
젊은 며느리가 밥하는 넓지 않는 부엌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는 일은
다른 사람들 시선을 생각한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불 때 가면서 바쁘게
반찬 만들어야 하는 며느리를 위해서 보통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무시할 줄도 아셨다.
생선을 손질한다거나 고기를 손질하는 번거로운 일들은 어김없이
할아버지 손을 거쳐서 손질이 되어 요리만 하면 될 수 있게 장만을 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꽤 크도록 그런 일은 원래 남자들이 하는 걸로 알았다.
아주 가끔은 요리도 직접 하셨는데 할아버지께 직접 잡아오셔서 손수 끓여 주신
복어국은 지금도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맛이 좋았다.
내가 자라오면서 할아버지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우리 자부가 최고다" 라는 말이었다.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할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단골 멘트였는데
일찍 혼자 되어 다른 대로 출가하지 않고 손자 손녀들 열심히 키우는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을 할아버지는 직접 대놓고 하지 못하고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그런 마음 씀씀이는 며느리에게도 충분히 전해져서 너무 일찍 사별하는
바람에 남편 복은 없었지만 시아부지 사랑은 원 없이 받았다고 회고하는
며느리를 두게 되셨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 엄마 꿈에 할아버지가 보이는 날은
잘 먹을 일이 생긴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손주들을 사랑하지 않는 조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만은 우리 할아버지는 이 부분에서도 각별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때까지 할아버지에게 맞았다거나 큰 소리로 야단을 맞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손자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항상 Yes였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무슨 부탁을 해도 거절하는 법이 없고 "오냐 알았다" 였다.
그래서 할아버지하고 함께 한 추억들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춥고 긴 겨울 날 방안 화로에서 떡을 구워서 빙 둘러앉아 있는 우리 형제들 입에
한 입 한 입 넣어 주시던 일, 떡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다음 떡 먹을 순서를 얘기하며
할아버지 얘기를 듣던 나날들(제사가 많았던 우리집에는 떡이 있을 때가 많았다)
소먹일 물을 끓이고 난 장작불에 구워 주신 고구마를 얼굴에 온통 검정 칠 해 가며
먹던 일이며 소 먹이러 가셨다가 따오시던 산딸기까지 할아버지가 주신 것들은
맛없는 것이 없었다.
손주들의 컨디션이 안 좋다 싶으면 할아버지만의 비법을 처방하셨는데 그것은
단밥이라는 음식이었다.
엉겅퀴뿌리와 보리쌀을 넣고 푹 달였는데 식혜처럼 단맛이 났다.
다른 사람손을 빌리지 않고 할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단밥을 먹고 나면
소변이 매우 맑아지고 몸이 거뜬해졌다.
단밥이 먹고 싶으면 "할아버지 나 오줌이 노래" 이 말만해도 할아버지는 열 일을 젖혀두고
꼴망태를 메고 엉겅퀴 뿌리를 캐러 나가셨다.
이것은 사시사철 변함이 없었으니 다섯 명이나 되는 손주들 단밥 해 대시느라
논과 밭가의 엉겅퀴 뿌리들이 수난을 당해야 했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엄마 옆에서 밀려난 나와 내 남동생의 잠자리는
할아버지의 옆자리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나는 오른쪽에 남동생은 왼쪽에서 잠을 잤다.
잠버릇이 사납고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린 시절, 나와 내 남동생의 발은
할아버지 얼굴에 가 있기 일쑤였고 거기에 축구 배구 권투까지 다 동원되었을 테니
할아버지의 고달픔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싫은 기색 없이 내침도 없이 내 잠자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할아버지의 오른쪽 옆자리였다.
겨울날 자꾸만 차 버리는 이불을 덮어 준 사람도 잔병치레가 잦아서 자주 아팠던
내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 준 사람도 아프기만 하면 자꾸 토하는 버릇이 있었던
나의 지저분한 토한 오물 뒤처리도
일에 지쳐서 곤하게 자는 며느리 깨울까 봐 며느리 시키지 않고 손수 해 주셨다.
그래서 나 역시 아버지 복은 없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행복한 손녀가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은 지금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만나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난 인사를 하게 하고 할아버지에게 못다했던 친절을 베풀고 싶은 순한 마음이
되게 한다.
내 기억에서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날이다.
1976년 봄 그 때 우리 집은 본 채를 신축공사 하던 중이었다.
집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구입하려고 아침밥을 일찍 드신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시고 외출 준비를 하셨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고 나서 목재 구입할 돈 10만원을
주머니에 챙기시는 할아버지,
마침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고 옆에 서 있던 나는
할아버지에게 돈을 한번만 세어 보자고 졸랐다.
배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데 할아버지는 알았다 하시며 주머니에 넣으셨던
돈 뭉치를 나에게 주셨다.
그 당시 흔하게 통용되던 1000원 짜리 지폐로 100장인 돈 뭉치,
나는 침을 묻혀 가며 열심히 돈을 세었다. 하지만 그 시절 초등학교 6학년 짜리가
얼마나 돈을 세어 보았겠는가?
작은 손으로 100장을 세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돈은 돈대로 옆으로 삐어져 나오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어렵게 다 세고 나니까 99장이었다.
"할아버지 틀리네 한 번만 더 세 보자." 또 한 번 떼를 쓰는 철없는 손녀,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그래 그럼 한 번 만 더 세 봐라."
나는 다시 열심히 침을 묻혀서 돈을 셌다.
사이 시간은 자꾸 흐르고 그래도 할아버지는 재촉하지 않고 서서 끝까지 기다려 주셨다.
기분 좋게 100장으로 돈이 딱 맞아떨어지고
그제야 "할아버지 맞네."하며 돈을 건네주는 손녀,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기분 좋게 웃어주시고 나서 부리나케 배를 타러 출발하셨다.
그것이 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목재를 사 가지고 오시다 일어난 경운기 사고로 인해 저녁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날 아침에 있었던 일은 내가 어른이 된 뒤에도 두고두고
가슴에 사무치는 부분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살다가 문득 떠올리는
그날의 일은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을 하게 한다.
밤에 몇 번이나 세 봐서 10만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면서도 돈을 세어 보고 싶어 하는
손녀의 마을을 읽으시고 그 바쁘고 여유 없은 시간에 돈을 셀 기회를 그것도 2번씩이나 주시고
끝없이 느껴졌을 긴 시간을 재촉 한 마디 없이 기다려 주셨던
할아버지를 생각 하노라며 잠시잠깐을 못 기다리는 내 마음의 여유 없음에,
새삼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큰사랑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그렇게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던 사실이 눈물이 나게 감사하고 그런 소중한 기억들이
내 안에서 재산이 되어 나로 하여금 자긍심을 갖게 한다.
부드럽고 자상했지만 사는데 악착스럽지 못했던 할아버지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고향을 떠나 낯 선 타향에서 정착하기가 어디 그렇게 쉬웠겠는가?
섬 특유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외지인에게 더러더러 가혹할 때가 있다.
씨족이 중심이 되어 있는 마을에서 타성을 쓰는 외지인이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림을 장만하여 살기까지 겪은 고초와 사연들은
아마 책을 엮고도 남았으리라......
다행히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반쪽을 만나서 남부럽지 않은 일가를 이루었지만
평생을 그리워했을 고향과 돌아오지 않는 형님과 너무 일찍 떠나 버려
한이 되어 버린 아들까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한으로 점철된 인생이 될 수도 있었을 자기 앞의 생에
화를 내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순응하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보듬어 안았다.
조건 없이 베푸신 사랑으로 주위를 따뜻하고 푸근하게 하셨던 할아버지는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살아 생전 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몹시 사랑했다.
술을 사오는 사람이 제일 반갑다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말로 나타내지 못했던 고향과 부모님과 가슴에 묻어 버린 형님과 아들......
그리운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외로움......
살아가는 사이사이 만나는 삶의 무게와 고비들로 몹시 힘들고 고단했을 할아버지에게
너무나 절실한 위안거리가 필요했을테고 그래서
아마도 이 두 친구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반의 후예답게 지조 있고 절도 있게 이것들을 즐길 줄 알았다.
담배는 절약 정신이 남달랐던 할머니의 구박의 대상이 되었지만
소주大병을 안 떨어 뜨릴 정도로 즐기셨던 술은 반주 삼아 워낙 기분 좋게 마셨고
술로 실수를 하는 일이 없어서 좋은 주도의 본보기가 되셨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도 금산에서 약 17~18년 정도를 더 계시다가
약 10여년 전에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바다 건너 고향 땅 근처에
영원한 안식처를 구하셨다.
이제는 고향의 품에서 무거운 짐 다 벗어 던지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계실
할아버지를 그리며 생전에 베풀어 주셨던 할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런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살다가 힘이 들 때면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가 있다.
내 좋은 날의 큰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정 깊었던 나의 할아버지......
한없는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던 할아버지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립고 보고 싶다.
내 어릴 때의 기억으로 김씨나 박씨들은 한 집 건너 옆에 옆에
일가붙이들이 모여 살았고 이들 씨족들은 집안 행사라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힘을 합하면서 돈독한 우애를 자랑하며 살았다.
가끔 자기들끼리 분란이 생겨 다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서로 도와 가면서 사이좋게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이 김씨 박씨 외에 몇 몇 소수의 다른 성씨들도 있었는데 우리 집도 여기에 해당됐다.
우리 집의 원래 고향은 녹동을 지나면 나오는 도덕면 내에 있는 장전이라는
마을이었는데 할아버지 대에 금산으로 들어오셨다.
상당히 뼈대있는 양반의 후예였는데 선대의 잘못으로 일가가 풍비박산이 나고
그래서 살기가 막막해진 총각시절의 할아버지는 어찌어찌 해서 금산까지 머슴을 살러
오시게 되었단다.
머슴을 살면서 섬사람들에게 잘 보였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똑똑한 금산 처자를 만나서
혼인을 하고 금산하고도 석정이라는 마을에 정착을 하셨단다.
할아버지는 위로 형님 한 분과 아래로 여동생 한 명을 두셨는데 형님은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가시고 여동생은 육지에 있는 방촌이라는 곳의 군수 며느님으로 출가를 하셨다.
고모 할머니는 내가 객지에 나오기 전까지 그 먼데서도 당신의 부모님제사에는 꼭
참석을 하셨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할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작은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함구하셨는데
미루어 가슴아픈 사연이나 말못할 무슨 곡절이 있지 않았나 싶다.
특히 일본으로 돈 벌러 가신 뒤 딱 한 번 돈과 함께 소식이 온 뒤로 연락이 끊긴
형님을 오랫동안 기다리셨는데 할아버지 말년에는 제사를 지내야 할텐데
날짜를 몰라서 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표현을 아끼셔서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분은 아니셨지만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언니나 나는 할아버지 등에서 컸다고 한다.
워낙 부지런하셔서 일하시기 바쁜 할머니보다는 훨씬 아기를 잘 돌보고
또 똥오줌 같은 것도 더럽다 아니하시고 잘 처리 하셔서
아기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고 한다.
40 여 년도 더 전 남자 여자의 역할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하고 시부모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 자식도 아니고 손녀들을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바쁜 며느리를 위해 등에 붙이고 다니셨던 할아버지는 시대를 앞선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나싶다.
불을 때서 밥을 하던 그 때, 며느리 밥하라고 나뭇단을 갖다 주셨는데 나무가 찌꺼기라
불때기가 힘들겠다 싶으면 "불은 내가 때 줄 테니까 너는 반찬이나 만들어라" 하셨단다.
젊은 며느리가 밥하는 넓지 않는 부엌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는 일은
다른 사람들 시선을 생각한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불 때 가면서 바쁘게
반찬 만들어야 하는 며느리를 위해서 보통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무시할 줄도 아셨다.
생선을 손질한다거나 고기를 손질하는 번거로운 일들은 어김없이
할아버지 손을 거쳐서 손질이 되어 요리만 하면 될 수 있게 장만을 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꽤 크도록 그런 일은 원래 남자들이 하는 걸로 알았다.
아주 가끔은 요리도 직접 하셨는데 할아버지께 직접 잡아오셔서 손수 끓여 주신
복어국은 지금도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맛이 좋았다.
내가 자라오면서 할아버지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우리 자부가 최고다" 라는 말이었다.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할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단골 멘트였는데
일찍 혼자 되어 다른 대로 출가하지 않고 손자 손녀들 열심히 키우는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을 할아버지는 직접 대놓고 하지 못하고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그런 마음 씀씀이는 며느리에게도 충분히 전해져서 너무 일찍 사별하는
바람에 남편 복은 없었지만 시아부지 사랑은 원 없이 받았다고 회고하는
며느리를 두게 되셨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 엄마 꿈에 할아버지가 보이는 날은
잘 먹을 일이 생긴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손주들을 사랑하지 않는 조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만은 우리 할아버지는 이 부분에서도 각별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때까지 할아버지에게 맞았다거나 큰 소리로 야단을 맞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손자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항상 Yes였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무슨 부탁을 해도 거절하는 법이 없고 "오냐 알았다" 였다.
그래서 할아버지하고 함께 한 추억들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춥고 긴 겨울 날 방안 화로에서 떡을 구워서 빙 둘러앉아 있는 우리 형제들 입에
한 입 한 입 넣어 주시던 일, 떡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다음 떡 먹을 순서를 얘기하며
할아버지 얘기를 듣던 나날들(제사가 많았던 우리집에는 떡이 있을 때가 많았다)
소먹일 물을 끓이고 난 장작불에 구워 주신 고구마를 얼굴에 온통 검정 칠 해 가며
먹던 일이며 소 먹이러 가셨다가 따오시던 산딸기까지 할아버지가 주신 것들은
맛없는 것이 없었다.
손주들의 컨디션이 안 좋다 싶으면 할아버지만의 비법을 처방하셨는데 그것은
단밥이라는 음식이었다.
엉겅퀴뿌리와 보리쌀을 넣고 푹 달였는데 식혜처럼 단맛이 났다.
다른 사람손을 빌리지 않고 할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단밥을 먹고 나면
소변이 매우 맑아지고 몸이 거뜬해졌다.
단밥이 먹고 싶으면 "할아버지 나 오줌이 노래" 이 말만해도 할아버지는 열 일을 젖혀두고
꼴망태를 메고 엉겅퀴 뿌리를 캐러 나가셨다.
이것은 사시사철 변함이 없었으니 다섯 명이나 되는 손주들 단밥 해 대시느라
논과 밭가의 엉겅퀴 뿌리들이 수난을 당해야 했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엄마 옆에서 밀려난 나와 내 남동생의 잠자리는
할아버지의 옆자리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나는 오른쪽에 남동생은 왼쪽에서 잠을 잤다.
잠버릇이 사납고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린 시절, 나와 내 남동생의 발은
할아버지 얼굴에 가 있기 일쑤였고 거기에 축구 배구 권투까지 다 동원되었을 테니
할아버지의 고달픔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싫은 기색 없이 내침도 없이 내 잠자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할아버지의 오른쪽 옆자리였다.
겨울날 자꾸만 차 버리는 이불을 덮어 준 사람도 잔병치레가 잦아서 자주 아팠던
내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 준 사람도 아프기만 하면 자꾸 토하는 버릇이 있었던
나의 지저분한 토한 오물 뒤처리도
일에 지쳐서 곤하게 자는 며느리 깨울까 봐 며느리 시키지 않고 손수 해 주셨다.
그래서 나 역시 아버지 복은 없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행복한 손녀가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은 지금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만나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난 인사를 하게 하고 할아버지에게 못다했던 친절을 베풀고 싶은 순한 마음이
되게 한다.
내 기억에서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날이다.
1976년 봄 그 때 우리 집은 본 채를 신축공사 하던 중이었다.
집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구입하려고 아침밥을 일찍 드신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시고 외출 준비를 하셨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고 나서 목재 구입할 돈 10만원을
주머니에 챙기시는 할아버지,
마침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고 옆에 서 있던 나는
할아버지에게 돈을 한번만 세어 보자고 졸랐다.
배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데 할아버지는 알았다 하시며 주머니에 넣으셨던
돈 뭉치를 나에게 주셨다.
그 당시 흔하게 통용되던 1000원 짜리 지폐로 100장인 돈 뭉치,
나는 침을 묻혀 가며 열심히 돈을 세었다. 하지만 그 시절 초등학교 6학년 짜리가
얼마나 돈을 세어 보았겠는가?
작은 손으로 100장을 세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돈은 돈대로 옆으로 삐어져 나오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어렵게 다 세고 나니까 99장이었다.
"할아버지 틀리네 한 번만 더 세 보자." 또 한 번 떼를 쓰는 철없는 손녀,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그래 그럼 한 번 만 더 세 봐라."
나는 다시 열심히 침을 묻혀서 돈을 셌다.
사이 시간은 자꾸 흐르고 그래도 할아버지는 재촉하지 않고 서서 끝까지 기다려 주셨다.
기분 좋게 100장으로 돈이 딱 맞아떨어지고
그제야 "할아버지 맞네."하며 돈을 건네주는 손녀,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기분 좋게 웃어주시고 나서 부리나케 배를 타러 출발하셨다.
그것이 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목재를 사 가지고 오시다 일어난 경운기 사고로 인해 저녁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날 아침에 있었던 일은 내가 어른이 된 뒤에도 두고두고
가슴에 사무치는 부분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살다가 문득 떠올리는
그날의 일은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을 하게 한다.
밤에 몇 번이나 세 봐서 10만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면서도 돈을 세어 보고 싶어 하는
손녀의 마을을 읽으시고 그 바쁘고 여유 없은 시간에 돈을 셀 기회를 그것도 2번씩이나 주시고
끝없이 느껴졌을 긴 시간을 재촉 한 마디 없이 기다려 주셨던
할아버지를 생각 하노라며 잠시잠깐을 못 기다리는 내 마음의 여유 없음에,
새삼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큰사랑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그렇게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던 사실이 눈물이 나게 감사하고 그런 소중한 기억들이
내 안에서 재산이 되어 나로 하여금 자긍심을 갖게 한다.
부드럽고 자상했지만 사는데 악착스럽지 못했던 할아버지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고향을 떠나 낯 선 타향에서 정착하기가 어디 그렇게 쉬웠겠는가?
섬 특유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외지인에게 더러더러 가혹할 때가 있다.
씨족이 중심이 되어 있는 마을에서 타성을 쓰는 외지인이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림을 장만하여 살기까지 겪은 고초와 사연들은
아마 책을 엮고도 남았으리라......
다행히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반쪽을 만나서 남부럽지 않은 일가를 이루었지만
평생을 그리워했을 고향과 돌아오지 않는 형님과 너무 일찍 떠나 버려
한이 되어 버린 아들까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한으로 점철된 인생이 될 수도 있었을 자기 앞의 생에
화를 내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순응하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보듬어 안았다.
조건 없이 베푸신 사랑으로 주위를 따뜻하고 푸근하게 하셨던 할아버지는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살아 생전 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몹시 사랑했다.
술을 사오는 사람이 제일 반갑다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말로 나타내지 못했던 고향과 부모님과 가슴에 묻어 버린 형님과 아들......
그리운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외로움......
살아가는 사이사이 만나는 삶의 무게와 고비들로 몹시 힘들고 고단했을 할아버지에게
너무나 절실한 위안거리가 필요했을테고 그래서
아마도 이 두 친구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반의 후예답게 지조 있고 절도 있게 이것들을 즐길 줄 알았다.
담배는 절약 정신이 남달랐던 할머니의 구박의 대상이 되었지만
소주大병을 안 떨어 뜨릴 정도로 즐기셨던 술은 반주 삼아 워낙 기분 좋게 마셨고
술로 실수를 하는 일이 없어서 좋은 주도의 본보기가 되셨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도 금산에서 약 17~18년 정도를 더 계시다가
약 10여년 전에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바다 건너 고향 땅 근처에
영원한 안식처를 구하셨다.
이제는 고향의 품에서 무거운 짐 다 벗어 던지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계실
할아버지를 그리며 생전에 베풀어 주셨던 할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런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살다가 힘이 들 때면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가 있다.
내 좋은 날의 큰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정 깊었던 나의 할아버지......
한없는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던 할아버지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립고 보고 싶다.
우리 할아버지의 삶이란?
좁은 부엌에서 생솔 가지를 태우는 것처럼
숨막히고, 더디고, 눈물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을 했네
특히나, 집안이 몰락하고, 형과는 생이별을 하고,
생때같은 자식을 앞세웠던, 굴곡많은 삶이
더욱 그러하셨으리라...
하지만, 그 많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손주들의 기억속에 남겨진 할아버지를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다는 생각에
죄송스러움 뿐이네
하루에도 몇 번씩 기후변덕을 보이는
내 자신을 돌아보며(못된 나만 그런가!)
부끄런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오늘은 꺼내 보게 되었네.
울동네에
김씨 그리고 박씨가 있어서(그 밖에 오, 황, 한 등 나름의 소장파)
선남선녀가 특히 많고 인심 좋고 기타등등...
그나마 외지인이셨던 할아버지가
금산에 정착을 하셨고,
우리들의 고향이 될 수 있었을꺼야.
이제 고향과 함께하는 추억만들기에
성씨비율에 따른 숫자가(김앤박)
턱없이 모자라는데...
단지, 그러한 아쉬움만 극복된다면
또 다시 우리들은 거금도 닷컴에
정착하게 될텐데...
-유씨 성-
[08][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