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집안 출신의 타고난 씨름꾼. 어느날 일본잡지서 본 역도산 모습은 내 혼을 빼놓았다. 그를 만나러 무작정 일본행. 불법체류로 1년 수감생활후 마침내 선생을 대면했다.
70년대. 당시 최고의 국민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아이 어른 할것없이 TV 앞에 몰려앉아 우리 선수들을 응원했다. 마을사람들이 뒤엉켜 눈물과 웃음을 나누던 때. 지금도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던 프로레슬링. 20여년이 훌쩍 흐른 뒤에야 다시 프로레슬링을 조금씩 볼 수 있다. 링 위에서 땀을 흘리는 후배들. 비록 병상에 있지만 나도 마음은 항상 링 위에 있다.
내게 사각의 링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역도산. 그와 만나면서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변했다. 그를 알게된 것은 여수. 여수는 당시 고깃배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일본의 잡지도 꽤나 돌아다녔다. 우연히 일본잡지에서 역도산을 보았다. 우람한 체격. 훤칠한 키. 구렛나룻을 기른 미남. 그가 세계의 철인으로 불리던 루 테스를 꺾고 세계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됐다는 얘기가 실려있었다. 일본인들의 기를 죽인 한국인. 나도 그와같이 되고 싶었다.
사실 운동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고향은 전남 고흥군 거금도. 김과 수산물이 풍부해 웬만한 도회지 보다 먹고 살기 좋았다. 비록 작은 섬이었지만 우리 집안은 장사집안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아버지(김정수)는 2m가 넘는 거구.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조막만하다』는 얘기를 들었던 나도 어려서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씨름판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16세때부터.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고 추수를 할 무렵이면 마을마다 장사씨름대회가 열렸다. 마을 대표로 뽑히면 군에 나가 기량을 겨루는데 오후에 시작한 경기는 새벽무렵에야 끝났다. 씨름대회를 휩쓸고 다니며 송아지를 타오면 마을에서는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전남대표로 뽑혀 씨름대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군복무중에도 타고난 씨름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전국을 돌며 힘자랑을 하고 다닐 무렵 본 역도산의 모습은 나의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일본으로 가자. 그의 제자가 돼서 나도 이름을 날려야겠다』
56년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을 탔다. 오사카에서 내려 동경으로 도망갔다. 선원들은 기항지를 벗어나면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레슬링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에 무작정 동경으로 향했다.
큰 몸집에 어수룩한 태도. 동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일경에 잡혔다. 그리고 곧바로 형무소에 수감됐다. 일본과 수교가 이뤄지기 전. 재판도 없이 그저 갇혀있었다. 이러다가 다시 한국으로 ‘쫓겨나겠구나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그때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다. 『역도산 선생님을 만나러 현해탄을 건너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씨름께나 했으니 도와주십시오』 간수를 꼬드겨 겨우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형무소에서 꼬박 1년을 보냈다. 답답한 감방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요시다라는 일본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역도산의 비서였다. 그는 나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역도산이 힘을 쓰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역도산의 후견인은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 두사람이 찾아와 보증을 선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선생은 짧게 한마디만 던졌다.
『현해탄을 건너왔으니 모든 것을 참고 견뎌라』
『이제 나도 레슬러가 되는구나』. 당장 링위에 올라설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선생을 따라가서 내가 한 일은 밥하고 옷 빨고 청소 하는 것.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나서 파김치가 될 때쯤에야 겨우 링에 올라가볼 수 있었다.
선생은 한국인인 내게 유독 엄격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법. 매도 숱하게 맞았다. 역도산의 제자가 되는 길. 그것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목소리를 높힐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정리·최병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