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 경기를 치렀을까. 나는 기억할 수조차 없지만 아직도 팬들의 머리 속에는 나의 경기장면이 생생히 남아있나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내 경기 기록을 속속들이 꿰고있다. 1년에 150∼200여 경기를 치렀으니 평생 3,000여번 이상 링위에 섰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64년 텍사스에서 벌어진 NWA 챔피언 결정전. 도리반쿠 주니어와 60분동안 혈투를 벌였다. 나의 특기는 꺾기와 박치기. 그는 만능 선수라고 불릴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다. 대학시절에는 아마추어 챔피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동생도 챔피언이었던 챔피언 가족. 그를 물리치고 챔피언이 됐을 때 감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열린 경기중에는 보보 브라질과의 혈투였다. 70년대 중반. 미국인으로서 박치기에 능했던 그는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히로시마 체육관에는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거리에는 「원박 박치기 대결」이라는 포스터가 붙었다. 「원박」이란 원자폭탄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한 박치기란 뜻이었다. 그와의 「머리 싸움」에서도 결국 내가 이겼다. 이밖에도 베베기야 라이토, 루 테스, 마크 루니 등과의 결투는 지금도 생생하다.
몸은 링에서 떠났지만 마음은 아직도 링위에 있다. 94년 이왕표를 후계자로 지정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레슬링 경기를 보러다닌다. 80년이후 뜸했던 레슬링은 90년대 중반들어서부터 다시 팬들의 관심을 얻고 있다. 1년에 50∼60여 경기가 열린다. 과거처럼 서울 부산 등의 대도시에서 TV 중계 속에 열리는 빅게임은 아니다. 지방 소도시와 군청의 체육관에서 열린다. 그래도 경기가 있을 때는 2,000∼3,000여명의 팬들이 몰려온다. 경기가 있으면 대부분 내가 인사말을 맡는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김일 선수 안오면 안보러 간다』고 떼를 쓰는 촌로들이 있다. 칠순노인. 이제 힘도 없지만 그들에게는 아직도 내가 무적의 영웅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나의 소원은 하나뿐이다. 죽기 전에 레슬링이 다시 국민스포츠로 발전하는 것. 하지만 아직도 상황은 열악하다. 선수라고 해봐야 고작 50∼60명 정도. 이왕표가 운영하는 신한국 프로레슬링 체육관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레슬러 중에는 「아르바이트 선수」가 대부분이다. 직업은 따로 있고 경기가 있을 때만 나와서 뛰는 선수들. 그런 후배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미국에서는 방송사 사장들이 프로모터로 뛴다. 미국에서 열리는 프로레슬링은 얼마나 인기가 있는가.
우리도 다시 레슬링을 인기스포츠로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예전의 인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링만 보고 있으면 아직도 마음이 뛴다. 혈기왕성한 선수들의 기와 힘의 싸움. 링위에는 눈물과 땀과 영광이 있다. 그 속에 내인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