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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생·사위 합세 ‘레슬링 명가’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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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_08.jpg20년 터울의 배구선수출신 막내동생 김광식. 연습벌레였던 그는 멕시코·미국서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120㎏의 거구 남해산. 언제나 듬직하고 성실했던 모습. 딸에게 ‘그와 결혼하라’고 권했다.

사실 우리 집안은 「레슬링 가문」으로 손색없다. 막내동생 광식이가 레슬러로 이름을 떨쳤고 사위인 남해산도 꽤 이름이 있었다. 광식이는 원래 경동고에서 배구선수를 했다. 나와는 20년이상 차이가 나서 항상 어린애처럼만 느껴졌다. 레슬링을 시작한 것은 고교를 막 졸업하면서부터. 75년 체육관을 세웠을 당시 내게 레슬링을 하고 싶다고 했다.

1m80이 못되는 키에 80∼90㎏.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는 적어도 1m90 안팎. 그래야 파워가 있고 힘도 겨뤄볼만하다. 녀석이 레슬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고교졸업후 잠깐 레슬링을 했던 터라 기본기도 있었고 승부의 세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실 도장에서 연습도 많이 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실력이 있었다. 75년 데뷔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기량을 인정받았다. 내가 일본에 머물때는 혼자 멕시코와 미국까지 건너가 챔피언이 됐다. 하지만 그는 심장이 나빠 6년전에 먼저 갔다.

남해산은 64년 한국에 온 뒤 레슬링을 하다 만난 사람이다. 1‘89에 120㎏의 거구. 몸은 컸지만 마음은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실했다. 항상 묵묵히 연습했다. 그도 챔피언을 한번 지냈다. 그의 듬직한 모습을 보고 있었던 나는 그에게 딸을 줬다. 딸 애자는 처음엔 싫은 눈치였지만 「결혼해라」는 한마디에 주저없이 남해산을 따랐다. 하지만 남해산은 레슬링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내가 링을 떠난 80년 이후 그도 운동을 포기했다. 남해로 내려가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서 음식점을 차렸다.

레슬러로 활동하면서 내가 직접 후배들을 가르칠 시간은 없었다. 코치를 두고 경기를 보면서 장·단점만 지적해주는 수준이었다.

후배 양성과 함께 국내 레슬링을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 해외에서 경기를 벌이고 국제적인 대회를 유치하면 그것도 작은 나라 코리아를 알리는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공산권과의 레슬링대회.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에 이미 중국에서 세계 레슬링대회를 열 계획을 세웠다. 나는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하시모토 류타로의 아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사람은 또 덩샤오핑(鄧小平)의 장애인 아들 덩푸팡과 교분이 깊었다.

중국에서 레슬링 대회를 열고 수익금을 장애인에게 기탁하면 중국 한국 일본에 모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명분도 좋았다. 하지만 결국 중도에서 포기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경기장 사정이 좋지 않았다. 링까지 모두 싣고 가야했다. 경비가 만만치 않았다. 한때 자동차 시합도 주선했다.

80년대 초반 일본에서 열리는 시주쿠노 나리라는 자동차 경주대회가 유명했다. 나는 한국의 기아자동차와 쌍용자동차에 한국차도 나가라고 주선했지만 당시만해도 우리 차는 해외 경주대회에서 기량을 겨룰 수준이 아니었다.<최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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