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12. 팬사랑 넘친 레슬링 인생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na_12.jpg귀국 후 잊혀졌던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언론에서도 나를 도와야 한다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별다른 스포츠가 없었던 60~70년대. 거구의 외국선수를 매트에 내려꽂는 한국선수들을 보곤 모두 자신들이 이긴 것인 양 기뻐했던 국민들. 경기가 있는 날이면 TV가 있는 집에 모여 초조해했다. 상대방이 일본선수라도 되면 더 흥분했다. 하기야 TV를 보다 흥분해 쓰러져 죽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으니까.

팬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경기를 마치고 해외에서 귀국할 때면 환영인파가 줄을 이었다. 김포공항에 내리면 마치 외국의 원수를 대하듯 경찰들이 호위를 했다. 60년대 후반 고향 거금도에 돌아갔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선착장에서부터 고향집까지 10리길에 늘어서서 손을 흔들어댔다. 금의환향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나를 위해 공덕비를 세우겠다고 나섰다. 박정희대통령에게 부탁해 전기를 들어오게 하고 레슬링을 통해 이름을 떨쳤다는 게 이유였다. 더 늦기전에 기념관도 지어야 된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이 한푼 두푼 돈을 모았고 93년 그렇게 공덕비가 세워졌다. 공덕비 옆에는 내 동상 대신 진돗개 상을 세웠다. 진돗개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일제때 우리집에는 진돗개가 1마리 있었다. 일본군들이 가죽이 필요하다며 개를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우리집에도 일본군들이 들이닥쳤다. 겁에 질린 내가 진돗개를 넘겨주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끌려가는 개의 모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이 얘기를 삼중스님에게 했고 그가 앞장서 진돗개의 동상을 세우자고 했다.

기념관도 세워졌다. 대지 300평에 건평 40평. 단층 양옥주택이다. 기념관에는 트로피와 우승컵, 챔피언벨트, 사진 등을 전시했다. 아직 일본에서 가져오지 못한 기념패도 많지만 그래도 내 인생을 바쳐 얻은 물건들이었다. 기념관에 있던 트로피나 기념사진 중에는 없어진 것이 많다. 마을 사람들이 기념품으로 가져간 것도 있다. 점?버젓이 내걸어놓고 『이게 김일선수의 기념품』이라고 자랑하는 주민들. 돌려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신기해 보였나보다.

훈장도 받았다. 94년 4월26일. 국민훈장 석류장.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 때였다. 당시 스포츠 선수로는 처음이라고 했다. 은퇴한 노선수에게 내려진 훈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후원회도 조직되었다. 뽀빠이 이상룡이 사회를 맡아 롯데월드에서 후원회의 밤을 열었다.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그때 모인 사람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경기 내용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자이언트 바바를 물리쳤다는 얘기부터, 보보와의 싸움, 이노키와의 대결, 가면 레슬러의 얼굴을 보여줄 때의 희열…. 레슬러 김일의 경기는 그들에게도 큰 추억이었다.<최병준 기자>

 

  • ?
    적대봉 2003.06.05 10:04
    그때를 기억합니다... 대단한 환영이였고,대단한 감동이였죠..정확히 1971년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4학년때 우리형이 6학년... 학생회장때 김일선수에게 드리는 환영사올리는 사진이 지금도 집에있거든요....우리나라대통령이 금산을 방문했대도 그렇게 감동적인 환영은 아니었으리라....! 금진에서 대흥까지 도로변으로 양옆에 도열해서 환영했을정도였으니까요...아미 금산면민이 다나와서 환영하지 않았나싶어요... 난 그때를 기억합니다...
?

  1. 1. 역도산 제자 되려 현해탄 건너다

    장사집안 출신의 타고난 씨름꾼. 어느날 일본잡지서 본 역도산 모습은 내 혼을 빼놓았다. 그를 만나러 무작정 일본행. 불법체류로 1년 수감생활후 마침내 선생을 대면했다. 70년대. 당시 최고의 국민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아이 어른 할것없이 TV 앞에 몰...
    Views12970
    Read More
  2. 2. 내 비장의 무기 ‘박치기’1

    역도산은 내 주무기로 머리를 단련시켰다. 재떨이·골프채 등에 맞아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64년 내가 미국서 챔피언 되던날, 선생은 일본서 운명을 달리했다.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함경도출신인 그는 몸집이...
    Views11562
    Read More
  3. 3. 내 열렬한 팬 ‘박 대통령’

    유난히 레슬링을 좋아했던 그분. 경기 끝내고 청와대에 가면 육여사가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데 반칙은 교육상 안좋아. 김선수는 모범이 돼야 해” 역도산에 이어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됐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모두 자기 일이나 되는...
    Views10124
    Read More
  4. 4. 영원한 맞수,이노키와 바바

    레슬링을 시작한 30세.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가 후배로 들어왔다. 8년5개월간 큰형님 대접받으며 동고동락. 하지만 역도산선생의 죽음으로 일본레슬링계가 분열됐다. 주저없이 선생이 이끌던 ‘일본프로레슬링’을 택했다. 영원한 라이벌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
    Views10040
    Read More
  5. 5. 레슬러의 산실 ‘문화체육관’

    국내 프로레슬링 붐을 위해 천규덕·김덕 등과 가진 경기. 일본서도 호평을 얻었다. 박대통령의 도움으로 정동에 지은 문화체육관 배출 1기생. 이왕표·양승희·김광식…. 국내 레슬링계를 이끌어간 주역들이다. 나의 무대는 일본이었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경기를...
    Views10372
    Read More
  6. 6. 언제나 미안한 그 이름 ‘가족’

    17세때 아버지 권유로 든 장가. 3살 연상의 아내. 빵점 가장이었지만 아내는 군말 한마디 없었다. 일본서 보낸 돈을 떼먹은 사람들이 아내에게 오히려 큰소리 쳤다. 77년 군에서 의문사 당한 막내. 아내는 8년전 세상을 떴다. 링 위에서는 세계를 제패했지만 ...
    Views8248
    Read More
  7. 7. 죽을 고비 넘겨 얻은 신조

    여러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여순사건 주동이 된 부대의 죽마고우들에 대접한 식사. 배후 조종자로 몰려 맞아 죽을뻔 했다. 6·25가 터져 또다시 곤욕을 치렀다. 그후 원한을 사지않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신조로 세상을 살았다. 아들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
    Views7673
    Read More
  8. 8, 동생·사위 합세 ‘레슬링 명가’

    20년 터울의 배구선수출신 막내동생 김광식. 연습벌레였던 그는 멕시코·미국서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120㎏의 거구 남해산. 언제나 듬직하고 성실했던 모습. 딸에게 ‘그와 결혼하라’고 권했다. 사실 우리 집안은 「레슬링 가문」으로 손색없다. 막내동생 광...
    Views10320
    Read More
  9. 9. 운 안따라준 수산물 사업

    레슬링 쇠퇴하던 70년대말 사업시작. 속초에 ‘김일수산’차려 일본수출에 전념했다. 한때 잘나가던 사업. 명태어획 급감에 현금회수도 안돼 결국 문을 닫았다. 70년대말 사업에 손을 댔다. 「장영철 파동」이후 레슬링이 침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쇠...
    Views8262
    Read More
  10. 10. 영광은 가고 상처만 남아

    레슬링을 하면서 몸은 서서히 만신창이가 됐다. 링을 떠나 속초에 있던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뇌졸중이었다. 추위가 심했던 어느날. 당시 어느 신문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타향에 묻혀 수산업을 하고 있는 나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바닷가에 나가 사...
    Views8108
    Read More
  11. 11. 일본서 열린 눈물의 은퇴식

    링위를 호령하던 박치기왕.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올 때는 병들고 늙은 몸이었다. 을지병원에 머물며 치료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링위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링을 떠난 것은 80년 5월. 제주도 경기...
    Views8751
    Read More
  12. 12. 팬사랑 넘친 레슬링 인생1

    귀국 후 잊혀졌던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언론에서도 나를 도와야 한다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별다른 스포츠가 없었던 60~70년대. 거구의 외국선수를 매트에 내려꽂는 한국선수들을 보곤 모두 자신들이 이긴 것인 양 기뻐했던 국민...
    Views8378
    Read More
  13. 13. 레슬링을 국민스포츠로

    얼마나 많은 경기를 치렀을까. 나는 기억할 수조차 없지만 아직도 팬들의 머리 속에는 나의 경기장면이 생생히 남아있나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내 경기 기록을 속속들이 꿰고있다. 1년에 150∼200여 경기를 치렀으니 평생 3...
    Views842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