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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레슬러의 산실 ‘문화체육관’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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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_05.jpg국내 프로레슬링 붐을 위해 천규덕·김덕 등과 가진 경기. 일본서도 호평을 얻었다. 박대통령의 도움으로 정동에 지은 문화체육관 배출 1기생. 이왕표·양승희·김광식…. 국내 레슬링계를 이끌어간 주역들이다.

나의 무대는 일본이었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경기를 가졌지만 일본만큼 경기횟수는 많지 않다. 일본에서는 연간 160차례 이상 시합을 했다. 이틀에 한번 꼴. 15∼20일 동안 매일 경기를 한 후 보름정도 쉬는 형식.

한국에서 레슬링은 수지를 맞추기 힘들었다. 각 지방마다 경기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서울 장충체육관이 유일하게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곳이었다. 비록 일본에서 레슬링을 시작했지만 한국을 떠날 수는 없었다. 틈나는 대로 한국에서도 레슬링경기를 갖기 위해 애를 썼다. 그때 천규덕 박성남 박승모 남해산 오대균 김덕 등과 호흡을 맞췄다. 특히 천규덕과 김덕을 일본에 소개해 경기를 갖게 했다.

사실 한국무대에서는 돈을 벌지는 못한다. 일본에서 돈을 벌어들여 한국에 쓰는 형편이었다. 입장료수입도 10배이상 차이가 났다. 그래도 레슬링 붐만 일어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일본에 레슬링을 심은 사람도 한국인 역도산이었고, 그 뒤를 내가 잇고 있었으니까. 천규덕은 당수의 명인으로 일본에서도 좋은 호평을 받았다. 검은 타이츠를 입고 무대에 섰던 그는 노래도 잘했다. 김덕은 재일동포. 아버지는 한국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내가 한창 명성을 얻고 있을 때 레슬러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박승모는 후에 목사가 됐고 남해산은 나의 사위가 되었다.
국내에 레슬링스타들이 나타나고 해외에서 명성을 얻어가자 박대통령은 내게 체육관을 지으라고 하사금을 내렸다. 72년 정동 문화체육관 건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체육관이 건설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날 듯이 기뻤다. 미국에 건너가 직접 설계사를 불러오고 일본의 체육관을 둘러보기도 했다.

벽돌 한장에도 정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랏돈만으로 체육관을 지을 수 있는가』. 나는 내 돈도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돈으로 1천만원을 집어넣었다. 운동기구도 샀다.

75년 체육관을 개관했다. 김일체육관. 개관 당시 고사를 2번이나 지냈다. 돼지머리를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풍수가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용의 머리 형상이니 돼지 대신 해물을 놓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속초까지 달려가 잘 말린 명태를 사다가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개관기념으로 데스토라야를 불러 1시간 넘게 혈투를 벌였다. 후배들도 뽑았다. 이왕표와 양승희 김광식 임대수…. 체육관 1기생이다.

훈련은 모질게 시켰다. 처음에는 레슬러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끝까지 남아 있던 이왕표는 내 후계자가 됐다. 막내동생이었던 김광식은 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잘될 듯하던 체육관은 오래가지 못했다. 「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 발언 파동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그래도 경기는 꾸준히 열렸지만 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체육관을 내놓게 됐다. 재단법인으로 돼있던 체육관이 내 소유가 아니란 것을 그때야 알았다. <정리 최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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