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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광은 가고 상처만 남아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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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_10.jpg레슬링을 하면서 몸은 서서히 만신창이가 됐다. 링을 떠나 속초에 있던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뇌졸중이었다. 추위가 심했던 어느날. 당시 어느 신문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타향에 묻혀 수산업을 하고 있는 나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바닷가에 나가 사진을 찍고 서울로 올라왔다. 타워호텔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졸도하고 말았다.

깨어나긴 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휠체어였다. 국립의료원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아내는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사실 내몸은 그전부터 만신창이가 됐다. 링위는 승자만이 존재하는 법. 부상도 숱하게 당했다. 데뷔 초 벗겨진 로프 와이어에 눈을 박았다. 그때 오른쪽 눈알이 튀어나왔고 엉겁결에 다시 눈에 집어넣었다. 그후로 안경을 안쓰면 안될 정도로 시력이 떨어졌다. 거꾸로 링위에 박혔을 때 등대신 머리가 꽂혀 목뼈가 나간 적도 있다. 무릎이 깨지기도 했다.

레슬링은 선수간의 호흡이 중요하다. 상대의 공격을 잘 피하는 것도 요령. 공격을 피할 수 없으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몸을 날려 낙법을 써야한다. 프로 레슬러의 과장된 것 같은 액션도 모두 자신을 지키기위한 방어술이다. 그만큼 연습도 많이 해야한다.

연습이나 경기도중 아무리 크게 다쳐도 역도산 선생이 살아있을 때는 병원에 가지못했다. 병원에 다녀오면 선생은 아예 물고를 냈다. 아프다고 엄살을 떨면 강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더운물로 찜질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모두 속병이 됐다.

사업실패로 빈털터리가 된 후 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의 팬이었던 이키다시가 나를 초청해준 것이다. 내 경기가 있을 때마다 경기장을 찾았고 서울에 올 때마다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이키다시는 그 전부터 나와 안면이 있었다. 수산업을 할때 나와 거래를 했던 사업가. 「규슈가이산」의 사장으로 꽤나 재력이 있었다.

그는 나를 위해 모든 돈을 댔다. 도쿄의 적십자병원, 오사카 시립병원, 규슈의 나카무라 병원…. 실력 있다는 데는 모두 돌아다녔다. 그렇게 일본에서 3년을 보냈을 때 박삼중스님이 찾아왔다. 스님은 일본을 오가며 김희로 석방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김희로는 한국인 차별을 반대하며 경찰과 대치해 인질극을 벌인 재일동포. 지금도 감옥에 있다.

박삼중스님은 일본에서 내가 병원에 누워있다는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 「한국의 박치기 왕이 일본에서 병상에 누워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국내에 알렸다. 그때 고국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나를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 을지병원에서는 무료로 치료해주겠다고 나서고 각계에서 온정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박삼중스님에게 교화당한 사형수는 평생동안 모았다는 1백만원을 치료비에 보태라고 내놨다. 그의 돈은 나를 뭉클하게 했다. 하지만 그의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의 부모를 찾아가 그에게 받은 돈 1백만원에 50만원을 더 보태줬다.
93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정리=최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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