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여순사건 주동이 된 부대의 죽마고우들에 대접한 식사. 배후 조종자로 몰려 맞아 죽을뻔 했다. 6·25가 터져 또다시 곤욕을 치렀다. 그후 원한을 사지않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신조로 세상을 살았다.
아들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내게도 여러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한번은 여순사건때, 또 한번은 6·25때였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군대에 자원하자고 했다. 당시만해도 국군은 경비대 수준. 이제 우리도 나라를 되찾았으니 젊은 사람들이 군에 머물며 나라를 지켜야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를 말렸다. 장가까지 간 놈이 마누라 버려두고 군에 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얘기. 결국 나만 빼고 8명의 친구들이 자원했다. 하필 그곳이 14연대. 여순사건의 주동이 된 부대였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아 글도 모르는 친구들. 그들이 좌익과 우익을 알 리 없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다.
하지만 여순사건의 반향은 컸다.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고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여순사건 때 우리마을은 별다른 골육상쟁은 없었다. 14연대에 있던 친구들도 마을에 들렀다가 다시 빠져나갔을 뿐이다. 친구들에게 밥을 좀 해준 것이 전부인데 그것이 부역자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이 끝나고 나는 주동자로 몰렸다. 마을 사람들을 꼬드겨 14연대로 보낸 배후조종자라는 말도 안되는 누명이었다. 사실 친구들중에서는 살아서 오지 못한 녀석도 있었다. 그렇게 끌려가 광주까지 넘어갔다. 숱하게 맞았다. 「맞아죽는다」라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느끼겠다 싶었으니까.
광주의 군사법원에 섰을 때 검사가 내게 물었다.
『너 왜 남로당에 가입했나』 『남로당이 뭡니까. 저는 모릅니다』 『임마 네가 여기 서명까지 했잖아』 『저는 남로당이 뭔지 모르는데요』
그때 검사의 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아무 생각없이 일어나 모자를 집어 먼지를 턴 뒤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나를 빼꼼히 쳐다보던 검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나의 운명이 갈렸던 것 같다. 검사는 나를 아주 순박한 청년으로 봤는지 내 서류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 그때 나는 이 사람이 살려주는구나 하고 느꼈다. 직감이었다.
나는 풀려났다. 그때 아내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여순사건때 죽은 시신이 있다는 곳을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6·25가 터지고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몰려왔다. 여순때 피해를 본 사람들이 이제는 손에 칼을 잡았다. 그때 나는 사람들을 말렸다. 우리가 왜 서로 싸워야 되느냐고. 『제발 피를 흘리지 말자』. 다행이 우리마을은 화없이 지나갔다. 6·25가 끝나고 다시 나는 요주의 인물로 꼽혔다. 여순사건 때 연루됐던 것을 알고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다시 끌려갔지만 혐의 없이 풀려났다.
그때부터 나의 신조는 아무에게도 원한을 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덕을 베풀어야 화가 오지 않는 법. 평생을 그렇게 보냈다. 나를 속이고 돈을 가로챘던 사람들까지도,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까지도 미워해서는 안된다. 언제 음양이 바뀔줄 모르는 것이 인생 아닌가.<최병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