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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운 안따라준 수산물 사업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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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_09.jpg레슬링 쇠퇴하던 70년대말 사업시작. 속초에 ‘김일수산’차려 일본수출에 전념했다. 한때 잘나가던 사업. 명태어획 급감에 현금회수도 안돼 결국 문을 닫았다.

70년대말 사업에 손을 댔다. 「장영철 파동」이후 레슬링이 침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다른 직종은 아는 것도 없고 돈모으는데는 「젬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업을 하게 되면 반드시 수출을 해서 외화를 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아마도 수출에 관심이 많던 박정희 대통령의 영향이 컸나보다. 그때 가장 많이 안다고 생각한 것이 수산업이었다.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김을 말려 일본에 팔아 돈을 벌었던 주위 사람들 생각도 났다.

속초에 김일수산을 차렸다. 명란젓과 미역 등 한국 수산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일본인들. 그들에게 질좋은 우리 수산물을 수출하면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특히 「다라코」라고 불리는 명란젓은 일본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았다. 처음에는 돈도 좀 벌었다. 한때는 배를 8척이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잘 나갔다. 연간 어획고 900t. 하지만 얼마 안가 쇠락의 기미가 보였다. 80년대 중반 명태가 갑자기 잡히지 않았다.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부들에게는 미리 현금을 줬다. 물건을 받으러 찾아가면 어민들은 울상을 하고 앉아있었다. 무작정 돈을 내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박치기 왕이 왔다고 좋아하는 아이들 앞에서 돈을 달라고 했다가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것인가. 아마도 『김일아저씨가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고 떠들어댈 것이다. 아이들만 보면 마음이 약해져 그냥 나오곤했다. 은행빚은 늘고 결국 문을 닫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게 빚진 사람들가운데는 크게 성공 한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한다. 배를 사고 돈을 모았다는 것이다. 아마 속았을 것이라고 주위에서는 떠들었지만 모두 잊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돈을 벌 기회는 있었다. 60년대 일본에서 돈을 벌어왔을 때 부동산업자들이 찾아왔다. 당시만해도 성수대교가 없었고 강남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부동산업자들은 내게 지적도를 보여주며 앞으로 땅값이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지프를 타고 강남땅을 돌아보며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강남 땅 1평이 125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땅을 사기로 한 그해 극심한 한해가 들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대통령까지 논밭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남들이 모두 죽어가는 데 나만 잘살자고 땅이나 사놓을 수 없다』

그때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땅 5만평 살 돈을 모두 국가에 내놨다. 양수기를 사서 시골땅의 가뭄이라도 조금 해소하라고. 홍종철 공보장관 때다.

그전에 영화에도 출연했다. 영화사들이 쫓아다니며 박치기를 소재로한 영화를 찍자고 했다. 그때 출연한 영화가 「김일 혈투기」 「복수혈전」 등. 그러나 영화판은 생리에 맞지 않았다. 링위가 내 뜻을 펼 수 있는 곳이지 카메라 앞은 아니었다. 분장을 지우기 위해 석유로 얼굴을 씻어야 하는 등 불편한 것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역시 내 무대는 링이었다.<최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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