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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언제나 미안한 그 이름 ‘가족’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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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_06.jpg17세때 아버지 권유로 든 장가. 3살 연상의 아내. 빵점 가장이었지만 아내는 군말 한마디 없었다. 일본서 보낸 돈을 떼먹은 사람들이 아내에게 오히려 큰소리 쳤다. 77년 군에서 의문사 당한 막내. 아내는 8년전 세상을 떴다.
링 위에서는 세계를 제패했지만 집안에서는 무심하기만 한 남편이었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항상 미안할 따름이다.

아내를 만난 것은 17살 때. 아버지는 아직 다 성장하지도 않은 나를 보고 결혼할 때가 됐다고 했다. 그때는 20살 안팎이면 장가를 가곤했지만 나는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 장가가지 않겠다며 떼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내는 나보다 3살이나 많았다. 연상의 아내 박금례. 그렇게 결혼생활은 시작됐다. 하지만 나는 집에 붙어있는 날이 없었다. 국내 씨름판과 일본 레슬링무대에서 인생을 다 보냈으니까. 일본에서 레슬러로 성공했지만 아내에게 생활비를 직접 건네준 적도 없었다. 당시 서울집은 신당동. 방 3개짜리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하지만 집에는 언제나 손님들이 들락거렸다.

『일본에서 돈 좀 벌고 명성도 얻었다는 데…』. 마을 사람들을 잘 대접하는 것도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동네잔치가 열릴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 고향사람들은 한 번 서울구경을 오면 2∼3일씩 묵어가기도 했다.

가족이라고는 아내와 2남2녀. 하지만 한달에 쌀 3가마가 들어갔다. 쌀집에서는 『식당을 하느냐』고 물어 볼 정도였으니까.

사실 나는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이노키 바바와 함께 최고대우를 받았으니까.

워낙 돌아다니다보니 아내는 내 얼굴을 볼 날이 없었다. 그래도 아내는 군말 하나 없었다. 생활비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 인편으로 보냈다. 특별히 날을 정해서 보낸 것도 아니고 생각나는대로 집으로 돈을 부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유용했다. 오히려 돈을 주며 아내와 식구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아내는 그것도 고마워했다고 한다. 막내 아들이 죽었을 때도 나는 한국에 없었다.

77년쯤이다. 일본에서 막내 기환이가 실종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막내는 육사에 가고싶어했다. 하지만 6·25때 인민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로 부역자라고 낙인찍혔던 터라 진학이 힘들었다. 동국대를 다니다 군에 간 아들. 막내는 가장 내가 아끼던 아들이었다. 속도 깊었고 누구보다도 착실했다. 아들은 10여일이 지나서 발견됐다. 야산에서 시체로. 일본에서 소식을 들은 나는 한국으로 달려왔다. 휴가증도 없고, 외출증도 없이 영내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시체로 발견되다니.

당국에 부검을 해보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체가 부패했다는 이유. 아들이 나때문에 죽었구나 하는 자괴감. 자식이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을 천붕(天崩)보다 더한 슬픔이라고 했던가.
한동안 그애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도 나때문에 고생만하다 갔다. 8년전에는 서로 병상에서 누워있는 신세가 됐다. 나는 뇌졸중으로, 아내는 백혈병으로. 고생만 하던 아내는 8년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정리·최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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