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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원한 맞수,이노키와 바바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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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_04.jpg레슬링을 시작한 30세.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가 후배로 들어왔다. 8년5개월간 큰형님 대접받으며 동고동락. 하지만 역도산선생의 죽음으로 일본레슬링계가 분열됐다. 주저없이 선생이 이끌던 ‘일본프로레슬링’을 택했다.
영원한 라이벌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

역도산의 제자이자 선후배 사이였던 그들과 나는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레슬링을 시작한 것이 나이 서른살때. 그 뒤로 1년 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가 후배로 들어왔다. 이노키는 브라질에서 왔고 자이언트 바바는 원래 야구선수였다가 레슬러로 전향했다. 두사람 모두 나이가 나보다 10년 이상 어려서 큰형님 대접을 받았다. 이들과 나는 꼬박 8년5개월 동안 한 방을 썼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는 한국식으로 가르쳤다. 우에노의 식당가를 돌며 불고기와 김치부터 먹게 했다. 지금은 일본인들이 「기무치」를 건강음식으로 생각하지만 그때는 마늘냄새가 난다며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이노키는 데뷔전도 치르게 직접 도와줬다. 그는 처음에 나를 잘 따랐다. 머리는 영리하지만 약삭빠른 편이었다. 바바는 우직했다. 이노키는 잔기술이 많았고 바바는 2m10㎝ 가까이 되는 키에서 몸을 날려 치는 16문킥으로 이름을 얻었다. 때론 라이벌로, 때로는 의형제처럼 지냈지만 역도산 선생이 죽으면서 이상기류가 생겼다.

미국에 있을 때 선생이 돌아가시자 일본의 레슬링단체들이 두패로 갈라졌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는 꼼짝 못하던 일본인들이 그의 죽음 이후 선생이 만든 「일본 프로레슬링」이란 단체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리고 「도쿄 프로레슬링」이란 단체가 생겨났다. 도요노모리라는 일본인이 도쿄 프로레슬링을 만들어 이노키를 끌어들였다. 사실 바바나 이노키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출내기였다. 영향력도 없었다. 내가 선생의 뒤를 이을 챔피언이 됐지만 나는 일본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두 단체가 세력다툼을 한 지 1년 정도 흐르자 내게 서로 손짓을 해왔다. 사실 일본 레슬링계에도 인재가 별로 없었다. 스타가 있어야 관객이 몰리는 법. 일본 레슬링계에서는 역도산의 수제자로 챔피언 벨트를 가지고 있는 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주저없이 「일본 프로레슬링」을 택했다. 선생이 만드신 단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두 단체의 흥행대결에선 일본 프로레슬링이 이겼다. 선수도 많았지만 역도산 선생의 이름값이 컸다. 이노키도 결국은 다시 일본 프로레슬링으로 돌아왔다. 그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노키와 바바는 나와 실력도 엇비슷했다. 데뷔 초기에는 내가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지만 그들의 기량도 갈수록 늘었다. 챔피언 벨트를 걸고 실력대결을 벌인 것은 각각 3번 정도. 내 전적은 바바와 이노키 모두에게 1승1무1패였다.

서로 속내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섣불리 싸우지 않았던 점도 있었다. 장단점을 알고 있기에 경계를 하기도 했다. 일본 순회공연중 이노키를 이긴 것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박치기 한 방에 그를 링위에 누이자 장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야유도 환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져줄 수도 없는 노릇. 링위에서는 승자만이 존재하니까.(계속) <정리·최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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