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3. 내 열렬한 팬 ‘박 대통령’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na_03.jpg유난히 레슬링을 좋아했던 그분. 경기 끝내고 청와대에 가면 육여사가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데 반칙은 교육상 안좋아. 김선수는 모범이 돼야 해”

역도산에 이어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됐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모두 자기 일이나 되는 것처럼 흥분했다. 그때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국민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미국에서도 열기가 뜨거웠다. 지금은 수십만이 사는 LA지만 당시만 해도 한인은 3,000여명에 불과했다. 한인식당도 1곳뿐. 경기가 있는 날이면 목사님들까지 나와 응원을 하곤 했다. 장면파, 이승만파가 따로 없었다.

67년 4월29일. 나는 태그챔피언에 이어 다시 세계타이틀에 도전했다. 세계레슬링연맹(WWA)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장충체육관에서 마크 루니와 격돌했다. 아침부터 체육관 앞은 인산인해였다. 객석은 물론 복도까지 사람들로 꽉 찼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밖에서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마크 루니는 미국에서도 이름난 선수. 그러나 그의 화려한 기술도 박치기 앞에선 무력했다.

챔피언이 된 날. 신문사에서는 호외를 뿌렸다. 링 위에서 챔피언 벨트를 매던 날 내 손을 높이 치켜들어줬던 사람은 김종필씨였다. 나의 초대 후원회장이다.

그와 함께 나의 가장 열렬한 팬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대통령은 유난히 레슬링을 좋아했다.
『어린애들이 레슬링을 좋아하는데 너무 반칙이 많아. 어린애들에게 반칙을 보여주는 것은 교육상 안좋아. 김선수는 경기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모범이 돼야 해』

박대통령의 말을 듣고난 다음 나는 경기중에 반칙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우직하게 싸울 뿐이었다.

박대통령은 나를 곧잘 청와대로 불렀다. 경기를 끝내고 청와대에 가면 육여사가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안사람이 자네 주려고 특별히 만든 모양이야』. 레슬링 밖에 모르는 나는 박대통령이 내게 신경을 써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박대통령이 나를 아꼈던 것은 한국인도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눕힐 수 없을 것 같은 거구의 서양인들도 박치기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하면 된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어느날 내게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고향에 전기나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최고의 수출품은 수산품이었다. 호롱불에 김발을 짜는 것이 얼마나 고된 줄 사람들은 몰랐다. 전기가 들어오면 수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당장 비서를 불러 알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후 고향 거금도에 전기공사가 시작됐고 호롱불 대신 백열등을 켤 수 있게 됐다.

대통령부터 시골의 코흘리개까지 응원하는 것을 보며 나도 한국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된 가운도 그때 디자인했다. 갓과 담뱃대, 호랑이를 새겨넣었다. 일본인들 앞에서 한국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가운을 직접 제작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의 기모노 장인들이 수를 놓아 만들었다.<정리·최병준 기자>

 

 

?

  1. 1. 역도산 제자 되려 현해탄 건너다

    장사집안 출신의 타고난 씨름꾼. 어느날 일본잡지서 본 역도산 모습은 내 혼을 빼놓았다. 그를 만나러 무작정 일본행. 불법체류로 1년 수감생활후 마침내 선생을 대면했다. 70년대. 당시 최고의 국민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아이 어른 할것없이 TV 앞에 몰...
    Views12973
    Read More
  2. 2. 내 비장의 무기 ‘박치기’1

    역도산은 내 주무기로 머리를 단련시켰다. 재떨이·골프채 등에 맞아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64년 내가 미국서 챔피언 되던날, 선생은 일본서 운명을 달리했다.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함경도출신인 그는 몸집이...
    Views11565
    Read More
  3. 3. 내 열렬한 팬 ‘박 대통령’

    유난히 레슬링을 좋아했던 그분. 경기 끝내고 청와대에 가면 육여사가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데 반칙은 교육상 안좋아. 김선수는 모범이 돼야 해” 역도산에 이어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됐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모두 자기 일이나 되는...
    Views10127
    Read More
  4. 4. 영원한 맞수,이노키와 바바

    레슬링을 시작한 30세.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가 후배로 들어왔다. 8년5개월간 큰형님 대접받으며 동고동락. 하지만 역도산선생의 죽음으로 일본레슬링계가 분열됐다. 주저없이 선생이 이끌던 ‘일본프로레슬링’을 택했다. 영원한 라이벌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
    Views10044
    Read More
  5. 5. 레슬러의 산실 ‘문화체육관’

    국내 프로레슬링 붐을 위해 천규덕·김덕 등과 가진 경기. 일본서도 호평을 얻었다. 박대통령의 도움으로 정동에 지은 문화체육관 배출 1기생. 이왕표·양승희·김광식…. 국내 레슬링계를 이끌어간 주역들이다. 나의 무대는 일본이었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경기를...
    Views10378
    Read More
  6. 6. 언제나 미안한 그 이름 ‘가족’

    17세때 아버지 권유로 든 장가. 3살 연상의 아내. 빵점 가장이었지만 아내는 군말 한마디 없었다. 일본서 보낸 돈을 떼먹은 사람들이 아내에게 오히려 큰소리 쳤다. 77년 군에서 의문사 당한 막내. 아내는 8년전 세상을 떴다. 링 위에서는 세계를 제패했지만 ...
    Views8252
    Read More
  7. 7. 죽을 고비 넘겨 얻은 신조

    여러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여순사건 주동이 된 부대의 죽마고우들에 대접한 식사. 배후 조종자로 몰려 맞아 죽을뻔 했다. 6·25가 터져 또다시 곤욕을 치렀다. 그후 원한을 사지않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신조로 세상을 살았다. 아들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
    Views7677
    Read More
  8. 8, 동생·사위 합세 ‘레슬링 명가’

    20년 터울의 배구선수출신 막내동생 김광식. 연습벌레였던 그는 멕시코·미국서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120㎏의 거구 남해산. 언제나 듬직하고 성실했던 모습. 딸에게 ‘그와 결혼하라’고 권했다. 사실 우리 집안은 「레슬링 가문」으로 손색없다. 막내동생 광...
    Views10329
    Read More
  9. 9. 운 안따라준 수산물 사업

    레슬링 쇠퇴하던 70년대말 사업시작. 속초에 ‘김일수산’차려 일본수출에 전념했다. 한때 잘나가던 사업. 명태어획 급감에 현금회수도 안돼 결국 문을 닫았다. 70년대말 사업에 손을 댔다. 「장영철 파동」이후 레슬링이 침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쇠...
    Views8266
    Read More
  10. 10. 영광은 가고 상처만 남아

    레슬링을 하면서 몸은 서서히 만신창이가 됐다. 링을 떠나 속초에 있던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뇌졸중이었다. 추위가 심했던 어느날. 당시 어느 신문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타향에 묻혀 수산업을 하고 있는 나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바닷가에 나가 사...
    Views8112
    Read More
  11. 11. 일본서 열린 눈물의 은퇴식

    링위를 호령하던 박치기왕.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올 때는 병들고 늙은 몸이었다. 을지병원에 머물며 치료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링위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링을 떠난 것은 80년 5월. 제주도 경기...
    Views8755
    Read More
  12. 12. 팬사랑 넘친 레슬링 인생1

    귀국 후 잊혀졌던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언론에서도 나를 도와야 한다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별다른 스포츠가 없었던 60~70년대. 거구의 외국선수를 매트에 내려꽂는 한국선수들을 보곤 모두 자신들이 이긴 것인 양 기뻐했던 국민...
    Views8382
    Read More
  13. 13. 레슬링을 국민스포츠로

    얼마나 많은 경기를 치렀을까. 나는 기억할 수조차 없지만 아직도 팬들의 머리 속에는 나의 경기장면이 생생히 남아있나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내 경기 기록을 속속들이 꿰고있다. 1년에 150∼200여 경기를 치렀으니 평생 3...
    Views8425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