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11. 일본서 열린 눈물의 은퇴식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na_11.jpg링위를 호령하던 박치기왕.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올 때는 병들고 늙은 몸이었다. 을지병원에 머물며 치료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링위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링을 떠난 것은 80년 5월. 제주도 경기후 링위에 서본 적이 없다. 5·18로 어수선했던 시절. 제주도에서 대규모 국제대회를 준비중이었다. 그때 제주도만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내려졌다. 군중집회나 대규모 행사는 꿈도 못꿀 때였다. 하지만 이미 경기 포스터가 나붙었고 경기 당일 제주 공설운동장에는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인산인해라고 할까. 어림잡아 5만명이 될 듯 싶었다. 계엄군들이 깜짝 놀랐다. 계엄령하에서 레슬링경기라니. 하지만 이미 모인 사람들을 되돌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오히려 이들을 해산시키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하던 군에서도 결국 경기를 진행하도록 허락했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 김일체육관이 문화방송으로 넘어가고 한때 장안동에 체육관을 세웠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그때 나이가 52세.

병상에 있을 때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내 은퇴식을 일본에서 거행하자는 제의. 은퇴경기는 일본의 스포츠 기자단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일본에 레슬링을 심어놓은 역도산과 그 뒤를 잇는 수제자. 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 레슬링계에서 이노키, 바바와 어깨를 겨루던 삼두마차.

일본에서는 내 경기를 보지 못했던 10∼20대의 젊은이들도 명성은 알고 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록까지 모두 줄줄 외댄다. 실제로 나는 역도산 선생이 가졌던 모든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WWA 챔피언, 인터내셔널 헤비급챔피언,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등. 이노키와 바바는 기록 면에서도 나보다 뒤진다.

행사는 일본 잡지사인 「벤츠모로 만가」의 이키다 사장이 주관했다.

95년 4월2일. 은퇴식은 동경돔에서 열렸다. 6만명이나 모였다. 모두 오키 긴타로를 연호했다. 링을 떠난 지 15년만에 은퇴식을 열다니. 고희를 앞둔 67세의 레슬러에게는 가장 기쁜 링이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행사장에 들어갔다. 내 휠체어를 밀어준 사람은 바로 루 테스. 전설적인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와도 미국에서 경기를 가진 적이 있었다. 60년대 중반쯤 미국 휴스턴에서 그와 겨뤘다. 하지만 실력을 판가름하지는 못했다. 관중이 던진 병에 내가 눈 언저리를 맞아 「닥터 스톱」으로 경기가 중단됐다. 그는 챔피언을 지낸 OB 모임의 회장이었다. 바바와 함께 수많은 레슬러가 참석했다. 라이벌 이노키는 불참했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던 사각의 링. 은퇴 레슬러를 위해 울려주는 12번의 공소리. 화려했던 레슬링 인생을 접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갖지 못한 은퇴식. 고국의 링위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수많은 팬들의 연호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했다.<최병준 기자>
?

  1. 1. 역도산 제자 되려 현해탄 건너다

    장사집안 출신의 타고난 씨름꾼. 어느날 일본잡지서 본 역도산 모습은 내 혼을 빼놓았다. 그를 만나러 무작정 일본행. 불법체류로 1년 수감생활후 마침내 선생을 대면했다. 70년대. 당시 최고의 국민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아이 어른 할것없이 TV 앞에 몰...
    Views12951
    Read More
  2. 2. 내 비장의 무기 ‘박치기’1

    역도산은 내 주무기로 머리를 단련시켰다. 재떨이·골프채 등에 맞아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64년 내가 미국서 챔피언 되던날, 선생은 일본서 운명을 달리했다.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함경도출신인 그는 몸집이...
    Views11531
    Read More
  3. 3. 내 열렬한 팬 ‘박 대통령’

    유난히 레슬링을 좋아했던 그분. 경기 끝내고 청와대에 가면 육여사가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데 반칙은 교육상 안좋아. 김선수는 모범이 돼야 해” 역도산에 이어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됐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모두 자기 일이나 되는...
    Views10110
    Read More
  4. 4. 영원한 맞수,이노키와 바바

    레슬링을 시작한 30세.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가 후배로 들어왔다. 8년5개월간 큰형님 대접받으며 동고동락. 하지만 역도산선생의 죽음으로 일본레슬링계가 분열됐다. 주저없이 선생이 이끌던 ‘일본프로레슬링’을 택했다. 영원한 라이벌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
    Views10028
    Read More
  5. 5. 레슬러의 산실 ‘문화체육관’

    국내 프로레슬링 붐을 위해 천규덕·김덕 등과 가진 경기. 일본서도 호평을 얻었다. 박대통령의 도움으로 정동에 지은 문화체육관 배출 1기생. 이왕표·양승희·김광식…. 국내 레슬링계를 이끌어간 주역들이다. 나의 무대는 일본이었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경기를...
    Views10349
    Read More
  6. 6. 언제나 미안한 그 이름 ‘가족’

    17세때 아버지 권유로 든 장가. 3살 연상의 아내. 빵점 가장이었지만 아내는 군말 한마디 없었다. 일본서 보낸 돈을 떼먹은 사람들이 아내에게 오히려 큰소리 쳤다. 77년 군에서 의문사 당한 막내. 아내는 8년전 세상을 떴다. 링 위에서는 세계를 제패했지만 ...
    Views8233
    Read More
  7. 7. 죽을 고비 넘겨 얻은 신조

    여러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여순사건 주동이 된 부대의 죽마고우들에 대접한 식사. 배후 조종자로 몰려 맞아 죽을뻔 했다. 6·25가 터져 또다시 곤욕을 치렀다. 그후 원한을 사지않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신조로 세상을 살았다. 아들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
    Views7660
    Read More
  8. 8, 동생·사위 합세 ‘레슬링 명가’

    20년 터울의 배구선수출신 막내동생 김광식. 연습벌레였던 그는 멕시코·미국서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120㎏의 거구 남해산. 언제나 듬직하고 성실했던 모습. 딸에게 ‘그와 결혼하라’고 권했다. 사실 우리 집안은 「레슬링 가문」으로 손색없다. 막내동생 광...
    Views10300
    Read More
  9. 9. 운 안따라준 수산물 사업

    레슬링 쇠퇴하던 70년대말 사업시작. 속초에 ‘김일수산’차려 일본수출에 전념했다. 한때 잘나가던 사업. 명태어획 급감에 현금회수도 안돼 결국 문을 닫았다. 70년대말 사업에 손을 댔다. 「장영철 파동」이후 레슬링이 침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쇠...
    Views8248
    Read More
  10. 10. 영광은 가고 상처만 남아

    레슬링을 하면서 몸은 서서히 만신창이가 됐다. 링을 떠나 속초에 있던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뇌졸중이었다. 추위가 심했던 어느날. 당시 어느 신문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타향에 묻혀 수산업을 하고 있는 나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바닷가에 나가 사...
    Views8092
    Read More
  11. 11. 일본서 열린 눈물의 은퇴식

    링위를 호령하던 박치기왕.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올 때는 병들고 늙은 몸이었다. 을지병원에 머물며 치료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링위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링을 떠난 것은 80년 5월. 제주도 경기...
    Views8737
    Read More
  12. 12. 팬사랑 넘친 레슬링 인생1

    귀국 후 잊혀졌던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언론에서도 나를 도와야 한다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별다른 스포츠가 없었던 60~70년대. 거구의 외국선수를 매트에 내려꽂는 한국선수들을 보곤 모두 자신들이 이긴 것인 양 기뻐했던 국민...
    Views8365
    Read More
  13. 13. 레슬링을 국민스포츠로

    얼마나 많은 경기를 치렀을까. 나는 기억할 수조차 없지만 아직도 팬들의 머리 속에는 나의 경기장면이 생생히 남아있나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내 경기 기록을 속속들이 꿰고있다. 1년에 150∼200여 경기를 치렀으니 평생 3...
    Views8408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