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의 이름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는 점이 마음 아프다.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명예의 전당’에 떳떳하게 올라 있어야 마땅하다.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수 많은 섬 중에 하나인 ‘후추도’에 꽂힐 ‘깃발’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연말, 모든 언론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발표했던 ‘20세기를 빛낸 스포츠 인’’ 명단에 김일 이란 이름 두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20세기 스포츠 사 최대의 스캔들’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름이 왜 빠져 있는지 누가 납득이 가도록 설명 좀 해줬으면 한다. ‘레슬링은 쇼 (SHOW)’ 라서?? 레슬러들은 정통 스포츠 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어서?? 그들의 피는 피가 아니라 물감이라서??
김일의 이름은 아끼고 싶었다. 어쩌면 끝까지 그의 이름이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않아도 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국영 또는 민영 방송국에서 대대적으로 그의 ‘휴먼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각 신문사마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그의 특집 기사를 연재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김일의 전설’에 대해 훤히 알 수 있게 되길 바랬다. 그를 올바르게 조명하기 위해서 언론사의 방대한 자원과 인력이 투입된다면, 굳이 후추가 나서서 그의 업적을 다시 논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추의 일반적인 선정 대상 기준에 매스를 가했다. 오는 3월4일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인 ‘김일 선수 은퇴식’ 소식을 접하면서 언젠가 장문의 김일 기사 한편 쓰는 것으로 그에 대한 보답을 마감하기가 싫었다. 벌써부터, “후추는 언론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갖고 객관적인 기사를…” 부르짖는 독자들이 늘고 있는 판국에, 실질적으로 그에게 작으나마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그의 은퇴식 이전에 김일의 이름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모시게 되었다. 독자들을 ‘꺼지지 않은 촛불 - 김일의 전설’을 마지막으로 목격할 수 있는 자리로 초대하고 싶어서 말이다.
김일의 박치기… 김정구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 심훈의 ‘상록수’,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처럼 팬들 기억 속엔 ‘트레이드 마크 중에 트레이드 마크’로 영원히 자리잡을 것이다. 그런 김일의 박치기를 ‘이야기’로만 들어 온 ‘불행한’ 어린 스포츠 팬들에겐 왜 김일의 전설이 그토록 끈질기게 대 물림을 해 올 수 밖에 없었는지 알려 주고 싶었고, 그런 김일의 박치기 한방을 지켜보며 카타르시스를 체험했던 올드 팬들에겐 지금 들어도 가슴 설레는 옛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다시 한번 회상 캐 해 주고 싶었다.
김일은 박치기 한방으로 한국 프로레슬링을 명실공히 ‘국민 스포츠’로 만들어 버린 적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 박치기 한방으로 프로레슬링을 이땅에서 영원히 추방되게 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김일의 박치기, 김일의 드라마, 김일의 카리스마로 인해 ‘프로레슬링은 곧 김일’ 이란 등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바로 그 ‘프로레슬링은 곧 김일’ 이란 꼬리표 때문에 그는 프로레슬링이란 스포츠 자체보다도 더 크게 군림하게 되었고, 김일이 사라지면서 프로레슬링 역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레슬링은 쑈 (Show) 다’ 라는 장영철의 폭탄 선언의 여파가 패 가시기도 전에 속출 된 숱한 파벌 싸움, 음모 설, 세 늘리기… 이런 프로레슬링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을 불식시키지 못한 ‘국민 레슬러 김일’은 그 누구보다도 오늘의 프로레슬링 현실에 가장 가슴 아파하고 책임 의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프로레슬링이 ‘쑈 (Show)’ 였든 아니었든 후추에겐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프로레슬링의 증발’에 대한 김일의 공헌과 책임을 후추가 대변하고 싶지도 않다. 한때 김일이 일본 땅에서 활약했을 때, 일장기를 달고 ‘오오끼 긴타로’ 란 링-네임을 쓰면서 일본인 행세를 했다는 주장 역시 후추에겐 관심이 가질 않는다.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김일의 ‘박치기 한방’은 ‘원, 투, 쓰리!’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전쟁의 잿더미에서 하나, 둘씩 다시 일으켜서 좀 더 ‘밝은 미래’를 꿈꾸며 개미처럼 일 해 오던 전 국민들의 피곤에 찌든 육체와 정신을 그 ‘박치기 한방’으로 말끔히 회복시켜 주었고, ‘치직~거리는’ 흑백 TV 한대 앞에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고구마 쪄 먹으며 김일의 ‘박치기 한방’을 지켜 보면서 그 시절만의 훈훈한 정과 사랑을 키워 나갔고, 꽁초 담배 피워 대시며 피멍들은 안토니오 이노끼의 이마를 바라보시던 이 땅의 모든 할머니들에겐 김일의 ‘박치기 한방’으로 그들의 ‘피멍들은 과거사’를 잠시나마 통렬히 날려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화가 남아 돌아서 물 쓰듯 펑펑 질러댈 수 있게까지 우리 경제를 탄탄하게 일으켜 세운 60년대의 아버지, 삼촌들에게 ‘할 수 있다’ 라는 용기와 희망을 심어준 김일. 이승엽, 고종수가 탄생 하기 전, ‘스포츠’ 란 개념도 정립되지 않던 시절 ‘나는 커서 김일처럼 힘 세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야.’ 라고 외쳐대던 어린이들에게 꿈과 기쁨을 전해준 김일. 태극기를 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어떤 스포츠 스타보다도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김일의 의미가 컸기 때문에 후추 명예의 전당에 그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토록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한의 아들 - 김일의 이름을 십 수년동안 헌신짝처럼 방치해 둠으로써, 일본 사람들이 선수 쳐서 ‘기념 은퇴식’을 만들어 주게 했다는 수치스러운 사실을 더 이상은 가슴 속에 묻어둘 수가 없어서 그를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액 한다. 아직도 그가 살아 있어서 고마울 뿐이다. 그가 ‘연출’ 해 낸 수 많은 추억 거리들에 대해 ‘고맙다’ 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라도 남겨줘서 고마울 뿐이다. “감사합니다… 김일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