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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영웅의 은퇴식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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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 선생님의 은퇴모습잔치는 화려했으나 쓸쓸함은 감출 수 없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늘 쓸쓸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박치기 영웅이었기에 병든 채 링을 떠나는 뒷모습은 더욱 쓸쓸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안트 바바, 저 이렇게 셋이 역도산 선생 제자였는데, 역도산 선생에 게 제가 가장 많이 맞았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역도산 선생이 때리지 않을 때 너는 끝장 이다’고 해 그 매를 견뎠습니다. 이왕표 선수도 그 정신으로 선수 생활을 해주면 좋겠습니 다.”

김일(金一. 72) 선수가 은퇴식을 하면서 후계자로 지명한 이왕표 선수에게 남긴 말이다. 은 퇴식에서 김일 선수의 공식 후계자가 된 이왕표 선수는 김일 선수의 WWA 챔피언 벨트와 가운을 물려 받았다.

3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은퇴식이 열렸다. 약 2천여명의 팬들이 모 인 가운데 김일은 여태 못 치렀던 은퇴식을 연 것이다. 95년 일본에서의 은퇴식에서는 서서 팬들에게 응답했지만, 이번에는 후계자 이왕표 선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부축 속에 힘 든 걸음으로 걸어 나와, 의자에 앉아서 은퇴식장을 지켜 팬들의 가슴 아프게 했다. 80년 5월 5.18계엄 하에 52세로 그는 마지막 경기를 치른 이후 95년 4월 2일 동경돔에서 6 만 팬이 모인 가운데 67세의 나이로 은퇴식을 했다. 평소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링 위에서 팬들에게 인사할 수 있다면…그것이 마지막 소원이다.”고 말해 왔다. 동경에서 은퇴 식을 한 만 5년 만에 고국팬 앞에서 은퇴식을 한 것이다. 텔레비전 중계와 축하쇼, 팬의 환 호에 둘러싸인 화려한 은퇴였다. 그러나 현란한 잔치로도 병든 ‘박치기왕’의 무상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현재 김일 선수는 관절염과 박치기 후유증으로 인한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노원을지병원의 도움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병실에는 지금도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팬들이 보내 준 편지와 선물들로 병실을 장식해 옛 영화를 되새기고 있다. 70년대 흑백 텔레비전 시절 김일은 한국인에게 남녀노소할 것 없는 우상이었다. 거구의 미 국인이나 잔인한 일본인… 누구와 만나도 김일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치 기로 경기를 깨끗이 마무리해 주었다. 그의 박치기 한 방이면 어떤 선수도 꼼짝 못했던 그 시절, 우리는 김일이 어서 빨리 박치기 로 상대선수를 때려눕혀 주기를 소리 높여 외쳤다.

1929년 2월 24일 김일은 전남 고흥의 거금도에서 수산물을 주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 다. 수산물 수입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가정에서 자란 김일은 16세 때부터 씨름판에 나가 송아지 를 타오는 등 남달리 힘이 좋았으며, 군대에서도 씨름꾼으로 불릴 만큼 씨름을 잘했다. 그는 56년 역도산을 찾아서 일본으로 오는 무역선을 탄다. 우연히 일본 잡지에 실린 역도산 의 모습을 보고 ‘나도 역도산의 제자가 되어 이름을 날려 보자’는 포부를 안고 고국을 떠 난 것이다.

역도산 찾아 일본으로 밀항 그러나 배가 오사카에 닿아 동경에 도착하기도 전 일본 경찰에 잡힌 그는 쫓겨날 위기에 봉 착했다. 그는 형무소에서 1년을 보낸 끝에 편지로 도움을 청한 역도산의 보증으로 풀려나와 역도산 수하로 들어갔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현해탄을 건너 왔으니 참고 견뎌라”는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역도산 밑에서 그는 밥, 빨래, 청소를 해대느라 오래 동안 링 위에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역도산은 유독 김일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특히 역도산은 김일의 머리를 주무기로 단 련시키기 위해 재떨이, 골프채로 내리쳐 김일의 머리는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김일이 역도산의 제자가 된 1년 후 브라질에 이민 가 있던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가 제자로 들어온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오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란 일본이름을 지어주었 다. 전설 속의 장사를 뜻하는 이름이었다. 그는 64년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 미국에서 테그 챔피언이 되었다. 그 러나 그때 일본에서 역도산은 야쿠자의 칼에 맞고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역도산의 사망 으로 그는 일본으로 입국하지 못했는데, 일본 당국이 신원보증인이 죽었으니 일본으로 들어 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역도산 죽음으로 日 입국 거절
그는 서울로 돌아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박정희 정권 치하 그의 레슬링은 온 국민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는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존재였 던 김일을 박정희 대통령은 극진하게 대했다. 당시 김일 선수는 청와대 만찬에도 몇 번 초 대받았는데, 한 번은 박 대통령이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일은 “고향에 전 기가 안 들어와 수산물 생산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하자 그 얼마 안 있어 거금도에 전기가 들어갔다. 그만큼 김일을 아꼈던 것이다. 그가 레슬링으로 인기를 얻은 이후 국내에 천규덕 남해산 김덕 박승모 박성남 오대균 등 레 슬링 스타들이 나타나고, 72년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문화체육관이 건설됐다. 김일 자신도 1 천만원을 투자해 건설한 김일 체육관이었다. 그러나 체육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의 발언 파동 이후 레슬링의 인기는 하강하기 시작했고, 80년 전두환 신군 부에게 체육관을 내놓게 되었다.

레슬링이 쇠퇴의 길을 걷던 70년대 말 김일 선수는 속초에 김일 수산을 차렸다. 명란젓 미 역 등 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으로 특히 명란젓은 일본에서 ‘다라코’라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명태 어획고가 준 데다 현금마저 회수되지 않아 김일수 산은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링을 떠나 속초에 있는 동안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를 위해 타워호텔에 잠깐 올라왔다 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이후 휠체어 신세를 지며 국립의료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팬이 었던 일본인 이기타씨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본에서 그는 도쿄 적십자 병원, 오 사카 시립병원, 규슈 나카무라 병원을 전전하며 3년을 보냈다. 그때 마침 김희로(권희로)씨 의 석방운동을 벌이고 있던 삼중 스님이 찾아와 김일이 일본서 외로이 투병 생활을 하고 있 다는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한국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각계에서 후원의 손길이 닿 았고, 을지 병원으로 돌아가 한국에서의 투병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17세 때 3살 연상의 박금례씨와 결혼했고 2남 2녀를 두었다. 부인 박금례씨는 그가 뇌 졸중으로 쓰러지던 해 백혈병에 걸려 얼마 후 세상을 떠났으며, 막내 아들 기환은 군에서 의문사하여 1남2녀가 남았다.

보이지 않는 ‘하얀손’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 지난 93년 일본 후쿠오카 한 요양소에서 외로이 투병생활을 하던 김일 선수가 고국으로 돌 아가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던 데는 무료진료를 자처하고 나선 보이지 않는 선행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담의 주인공은 서울 노원구 을지병원의 박준영 이사장으로, 김일 선수가 오랜 투병 생활 을 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절 하는 박 이사장은 94년 1월 주치의와 함께 직접 김일선수가 있는 후쿠오카로 와 김일 선수 를 직접 모셔 갔다. 당시 박 이사장은 김일 선수가 일본에서 쓸쓸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너나 없이 어려웠던 시절 우리에게 꿈과 희망이 되어준 우리의 영웅을 일본땅 한 구석에 서 쓸쓸히 지내게 할 수 없다”며 김 선수의 평생 무료진료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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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출신 역도산은 몸집이 크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끌려와 스모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허나 일본인이 아니면 스모 챔피언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 외국인 차별 때문에 스모계를 떠나 레슬링으로 전향했다. 58년 전설적인 철인 루테스를 꺾고 세계챔피언이 되었으나 64년 야쿠자의 칼에 맞고 그 후휴증으로 감염이 일어나 세상을 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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