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일과 사람들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김일과 사람들



안토니오 이노끼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끼…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라이벌이자 선, 후배, 그리고 동료였다. 이 두 ‘거함’의 격돌을 목격했던 독자라면, 당시 둘 사이에 존재했던 (최소한 표면 위로의) 라이벌 의식은 ‘왕정치 - 나가시마’, ‘알리 - 프레이져’ 그리고 ‘매직 죤슨 - 래리 버드’의 정도에 버금갔다는 말에 큰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4강의 링’ 안에서 이노끼의 ‘머리를 올려준 사람’이 김일이었다면, ‘장영철 폭로 사건’ 이후 침체 되었던 국내 레슬링 재건의 1등 공신은 어쩌면 안토니오 이노끼였는지도 모른다. 통산 전적 1승1무 1패가 말해주듯, 김일은 영원한 한국의 ‘뚝배기’ 였고, 이노끼는 일본의 ‘사시미’ 였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의 김일이 젊고 늘씬하게 잘 빠진 이노끼 (43년 생 - 190cm, 102kg) 를 상대로 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의 어린이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었고 일에 지친 가장들은 가정을 되찾게 되었다.


 안토니오 이노끼 (본명 칸지 이노끼)… 브라질 계 혼혈아 출신으로 전 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 우승 후 17살 때, 역도산에 의해서 레슬링 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역도산 사망 후 같은 문하생 출신이었던 자이언트 바바와 ‘파’가 나뉘어져 그는 ‘신 일본 레슬링’의 우두머리 자리를, 바바는 ‘전 일본’을 책임지던 일본 레슬링 계의 양대 산맥 중 한명이었다.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는 안토니오 이노끼의 ‘주걱턱’ 이 그 무엇보다도 인상 깊게 남아있지 않나 싶다. 워낙 강렬한 인상의 이노끼의 매력 포인트이면서, 한편으론 ‘옥의 티’ 였던 그누메 ‘주걱턱’ 땜시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애들 사이에서 턱이 손톱만큼만 돌출했다 하면 그 친구는 무조건 ‘안토니오 이노끼’란 별명이 붙었었다. 아마 그 당시에 전국구 단위로 ‘이노끼’란 별명이 붙었던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았더라면… 초등학교 운동장 하나정도는 채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는 분명 당시 이노끼에 대한, 또는 프로레슬링에 대한 국민들의 애증과 관심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사회적 현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 국민들이 일개 일본인 레슬러 이노끼에 대한 관심이 하늘을 찌를 수 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바로 76년 6월 26일에 개최 되었던 ‘세기의 격투기 무하마드 알리 VS 안토니오 이노끼’ 전 때문이었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인’으로 선정될 정도의 ‘고귀한 몸’ 알리를 상대하기에 이노끼에겐 규정 상 제약이 워낙 많았던 이유로, 그는 전 매치를 매트 위에 누워서 풀어 나갔다. 어차피 일어선 채로 알리와 ‘맞장’ 떴다간 그 ‘주걱턱’이 날라갈 것이고, 누운 채로 계속 알리의 다리만 집중적으로 차는 공격을 펼쳤다. 그 결과 금세기 가장 ‘소문난 잔칫집’으로 기억되긴 했지만, 세계 최고의 철권을 상대로 동양인 레슬러, 특히 우리 김일 선수와 대결하던 낯 익은 얼굴 이노끼가 알리를 상대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노끼에 대한 관심은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 되었다.


 74년 10월 10일… 어느새 레슬러로써 확고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레슬링의 본 고장인 미국의 3대 헤비급 타이틀 중 하나를 거머쥘 정도로 급성장한 (NWA) 이노끼를 상대로 김일이 정식 타이틀 도전장을 내민다. 이를 위해 김일은 괌에 비밀 캠프를 차려놓고 이노끼의 얼굴이 그려진 샌드백과 매일 시름 할 정도로 의욕에 불타고 있었지만, 적지에서의 승부 결과는 의외로 간단하게 끝났다. 경기 시작 13분 13초 만에 김일은 이노끼의 ‘코브라 트위스트’에 덜미를 잡혀 무릎을 꿇게 된다. 이때부터 또 한번 한반도는 이노끼의 ‘공포의 코브라 트위스트’ 물결에 휩싸이게 되고, 도대체 어떤 기술이길래 천하의 김일이 일본인 이노끼에게 ‘Give Up’ (‘항복’)을 외쳤는지 궁금해 한다. 이노끼의 ‘코브라 트위스트’, 피부 색깔을 막론하고 이 기술에 한번 걸렸다 하면, ‘최소한 허리 병신’ 이란 얘기도 있었고, 경기 입장 시 항상 목덜미에 감겨졌던 이노끼의 ‘ 휜색 타올’ 만큼이나 유명했던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총력전을 펼치던 중, 상대의 힘이 거의 다 소진 되었다고 생각할 때 링 한 가운데에서 걸고 들어가는 ‘코브라 트위스트’는 다리와 팔을 모두 이용해서 상대의 몸을 완전히 쥐어 트는 ‘항복 기술’ (Submission Hold) 이었다. 실제 후추 스탭 중 한명이 코브라 트위스트의 위력을 만끽 (?) 하고자 얼마 전 이왕표 선수를 만났을 때, 특별 시범을 요청했는데…. 아, 그 광경은 인간이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쑈 (Show) 라던 레슬링 기술이 아파야 얼마나 아플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겁 세포 상실한 상태’에서 부탁했다가… 이 친구 사흘째 허리와 다리를 못 쓰고 있다


.   안토니오 이노끼의 데뷔전을 상대해주며 승리로 이끈 후, 정상급 레슬링 스타가 되어서 처음 맞붙은 대결에서 완패한 김일은, 이듬해인 75년 3월 한국에서 설욕전을 갖는다. 과거에 비해서 시들해진 레슬링의 국민적 관심도가 이노끼와의 라이벌 전을 통해 다시 활기를 찾게 되고, 75년 이노끼가 한국 순회전을 위해 데리고 들어 온 일본 선수단 역시 국내 레슬링 재건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준비 된 이노끼와의 세번째 대결에서는 무승부로 끝나, 결국 누구도 통산 전적 우위를 누리지 못한 채 링을 떠나게 된다.


한-일 레슬링의 두 간판 김일과 이노끼의 승부 세계는 이처럼 팽팽한 평행선을 유지해 나갔지만, 링 밖에서 두 사나이가 나누었던 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역도산 문하생 시절 둘 사이의 ‘야사’는 물론, 부츠를 벗은 90년대 김일과 이노끼가 나눈 인간적인 사랑과 동료애는 한,일의 국경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1989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스포츠 평화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 된 이노끼는, 1993년 제 14대 대통령 취임식에 일본 경축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 위해 내한했다. 오랜 선배이자 동지였던 김일의 눈물겨운 투병 소식을 들은 이노끼는 김일의 거처를 수소문 했고, 그런 친구를 병상에서 맞이할 수 없다던 김일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접 김포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갔다. 장충체육관이 아닌 김포공항, 레슬링 타이즈가 아닌 두터운 겨울 외투를 걸치고, 한명은 번듯한 정치인 그리고 또 한명은 병마와 싸우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두 사나이들은 감격의 재회를 나누었다. 이후 이노끼는 곧 바로 김일의 치료를 위해 일본 후쿠오카의 일류 병원이라는 ‘도고 병원’ 으로 김일을 후송했고, 김일의 미지막 ‘파이터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야말로 ‘쑈 (Show) 꾼’ 들의 의리와 우정치곤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이 아닌가…



 여건부

김일의 명예의 전당 얘기를 꺼내면서 굳이 ‘여건부’ 란 어색한 이름을 꺼내는 이유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여건부란 재일 교포 레슬러를 별도로 후추 명에의 전당에 헌액 시키기엔 다소 어려움이 따르고, 그렇다고 70년 대 중반 여건부가 국내 링에서 보여준 ‘신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건부란 이름이 국내 레슬링 계에 가져 다 준 ‘바람’이야 말로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75년 3월. 이노끼의 ‘신 일본 레슬링 연맹’ 군단과 함께 모국 땅에 들어온 여건부는, 단 번에 그의 이름을 대한민국 레슬링 사에 올려 놓게 되고, 레슬링 팬에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70년대 한국 레슬링 ‘제 2의 물결’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 명 ‘호시노 간다로’… 크지 않지만 다부진 몸집에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로 상대를 교란시키던 여건부는 미국 테네시 주 태그 챔피언으로써, ‘인간 탄환’ 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다이내믹한 플레이를 펼쳤던 선수였다. 이노끼 팀과 귀국 당시, 본인은 한국인의 이름으로 한국 선수와 한 조가 되어서 매치에 임하겠다고 해서, 당시 ‘풍차 돌리기의 명수- 김기남’ 과 짝이 되어 일본 선수들의 혼줄을 빼놓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선수이다. 70년대 중반, 우리 레슬링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던 때, 천규덕의 박치기, 장영철의 드롭킥, 김일의 박치기..등의 ‘헤비급 기술’이 고작이었다. 특히, 여건부 같은 경량급 (?) 선수들의 고난도 기술을 일찍이 본 적도 없었으며 ‘레슬링을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란한 기술을 선 보였던 장본인이다. 김일의 메인이벤트에 앞서 세미파이널 태그 매치에 주로 등장했던 여건부의 당시 인기는… 꼬맹이들 사이에서 ‘여건부 신드롬’을 앓지 않았던 친구가 드물 정도였다. 왼팔에 상대방의 머리를 끼어넣고 ‘스카이 콩콩’ 타듯 팔짝팔짝 뛰면서 상대방의 머리통을 가격하던 ‘복서 출신 레슬러 - 여건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링 위를 ‘날아 다니던’ 여건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팬들이 물결이 끊이지 않았고, 단순히 ‘신 일본 팀’과의 순회 경기를 치르고자 한국을 방문했던 본인의 당초 의사와는 달리, 여건부는70년대 후반 국내 레슬링 매치 최대 ‘빅 카드’가 되어 버렸다. 역발산, 백경… 등과 함께 84년 6월 6일까지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매치를 벌였으니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여건부가 매료시킨 레슬링 팬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짐작이 잘 가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

  1. PROLOGUE

    김일의 이름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는 점이 마음 아프다.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명예의 전당’에 떳떳하게 올라 있어야 마땅하다.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수 많은 섬 중에 하나인 ‘후추도’에 꽂힐 ‘깃발’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연말, 모든 언...
    Views14537
    Read More
  2. 김일 The Wrestler

    필자가 태어난 해는 1968년 초 겨울이었다. 최대한으로 멀리 옛 기억을 되짚어 보더라도 72-3년 이 전으론 특별한 추억 거리, 특히나 레슬링과 관련 된 추억 거리가 없다. 아마 김일의 모습을 TV로 처음 접했던 시기도 그 때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검은 색 타...
    Views12327
    Read More
  3. 역도산의 그림자

    김일의 화려한 레슬링 경력을 논하면서 그의 스승이자 ‘아시아 레슬링의 전설’ 역도산 (일본명 ? 모모다)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50년대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역도산 때문에 김일은 레슬러의 꿈을 키웠고, 역도산 덕분에 레슬링에 대한 본격적인 조...
    Views9133
    Read More
  4. 세계 속의 김일

    김일이 귀국하면서 국내 레슬링의 전반적인 기량 향상, 결국엔 팬 동원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전까지 보아왔던 국내 레슬링의 수준과 김일이 선사했던 기량의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무엇보다도 김일이 존재했던 국내 레슬링 ...
    Views8362
    Read More
  5. ‘쇼 (Show)의 변천사’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 수원, 대전을 거쳐 부산에 정착한 ‘장용길’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당시 부산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시장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동아 체육관’에서 아마츄어 레슬러의 꿈을 키우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던 이 ...
    Views8286
    Read More
  6. No Image

    ‘Show vs. No Show’

    말귀를 알아들었을 때부터 레슬링을 보기 시작한 필자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어느 농구 팀을 제일 좋아하냐?” 또는 “누가 이길 것 같냐?’ 등의 질문도 아니다. “야, 레슬링 무슨 재미로 보냐? 순~ 쑌데!” 바로 이 질문이다. 필자 평생 처...
    Views7417
    Read More
  7. 김일과 사람들

    김일과 사람들 안토니오 이노끼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끼…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라이벌이자 선, 후배, 그리고 동료였다. 이 두 ‘거함’의 격돌을 목격했던 독자라면, 당시 둘 사이에 존재했던 (최소한 표면 위로의) 라이벌 의식은 ‘왕정치 - 나가시마’, ‘알...
    Views11768
    Read More
  8. 김일이란 인간

    프로레슬러… 이름만 들어도 그 얼마나 살벌한 직종인가? 실제 프로레슬러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체구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앞서 김일의 ‘링 캐리어’ (Ring Career)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이젠 그의 이면을 보도록 하자.. 링 위에서는...
    Views8771
    Read More
  9. 후추 노컷 인터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영등포에 위치한 이왕표 선수의 사무실… 약 10분 후엔 필자의 어린 시절 우상이자 한국 레슬링의 대부 - 김일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이왕표 선수와의 짧은 인터뷰가 진행되던 도중, 사무실 밖이 술렁이기 ...
    Views7869
    Read More
  10. No Image

    경기자료 및 그의육성

    클릭하시면 김일 선수의 시원스러운 경기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모든 장면은 gif 형식이므로 다운로드 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료를 제공해주신 김일 선수 은퇴식 추진본부의 송수연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김일 경기자료 1 (경기 장면 보기 72...
    Views7968
    Read More
  11. EPILOGUE

    지금도 김일의 박치기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홍 코오나~~ 인따나쇼날 참피오온~~ 김~~일~~~!!!” 지금도 김일의 최근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매진다. “여러분들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배출해 낸 수 많은 월드 스타들 중에서 김일 만...
    Views7497
    Read More
  12. 후추 명전 메모리

    김일 선생의 명전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은 좀 색다르다. 후추에서 명전에 대한 첫 구상을 했던 작년 5월 경기도 양평의 어느 작은 콘도 방... 그때 바로 명전의 3대 선정 방향이 골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1. 여론에 의해 매장된 스타들의 명예 회복...
    Views7801
    Read More
  13. 쓸쓸한 영웅의 은퇴식

    잔치는 화려했으나 쓸쓸함은 감출 수 없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늘 쓸쓸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박치기 영웅이었기에 병든 채 링을 떠나는 뒷모습은 더욱 쓸쓸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안트 바바, 저 이렇게 셋이 역도산 선생 제자였는데, 역도산 선생...
    Views1063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