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 수원, 대전을 거쳐 부산에 정착한 ‘장용길’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당시 부산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시장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동아 체육관’에서 아마츄어 레슬러의 꿈을 키우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던 이 젊은이는 김청수라는 후원자를 만나면서 당시 존재하지도 않던 프로레슬링 그리고 아마 레슬링의 중급 정도였던 격투기 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그럴 즈음에 ‘야수라는 이름의 사나이’ 란 영화를 한편 보고 난 이 젊은이는 그 영화의 주제가 바로 프로레슬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 바로 일본행 통통배에 몸을 싣는다. 일본 고배에 도착한 후, 마침 그곳에서 열리고 있던 프로레슬링 경기를 관전하며 두 달여 간의 ‘견학’을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귀국, 꾸준히 일본 TV를 시청하며 프로레슬러의 야망을 키워 나간다. 이 때 같은 체육관 태권도 부 소속의 천규덕 (탤런트 천호진 씨의 부친) 씨와 프로모터 김청수 씨와 손을 잡고 경남 지역에서 프로레슬링의 첫발을 딛게 되고, 엄청난 팬들의 호응을 얻게 된 국내 1호 프로레슬러 청년은 KBS 개국과 함께 서울로 상경, 대한민국 땅에 처음으로 ‘쇼 (Show)’ 무대가 공중파 방송을 타며 확산되기 시작한다. ‘쇼 (Show)’는 그렇게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고 그 ‘쇼 (Show)’를 진두지휘한 젊은이 장용길은 바로 훗날 ‘드롭 킥의 명수’ 이자 ‘헤드 기어 (Head Gear)의 사나이’로 알려진 장영철 이었다.
방송의 침투력, 그리고 장영철 나름대로의 비전이 만들어 낸 한국 프로레슬링은 제1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해 나갔다. 또한 당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5.16 군사정부의 최고 사령관 박정희 부부의 특별한 ‘관심’으로 인해 더더욱 힘을 받게 되고 ‘국민 스포츠’로 급부상하게 된다. 특히, 육영수씨의 레슬러에 대한 배려는 남달랐다. 큰 대회를 치루고 난 레슬러들을 청와대로 초대해서 만찬을 베풀었고, 변변한 거처도 없이 산 만한 체구를 이끌며 고생한다고 생각하신 덕에 ‘비원’ 안에 숙소와 훈련장을 마련해 주시기도 했다. 김일이 귀국한 후에는 1억원이란 거금을 하사해 지금 서울 정동의 문화 체육관을 당시 ‘김일 체육관’으로 세워 주도록 배려 했다고 한다. 이렇게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무럭무럭 커 가던 ‘쇼 (Show)’의 몰락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상은 ‘까까국장’ 김재길 님의 저서에서 인용)
64년 한해 동안 장충체육관에서는 11개의 크고 작은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렸고 유료 관람객 수 15만 5천 여명. 총 수입 3천 3백만원 돌파, 하루 평균 관중 수 5천명을 동원하며 국내에서 ‘흥행 스포츠’로서의 시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그러나, 국내 선수들의 미숙한 기술과 단조로운 플레이, 외국인 초청 선수로 고작 2명의 일본 선수만 참가한 점…등의 한계점도 드러내며 ‘그 이상’의 발전을 노리기에 역부족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때 북미 대륙을 휩쓸었던 역도산의 수제자 김일이 65년 8월에 방문하면서 서서히 래슬링 기량 향상 및 수준급 외국 선수 초청, 그리고 팬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우리나라 레슬링 초창기의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한다면 ‘장영철이 일궈놓은 밭에 김일이 물을 주고 열매를 땄다.’ 라는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자… 65년 8월에 그야말로 혜성처럼 고국 무대에 나타나 팬들의 사랑을 한 순간에 받게 된 김일, 그리고 수년 전부터 한국 레슬링의 ‘생모’ 역할을 해왔던 장영철… 더구나 폭력과 ‘헝그리 정신’이 난무하던 레슬링 판에서 그들 둘의 ‘랑데부’는 어쩌면 앞을 향해 돌진하던 두대의 열차 모습을 연상케 했을 것이다. 둘 사이의 불화는 어느 정도 예상 되었던 부분이다. ‘한국 레슬링의 잉태’에 기여했던 이 두 사내의 운명이 결국 ‘한국 레슬링의 종말’까지 가져 다 주었다면 이 보다 다 큰 비극이 어디 있을까?
1965년 11월 27일 밤. 장충체육관에서 예정된 ‘김일 대 칼 칼슨’의 메인 이벤트에 앞서 벌어진 ‘장영철 대 오오구마’ 전에서 한국 레슬링의 뿌리가 뒤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일 아니라 역도산이 살아 돌아온다고 치더라도 한국 레슬링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각은 영원히 달라지게 되었다. 3폴 매치로 진행된 이 경기도중 오오구마에게 새우등 꺾기 공격을 허용하며 패배하자, 링 밖에서 관전하던 장영철 측 한국 선수들이 링위로 올라가서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경찰이 투입되고 입건된 장영철의 증언에 따르면 ‘상대 일본 선수가 김일의 지시로 인해 사전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고 이기려고 했다.’라는 주장을 했다. ‘한국 레슬링의 대부’ 장영철의 이 한마디로 인해, 한때 레슬링에 ‘목을 메었던’ 수 많은 팬들의 가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기게 되었다 - “레슬링은 쇼 (Show)다.’ 장영철은 곧 바로 이튿날 김일에게 정식 도전장을 내밀었고, 김일의 답변은 “일본의 3류 선수에게도 패한 장영철이 나에게 도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라 일축하며 “물의를 일으켜가면서까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을 계속 하고 싶지 않다’ 라는 동급의 ‘폭탄 선언’을 했다. 결국 김일의 발언은 하루 만에 번복 되었지만 한국 레슬링의 창립자 김일과 장영철, 두 사람 간의 갈등으로 인해 레슬링은 ‘루비콘 강’을 건너 버렸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소위 ‘1127 사건’ 후, 이듬해인 66년 2월 13일 밤. 창덕궁 안에 있던 김일 도장 소속 선수 천규덕, 안학수, 김기남 등이 ‘특수 폭행치상 혐의’로 입건 되었다. 당시 장영철 도장으로 옮기려고 하던 조경수의 머리를 김기남이 맥주병으로 후려 갈기며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확연하게 대립하던 김일 대 장영철, 장영철 대 김일의 갈등 요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 한번 들여 다 보기로 하자.
김일 측의 주장에 의하면, ‘애당초 조경수는 프락치 임무를 띄고 김일 도장에 접근해와 박송남을 장영철 측으로 빼 돌리려고 했다” 고 하고, 장영철 측은 ’11.27사건’ 이후 호시탐탐 김일에게 정면 승부를 걸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김일이 일본에서 역도산 스승의 사망 후, 자이언트 바바와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 귀국하자 국내 프로레슬링 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두 거물이 대립하면서 선수들도 양분되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장영철의 경우, 거물급 외국 레슬러를 데려올 수 있는 김일의 얼굴에 기대보려 했다는 주장과 함께 김일은 장영철이 거느리고 있던 국내 선수들을 흡수해 ‘세 늘리기’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둘 간의 타협의 길이 열릴 뻔 했으나, 65년 12월 4일 김일이, 창덕궁에 합숙소를 마련하고 천규덕, 우기환, 안학수, 조경수 등 장영철 휘하의 대부분의 선수들을 포섭, 트레이닝에 들어가자 ‘1127 사건’ 이후 협상 분위기는 완전히 깨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박송남과 함께 뒤늦게 김일 도장에 들어갔던 조경수가 다시 장영철에게 돌아가려 한 것이 김일과 장영철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되어버렸다고 한다.
둘 사이의 불화는 그 누가 중재에 나서도 풀리지 않을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 후로 김일은 외국 무대에서 승승장구 하였고, 장영철은 국내 무대에서 ‘2인자’ 들의 대결에서만 빛을 좀 보내다가 2년 후인 68년 9월, 1년 6개월 만에 귀국한 김일 측이 화해의 손을 뻗었다. 한국 프로레슬링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목적으로 1년 6개월 만의 귀국을 결심한 김일은 사전 합의 된 장영철 과의 대결에서 ‘맹장 수술’을 이유로 시합에 불참하겠다는 장영철의 태도에 표정이 어두워 졌다고 한다. 레슬링 협회가 발 벗고 나서 두 파의 통합을 이루려 했고, 한국 챔피언 결정전에서 장영철이 김일 파의 2인자인 천규덕을 물리침으로써 사태는 일단 수습된 듯 보였다. 하지만, 김일 측은 자신의 국제적 네임 밸류와 외국 프로모터에게 통하는 루트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점을 내세워 ‘장영철 도미 계획’을 제시했다고 했지만, 협회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맹장 수술을 이유로 경기에 불참한다는 장영철의 태도는 바로 ‘김일을 아직도 불신하고 있기 때문’ 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공식적으로 발표 된 ‘양대 산맥’ 간의 갈등은 이 정도에서 정리된다.
이날까지도 장영철-김일의 정식 화해는 이루어 지지 못한 채 두 사람은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 들었고, 두 사람이 한국 레슬링에 끼친 지대한 영향 -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모두 - 이젠 수평선 넘어 떨어지는 석양으로 밖엔 인식되지 않고 있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고 우리나라 ‘쇼 (Show)의 역사’는 이런 비 경기적인 요소들로 인해 끝을 보게 됐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거인’의 손에 의해서 하루 아침에 떠 오른 한국 프로레슬링, 그 똑 같은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이젠 사라져 버린 역사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