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의 화려한 레슬링 경력을 논하면서 그의 스승이자 ‘아시아 레슬링의 전설’ 역도산 (일본명 ? 모모다)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50년대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역도산 때문에 김일은 레슬러의 꿈을 키웠고, 역도산 덕분에 레슬링에 대한 본격적인 조련을 받게 되었고, 역도산에 의해서 레슬링 스타 김일로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칠순이 훨씬 넘은 김일이 지금까지도 역도산을 ‘선생님’이라 깍듯이 부르며 그에 대한 회고에 젖을 땐 아직도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면, 역도산 없는 레슬러 김일의 인생은 상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한 역도산 (본명: 김신락)은 16세 떄 스모 제패의 꿈을 안고 일본을 향하게 된다. 2차 대전 직전에 프로레슬러로 변신하여 패전의 아픔을 달래던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희망을 주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호탕한 제스츄어와 파워 넘치는 ‘카라데 촙’ (당수) 공격으로 역도산은 일본 레슬링의 독보적 자리를 굳게 지켰으나, 63년 12월 7일, 한 연회석상에서 ‘무라다’ 라고 하는 청년의 칼을 맞고 1주일 뒤인 12월 15일, 일본인 처 ‘게이코’ 사이에 2남2녀를 뒤로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한국인 본처 소생의 딸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짐). 역도산 피살 사건을 놓고 ‘한국인 피가 흐르는 역도산을 시기한 야쿠자의 일원이 그를 살해했다.’ 라는 소문도 무성했고, 사실 그의 죽음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도 (김일 노컷 인터뷰 참조) 존재하지만 역도산의 전설 역시 일본 땅에선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고결하게 간직 되어가고 있다. 동경 외에도 일본 시모노세끼 시의 ‘광명사’란 곳에 역도산의 동상이 올라가 있고, 오무라 시에 있는 그의 묘소는 일본인 ‘헤이이’ 부부에 의해 보존되고 있음이 그를 증명해 준다.
역도산의 산하엔 소위 ‘4대 천왕’ 이라는 수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자이언트 바바, 오오키 긴다로, 안토니오 이노끼, 맘모스 스즈끼’ 가 바로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같은 한국인인 오오키 긴다로 (김일)에 대한 역도산의 관심과 애착은 남달랐고, 김일의 레슬링 인생에 끼친 역도산의 영향은 그 무엇보다도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김일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나아가서는 한국 프로 레를링의 심벌이었던 ‘박치기’를 김일의 머리에 심어준 장본인이 바로 역도산이었다. 한국인 특유의 강단과 ‘터프함’ 을 상징해 줄 수 있는 무기로서 ‘박치기’를 고안해낸 역도산은 그 후, 김일의 이마를 단련시키기 위해 혹독한 트레이닝을 시켰다고 한다. 김일의 앞 머리를 ‘단련시키기’ 위해 머리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가마니에 비벼대게 했고, 10미터 밖에서 거목이나 석벽에 달려들어 헤딩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김일에 대한 역도산의 사랑은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4명의 ‘특급 문하생’ 중에서 김일에 대한 훈련과 평가는 유독 모질었다고 한다. 김일에게는 특히나 매를 자주 들었고 김일 앞에서는 한국말도 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 김일과 함께 했던 에피소드 하나만으로도 ‘일본인 속의 한국 피’를 나누고 있던 그들 둘만이 각별한 애정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노컷 인터뷰 참조).
김일이 미국 원정길에 올라 첫 세계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들은 역도산 피살 사건의 비보는 아마도 184cm, 140kg의 거구 김일의 인생 중 가장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평생동안 존경하며 모시고 있던 스승이 쓰러진 소식을 듣고도 태평양 건너 떨어져 있는 김일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밤 전화로 그의 병세를 물어보는 것 밖에 없었다. 경기 일정이 잡혀 있었고, 칼에 찔린 후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으며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만을 접했던 김일. 1주일 후 갑작스럽게 ‘역도산 사망’ 이란 얘기를 들었을 땐 어쩌면 김일의 레슬링 운명은 ‘새로운 기로’로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승을 묻고 10년 가까운 세월 끝에 모국의 땅을 밟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제2의 전성기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