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일이란 인간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프로레슬러… 이름만 들어도 그 얼마나 살벌한 직종인가? 실제 프로레슬러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체구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앞서 김일의 ‘링 캐리어’ (Ring Career)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이젠 그의 이면을 보도록 하자.. 링 위에서는 대포알 같은 박치기를 보여주는 김일이지만, 링을 내려온 김일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부분을 파헤쳐 본다. 김일이 과연 링 바깥에서 어떻게 선행을 베풀었고, 김일의 가족들은 김일을 아버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김일은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들을 어떻게 공경했는지…등, 레슬러는 괴물 같이 포장되던 시절의 ‘인간 김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 남모르는 선행

 김일이 링 밖에서 하는 선행들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김일이 의도적으로 남몰래 선행을 베풀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김일이 하는 선행들은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선행들로 보여진다. 요즘 일부 연예인 매니저가 등 떠밀어 방문하는 ‘고아원 우정 출연’이 아닌. 기껏해야 연말연시 때나 가끔 가다가, '증거 사진' 하나 찍기 위해서 불우시설 등을 찾는, 그런 '보이기 위한 선행'과는 차원이 달랐다.

 1965년 한반도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극심한 상태였다. 해갈에 목 말라 하던 농촌지역을 위해서 김일은 양수기 50대를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가뭄지역에 기증하기도 했다. 1978년 7월 30일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구호용 라면 2백상자(당시 싯가 50여만원 상당)를 강남구청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엔, 자신에게 들어온 성금의 일부를 '자신보다 더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다시 내놓기도 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때는 1994년. 사형 선고를 받은 한 사형수가 '죽기 전에 꼭 김일을 돕고 싶다'며 교도소에서 한푼 두푼 모아 보낸 성금 1백만원에 감동한 김일은, '이 돈은 받을 수 없는 돈'이라며 끝내 거부를 하고, 후에 '김일을 위한 자선바자회'등에서 들어온 돈 200만원을 전국의 교도소에서 수감중인 사형수들과 시각 장애인들에게 쾌척하기도 하였다.

 프로레슬링에 대한 선입견… 지방에서 덩치 좀 크고 주먹 꽤나 쓴다는 ‘준 조폭’ 또는 ‘양아치’ 들이나 하는 운동이라고 하던 레슬링의 대가의 모습은 어쩌면 링 밖에서 더 위대했는지도 모른다. 60-70년대 김일이 누리던 국민적 지지의 원천은 바로 이런 김일의 ‘타고 난 히어로이즘 (heroism)’ 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본인보다 약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하는 그의 심성 때문에, 그리고 김일 역시 스타로써의 생명력은 팬들의 따뜻한 성원뿐이란 점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한때나마 ‘대통령보다도 더 유명한’ 인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 김일의 가족

김일의 가족은 '레슬링 가족'이다. 동생 김광식씨, 장남 김수안씨, 사위 강성용씨 등 일가족 4명이 모두 링 위에서 '뼈대가 굵은' 집안이다. 역도산과 그의 아들이 '레슬러 부자지간'인 것처럼, 김일도 마찬가지로 2대가 레슬러였던, 레슬러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김일은 가정에서 자녀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한없이 가정적이고 다정다감스런 성격으로 가족들을 대했다고 한다. 김일의 둘째딸 김순희씨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선수로 활동하시던 시절엔, 1년에 많아야 2달 정도만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시는 아버지였지만, 같이 있으실 때만큼은 저희들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가정적인 아버지이세요. 저희들이 어질러 놓은 물건들은 언제나 손수 꼼꼼히 치워주시는 분이지요. 딸들이 부끄러워할 정도의 잔 일까지 흐뭇해 하시면서 구석구석 찾아 다니며 하시거든요….제가 별로 밖으로 나다니지 않기 때문에 옷이 없고, 간소한 편이에요. 그래서 한 사흘 정도를 같은 옷만 입고 다니면, '넌 도대체 여자가 왜 그 모양이냐고 막 화를 내시기까지 해요…. 미국 같은 곳에 가시면 선물로 모자나 가방 같은 것들을 사서 보내세요. '미국 여성들은 모자나 가방을 애용한다. 요즘은 이런 것이 유행인 것 같더라'라는 편지까지 함께 부쳐서 말이죠. 얼마 전 텍사스쪽에 시합을 가셨을 때는, 아주 차양이 긴, 큰 모자를 보내셨더라고요. '요즘 텍사스에서 유행이니 너도 한번 써보렴' 이란 편지도 함께요. 그래서 얼마나 웃었는데요."

 (이상 1970년 8월 12일자 '주간 여성'지에서 발췌)

 


김일은 자녀에게 자상한 아버지였고, 부모님들에게도 효심 깊은 아들이었다.

 선수 시절, 해외원정 말고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이라도,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밤 늦게 귀가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밤늦게,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김일은 어머니 (선처자 씨)가 계신 방으로 가서 꼭 인사를 드렸다. 김일의 어머님도 이 인사를 받아야 잠이 드셨고, 김일도 이 인사를 해야만 잠을 청했다고 한다.


 백척거구 김일도 어머님의 말씀에는 절대 거역을 못했다. 1969년도는 어머님께서 회갑이 되시는 해였다. 김일은 마음속으로 성대한 회갑잔치를 준비하고,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지만, 김일은 어머니에게 꾸중만 들었다. (상상이 가는가? 김일 선수가 꾸중 듣는 모습이? ^^;) 차라리 그 잔칫돈으로 어머님의 고향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 전기나 가설하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그 길로 곧바로 전기를 놓아 주었다고 한다.


피로 범벅이 된 김일의 얼굴을 보면서 자상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는 생각을 한 위인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일의 ‘다른 모습’을 지켜 보면서, 천하의 김일에게도 ‘약한 구석’이 있다는 점을 깨우치며 인간적인 교감이 형성 된다. 언제나 힘에 부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김일. 언제나 속 시원한 박치기를 갈겨대며 우리의 스트레스를 해소 시켜줄 것 같았던 김일. 그런 그이기에 어쩌면 팬들의 외면 이 더 가슴 아팠을지도 모른다. 김일은 어려움에 빠진 주윗사람을 외면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김일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

  1. PROLOGUE

    김일의 이름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는 점이 마음 아프다.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명예의 전당’에 떳떳하게 올라 있어야 마땅하다.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수 많은 섬 중에 하나인 ‘후추도’에 꽂힐 ‘깃발’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연말, 모든 언...
    Views14539
    Read More
  2. 김일 The Wrestler

    필자가 태어난 해는 1968년 초 겨울이었다. 최대한으로 멀리 옛 기억을 되짚어 보더라도 72-3년 이 전으론 특별한 추억 거리, 특히나 레슬링과 관련 된 추억 거리가 없다. 아마 김일의 모습을 TV로 처음 접했던 시기도 그 때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검은 색 타...
    Views12329
    Read More
  3. 역도산의 그림자

    김일의 화려한 레슬링 경력을 논하면서 그의 스승이자 ‘아시아 레슬링의 전설’ 역도산 (일본명 ? 모모다)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50년대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역도산 때문에 김일은 레슬러의 꿈을 키웠고, 역도산 덕분에 레슬링에 대한 본격적인 조...
    Views9135
    Read More
  4. 세계 속의 김일

    김일이 귀국하면서 국내 레슬링의 전반적인 기량 향상, 결국엔 팬 동원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전까지 보아왔던 국내 레슬링의 수준과 김일이 선사했던 기량의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무엇보다도 김일이 존재했던 국내 레슬링 ...
    Views8364
    Read More
  5. ‘쇼 (Show)의 변천사’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 수원, 대전을 거쳐 부산에 정착한 ‘장용길’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당시 부산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시장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동아 체육관’에서 아마츄어 레슬러의 꿈을 키우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던 이 ...
    Views8289
    Read More
  6. No Image

    ‘Show vs. No Show’

    말귀를 알아들었을 때부터 레슬링을 보기 시작한 필자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어느 농구 팀을 제일 좋아하냐?” 또는 “누가 이길 것 같냐?’ 등의 질문도 아니다. “야, 레슬링 무슨 재미로 보냐? 순~ 쑌데!” 바로 이 질문이다. 필자 평생 처...
    Views7420
    Read More
  7. 김일과 사람들

    김일과 사람들 안토니오 이노끼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끼…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라이벌이자 선, 후배, 그리고 동료였다. 이 두 ‘거함’의 격돌을 목격했던 독자라면, 당시 둘 사이에 존재했던 (최소한 표면 위로의) 라이벌 의식은 ‘왕정치 - 나가시마’, ‘알...
    Views11772
    Read More
  8. 김일이란 인간

    프로레슬러… 이름만 들어도 그 얼마나 살벌한 직종인가? 실제 프로레슬러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체구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앞서 김일의 ‘링 캐리어’ (Ring Career)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이젠 그의 이면을 보도록 하자.. 링 위에서는...
    Views8773
    Read More
  9. 후추 노컷 인터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영등포에 위치한 이왕표 선수의 사무실… 약 10분 후엔 필자의 어린 시절 우상이자 한국 레슬링의 대부 - 김일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이왕표 선수와의 짧은 인터뷰가 진행되던 도중, 사무실 밖이 술렁이기 ...
    Views7872
    Read More
  10. No Image

    경기자료 및 그의육성

    클릭하시면 김일 선수의 시원스러운 경기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모든 장면은 gif 형식이므로 다운로드 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료를 제공해주신 김일 선수 은퇴식 추진본부의 송수연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김일 경기자료 1 (경기 장면 보기 72...
    Views7971
    Read More
  11. EPILOGUE

    지금도 김일의 박치기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홍 코오나~~ 인따나쇼날 참피오온~~ 김~~일~~~!!!” 지금도 김일의 최근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매진다. “여러분들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배출해 낸 수 많은 월드 스타들 중에서 김일 만...
    Views7500
    Read More
  12. 후추 명전 메모리

    김일 선생의 명전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은 좀 색다르다. 후추에서 명전에 대한 첫 구상을 했던 작년 5월 경기도 양평의 어느 작은 콘도 방... 그때 바로 명전의 3대 선정 방향이 골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1. 여론에 의해 매장된 스타들의 명예 회복...
    Views7805
    Read More
  13. 쓸쓸한 영웅의 은퇴식

    잔치는 화려했으나 쓸쓸함은 감출 수 없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늘 쓸쓸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박치기 영웅이었기에 병든 채 링을 떠나는 뒷모습은 더욱 쓸쓸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안트 바바, 저 이렇게 셋이 역도산 선생 제자였는데, 역도산 선생...
    Views10638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