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세계 속의 김일

by 운영자 posted Jan 18,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김일이 귀국하면서 국내 레슬링의 전반적인 기량 향상, 결국엔 팬 동원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전까지 보아왔던 국내 레슬링의 수준과 김일이 선사했던 기량의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무엇보다도 김일이 존재했던 국내 레슬링 무대에는 세계적인 레슬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이 당시 세게 강대국 중 하나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아니, 김일이 상대했던 세계적인 레슬러들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길래 김일이 ‘오라면 와서’ 당시 생소한 서울 땅에서 이마가 찢겨져 나갔던 것이었나?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지만, 60년대 프로레슬링의 ‘메카’는 역시 미국, ‘아메리카’ 였다. 그 당시 미국에선 프로 복싱의 인기 역시 절정에 달하고 있었는데, 복싱 쪽엔 WBA와 WBC 라는 두개의 국제 단체가 양립해 있었고, 플로이드 패터슨, 소니 리스톤, 캐시어스 클레이 (무하마드 알리) 등의 굵직한 슈퍼스타들이 호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반면에 프로레슬링은 크게 3개의 단체가 있었지만, 그 밑으론 지역별로 여러 군소 타이틀이 있었다. 그 이유는, 프로복싱은 단체 별로 11개의 체급이 있어 각 체급마다 챔피언이 있었고 흥행 기회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지만, 레슬링은 헤비급 - 주니어 헤비급 정도로 나뉘어 있어 타이틀 수가 현저히 적었기 때문에 여러 지역 타이틀로서 이를 만회하려는 계산이었다.


 미국 프로레슬링의 3개 단체는 WWA (World Wrestling Association), NWA (National Wrestling Association - 80년대 CNN의 테드 터너 사장이 인수), WWWF (World Wide Wrestling Federation - 현 WWF의 전신) 로 나뉘어 진다. WWA 같은 경우 프로 복싱의 WBA와 비슷한 역사와 수준의 조직체였다. LA를 중심으로 서부 및 태평양 연안 지역에 살고 있는 동양 2세들의 입김을 강하게 받았고 당시 부회장으로 있던 일본인 2세 ‘모도’ (김일의 WWA 태그매치 파트너)가 매치 메이커로 활약, 동양 레슬러의 활약이 가장 활발했던 조직이었다. 역대 WWA 헤비급 챔피언 계보를 잠시 보자면, ‘프레디 블래시’ - ‘역도산’ - ‘블래시’ - ‘디스트로이어’ - ‘베아키트 라이트’ - ‘에드워드 카펜디어’ - ‘딕 아키스’ - ‘도요노보리’ - ‘ 보 파레스’ - ‘고릴라 몬순’ - ‘킬러 오스틴’ - ‘루 테스’- ‘마크 루인’…등으로 이어지는 세계적 스타들의 격전지 였다.


 WWA 외에도 NWA (세인트 루이스를 중심으로 한 중, 서부 - 현재는 조지아 주에 주재), WWWF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중심으로 한 동부 - 현재는 동부 코네티컷 주에 주재) 등의 레슬링 협회가 그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던 ‘국제 무대’는 WWA 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국제 수준급 4각의 링 안에서 김일이 WWA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놓고 도전했거나 방어했던 (3차 방어까지 성공) 스타들은 과연 누구였는지 살펴 본다.



 루 테즈

명실공히 WWA가 배출했던 최고의 스타이자 미국 레슬링 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기민한 동작, 풍부한 링 경험과 ‘루 테즈의 백 드롭’ (상대 레슬러의 등 뒤로 올라가 등어리를 잡고 업어치는 기술)으로 불리우던 ‘전매 특허 기술’로 한 때 세계 레슬링 계에서 ‘루 테즈의 백드롭, 칼 곳치의 저먼 수플렉스’ 라고 할 정도로 레슬링 무대에선 신화적인 기술의 소유자로 인정 받고 있다. 현재까지도 WWA 회장 자리를 지키며 미 서부 지역 레슬링 재건에 힘을 쏟고 있고, 동양 권에서 루 테즈를 모르는 레슬링 팬은 없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다. 킬러 오스틴을 물리치고 WWA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올랐지만, 머지 않아 도전자 마크 루인에 1-2로 패하면서 벨트를 넘겨주게 되었다. 65년 미국에서 김일과 가졌던 처음이자 마지막 WWA 타이틀 전에선 관중들이 던진 의자에 맞고 머리가 찢어진 김일을 상대로 폴승을 거두었고, 이 밖에도 루 테즈 - 김일이 맺어온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레슬러의 우정’은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지난 95년 4월 2일 일본 도쿄 돔에서 열렸던 김일 은퇴식에는 루 테즈 회장이 휠체어에 앉은 김일을 손수 밀면서 링까지 보조했다.



 마크 루인

1967년 4월 29일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개최되었던 WWA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서 김일에게 벨트를 넘겨 준 마크 루인은 당시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 이라고 했던 루 테즈를 2-1로 꺾은 신흥 강자였다. 뉴욕 주 태생으로 위스콘신 대학 시절 미국 아마츄어 레슬링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루 테즈를 ‘슬리퍼 홀드’ 라는 목 (기도) 조르기 기술로 실신 시켰다는 출중한 힘과 기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마크 루인의 ‘슬리퍼 홀드’가 이제는 레슬링 계에서 어느 정도 보편화 되었고, 고인이 된 애드리언 아도니스가 한때 ‘굿나잇 아이린’ 이란 슬리퍼 홀드 변형 기술을 선 보이기도 하게 되었지만, 당시 국내에선 ‘슬리퍼 홀드’ 자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김일조차 불안해 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선 보인 첫 세계 헤비급 타이틀 전에서 김일은 마크 루인에게 2-1로 승리하고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WWA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프레디 블래시

WWA 초대 챔피언이자 당시 유일하게 2회에 거쳐 챔피언 벨트를 획득한 프레디 블래시는 얼마 전까지도 스타 TV에서 방영했던 WWF 광고에 등장했던 (WWF Attitude 시리즈 중 - 지팡이를 들고 객석에서 관전하는 모습의 원로 “Today, I cheer for them..” 이란 마지막 멘트까지) 국내 레슬링 팬들에게도 익숙한 인물일 것이다. 80년 대 후반까지 ‘빅 존 스터드’, ‘레이 더 크리플러 스티븐스’, ‘릭 플레어’ 등의 매니저로서 WWF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블래시의 현역 시절은 WWA 무대에서 꽃을 피웠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반칙왕’ 중의 하나로 손 꼽힌 블래시의 주 특기는 ‘물어 뜯기’ 였다. 경기 전 줄로 이빨을 날카롭게 갈고 링에 올라 거리낌 없이 상대 선수의 얼굴을 물어 뜯고 유혈이 낭자한 상대의 얼굴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는 망측한 인물로서 역도산 역시 경기 도중 블래시의 ‘이빨 반칙’에 당해서 그를 지켜보던 한 일본인 시청자가 ‘쇼크 사’ 했다는 후문도 있다. 71년 7월 12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김일과 블래시의 격전 역시 양 자간의 ‘피 바다’를 방불케 하는 혈전 끝에 김일의 2-1 폴승으로 끝이 났다.



 보보 브라질

72년 12월 6일 장충체육관.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의 사망이후 8년 만에 한국인 김일이 도전한 인터내셔날 헤비급 챔피언은 바로 ‘검은 그림자’ 보보 브라질이었다. 역도산 이후로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 등의 세계적 스타들이 챔피언 자리에 오른 인터내셔날 챔피언 벨트는 당시 185cm, 140kg의 흑인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 보보 브라질이 쥐고 있던 상황. 김일은 1차전에서 보보 브라질의 흉기로 얻어 맞아 1승을 내 줬지만, 2,3차전에서 강력한 보디 프레스와 새우등 꺾기 기술로 브라질을 제압했다.


 김일이 국제 무대에서 상대한 세계적인 스타들은 이들 외에도 헤아릴 수 없다. 도리 펑크, 니스라우스 즈비스코, 마이크 디비아시, 타이거 마스크, 미스터 아토믹…등, 세계 레슬링 계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강호들과 맞붙어 힘을 겨뤘다. 필자가 이렇게 많은 레슬링 스타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김일이란 레슬러를 평 할 때, 어쩌면 그가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전해줬던 숱한 감동, 드라마, 그리고 사회적 의미 등에만 눈이 멀어, 레슬링 계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던 그의 레슬링 실력 - 비록 그것이 ‘연기’ 실력이든 ‘각색’ 실력이든 국내를 제외한 세계의 레슬링 계가 인정했던 그의 실력이 혹시나 과소 평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우리나라 출신의 한 농구인이 한 때 NBA의 전설 빌 러셀, 윌트 챔버레인, 밥 쿠지, 제리 웨스트..등의 농구 영웅들과 함께 코트를 누빈 적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쯤 ‘국민 훈장’ 이란 훈장은 모조리 싹쓸이 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위인전이 출판 되어도 십 수개는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김일에겐 그런 영광을 돌려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그 이유는 뭘까? 레슬링은 결국 ‘쇼 (Show) 떠는 것’ 이니 그들의 땀은 가치가 없어서? 그들은 그 ‘쇼 (Show)’ 를 하기 위해 다른 스포츠 인만큼의 체력 훈련이나 정신력 훈련을 안 할 것 같아서? 이 자체가 바로 ‘제일 우스운 쇼 (Show)’ 가 아니고 뭔가? 그런 논리라면, 한국이란 나라도 잘 모르던 60대 초반, 세계적인 ‘쇼 (Show) 꾼’ 들과 어울려 제일 그 짓을 잘 했던 한국인에게 최소 ‘예술상’이나 ‘연기상’은 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 바로 세우기 어쩌구…’ 타령을 해대도 우리는 우리 역사나 문화적 뿌리를 찾는데 수준 이하다. 너무 빨리 끓어 오르고 너무 빨리 식어 버린다.



?

  1. PROLOGUE

    김일의 이름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는 점이 마음 아프다.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명예의 전당’에 떳떳하게 올라 있어야 마땅하다.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수 많은 섬 중에 하나인 ‘후추도’에 꽂힐 ‘깃발’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연말, 모든 언...
    Views14537
    Read More
  2. 김일 The Wrestler

    필자가 태어난 해는 1968년 초 겨울이었다. 최대한으로 멀리 옛 기억을 되짚어 보더라도 72-3년 이 전으론 특별한 추억 거리, 특히나 레슬링과 관련 된 추억 거리가 없다. 아마 김일의 모습을 TV로 처음 접했던 시기도 그 때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검은 색 타...
    Views12327
    Read More
  3. 역도산의 그림자

    김일의 화려한 레슬링 경력을 논하면서 그의 스승이자 ‘아시아 레슬링의 전설’ 역도산 (일본명 ? 모모다)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50년대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역도산 때문에 김일은 레슬러의 꿈을 키웠고, 역도산 덕분에 레슬링에 대한 본격적인 조...
    Views9133
    Read More
  4. 세계 속의 김일

    김일이 귀국하면서 국내 레슬링의 전반적인 기량 향상, 결국엔 팬 동원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전까지 보아왔던 국내 레슬링의 수준과 김일이 선사했던 기량의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무엇보다도 김일이 존재했던 국내 레슬링 ...
    Views8362
    Read More
  5. ‘쇼 (Show)의 변천사’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 수원, 대전을 거쳐 부산에 정착한 ‘장용길’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당시 부산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시장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동아 체육관’에서 아마츄어 레슬러의 꿈을 키우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던 이 ...
    Views8286
    Read More
  6. No Image

    ‘Show vs. No Show’

    말귀를 알아들었을 때부터 레슬링을 보기 시작한 필자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어느 농구 팀을 제일 좋아하냐?” 또는 “누가 이길 것 같냐?’ 등의 질문도 아니다. “야, 레슬링 무슨 재미로 보냐? 순~ 쑌데!” 바로 이 질문이다. 필자 평생 처...
    Views7417
    Read More
  7. 김일과 사람들

    김일과 사람들 안토니오 이노끼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끼…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라이벌이자 선, 후배, 그리고 동료였다. 이 두 ‘거함’의 격돌을 목격했던 독자라면, 당시 둘 사이에 존재했던 (최소한 표면 위로의) 라이벌 의식은 ‘왕정치 - 나가시마’, ‘알...
    Views11768
    Read More
  8. 김일이란 인간

    프로레슬러… 이름만 들어도 그 얼마나 살벌한 직종인가? 실제 프로레슬러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체구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앞서 김일의 ‘링 캐리어’ (Ring Career)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이젠 그의 이면을 보도록 하자.. 링 위에서는...
    Views8771
    Read More
  9. 후추 노컷 인터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영등포에 위치한 이왕표 선수의 사무실… 약 10분 후엔 필자의 어린 시절 우상이자 한국 레슬링의 대부 - 김일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이왕표 선수와의 짧은 인터뷰가 진행되던 도중, 사무실 밖이 술렁이기 ...
    Views7869
    Read More
  10. No Image

    경기자료 및 그의육성

    클릭하시면 김일 선수의 시원스러운 경기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모든 장면은 gif 형식이므로 다운로드 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료를 제공해주신 김일 선수 은퇴식 추진본부의 송수연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김일 경기자료 1 (경기 장면 보기 72...
    Views7968
    Read More
  11. EPILOGUE

    지금도 김일의 박치기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홍 코오나~~ 인따나쇼날 참피오온~~ 김~~일~~~!!!” 지금도 김일의 최근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매진다. “여러분들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배출해 낸 수 많은 월드 스타들 중에서 김일 만...
    Views7497
    Read More
  12. 후추 명전 메모리

    김일 선생의 명전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은 좀 색다르다. 후추에서 명전에 대한 첫 구상을 했던 작년 5월 경기도 양평의 어느 작은 콘도 방... 그때 바로 명전의 3대 선정 방향이 골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1. 여론에 의해 매장된 스타들의 명예 회복...
    Views7801
    Read More
  13. 쓸쓸한 영웅의 은퇴식

    잔치는 화려했으나 쓸쓸함은 감출 수 없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늘 쓸쓸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박치기 영웅이었기에 병든 채 링을 떠나는 뒷모습은 더욱 쓸쓸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안트 바바, 저 이렇게 셋이 역도산 선생 제자였는데, 역도산 선생...
    Views1063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