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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레슬러였던 김일 옹에게는 어린 시절 진돗개와 나눈 감동적 실화가 있다. 박삼중 스님이 일본을 오가며 김희로씨 석방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때였다. 스님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중 재일교포 여인으로부터 김일 선생이 3년 동안 도쿄의 적십자병원, 오사카 시립병원, 규슈의 나카무라 병원, 후쿠오카 시의 중촌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외로운 투병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스님은 한 시대의 영웅이었던 김일 선생을 만나고 싶어졌다고 한다. 스님은 199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 시의 중촌병원으로 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고 박삼중 스님은 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감동을 받는다. 그때의 상황은 박삼중 스님이 쓴 <이 몸을 어디에 쓸꼬>라는 책에 나오는 데 이 글을 살펴보자. 한때 김일 선수는 일본 후쿠오카의 나카무라 병원에 있었다. 그곳은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치료해주는 일종의 사회복지 병원이었다. 그는 왼쪽다리의 정맥이 막히는 심부정맥 혈전증과 고혈압에 시달리며 투병 중이었다. 병실은 거인인 그가 몸을 누이기엔 형편없이 좁았다. 적게 먹는 일본인에게 주어지는 병원 음식도 그에겐 턱없이 모자랐다. 그의 애처로운 모습과 달리 위로할 말을 못 찾던 나는 한 가지 물었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던 그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스님, 제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웃으실 지 모르겠지만, 진돗개 동상을 하나만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일제 강점기 시절, 그의 집에는 진돗개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순사가 그의 집을 지나치다 진돗개를 보고는 공출을 빌미로 빼앗아 갔다. 하지만, 그 개는 다음 날 아침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도망쳐 왔다. 기쁨도 잠시 성난 순사가 개를 찾으러 집에 왔는데 어린 김일은 그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박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는 다시 끌려갔고 그때 김일은 개를 위해 동상을 세워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뒤 50년이 지났는데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스님은 국내로 귀국하여 이 사실을 한국일보의 박정수 사회부장에게 전했다. 곧 한국에서는 스승 김일을 일본에서 데려와야 한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먼저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이 평생무료 치료를 자청하며 한 말이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우리의 꿈과 희망이었던 영웅을 일본 땅에서 쓸쓸히 사라져가게 할 수는 없다.” 삼성전자에서 1천만 원을 보내주고 각계의 온정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박삼중 스님에게 교화된 사형수는 평생 동안 모았다는 1백만 원을 치료비에 보태라고 보내주었다. 며칠 동안 호텔에 머물고 있던 김일 선생은 사형수 부모를 찾아가자고 했다. 선생은 그에게 받은 돈 1백만 원에 50만 원을 더 보태 사형수의 부모에게 주고 돌아왔었다. 일본 땅에서 쓸쓸히 투병하던 우리들의 영웅 1994년 1월 13일 김포공항으로 한 제자가 김일 선생 배웅을 나갔다. 비행기에서 박삼중 스님과 함께 김일 선생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 제자는 수척해진 선생님을 감싸 안았다. 곧장 한 제자가 선생님을 차에 모시고 타워호텔로 모시고 갔다. 김일 옹은 타워호텔에서 보름간 머물렀다. 그 제자는 근무시간이 끝나면 호텔의 스승이 계시는 방으로 찾아가 사제지간의 옛정을 나누었다. 한 때는 호랑이 보다 더 무서웠지만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 선생님도 많이 쇠약해져 계시었다. 선생을 위로해야 하는 그 제자는 너무 슬픔이 격해 화장실에 들어가 눈시울을 닦고 나오곤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일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탄하여 무엇을 선물로 받고 싶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선생은 고향에 전기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작은 몸으로 세계 레슬러를 쓰러뜨리며 승리해 국민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선생의 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김일 선생의 어머니가 자신의 회갑 잔치보다 고향 거금도에 전기가 들어오길 희망하자 소원대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런 선생의 선행에 조그만 온정이라도 보답하고 싶어 김일 선생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고향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우겠다고 나섰다. 진돗개 동상에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나의 어린 시절 강과 산을 뛰어 놀던 충직한 나의 친구 진돗개여! 일본 군대의 군용 방한복을 만든다는 이유로 죽음의 다리로 끌려가던 그 모습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의 친구 진돗개는 일본 순사에 끌려 개 죽이는 다리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떠났는데 한 시간 후 그 곳을 탈출하여 나에게로 돌아와 뛰면서 그렇게도 반가워하며 내 품에 안겼습니다. 나는 내 친구 진돗개의 목에 줄을 걸어 죽음의 길로 보냈건만 그는 나를 영원한 주인으로 알고 반가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인간은 서로를 배반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있어도 충견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섬긴다는 옛말이 새삼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또다시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나의 친구 진돗개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그 일은 한없이 울고 심지어는 나와 우리 민족 모두의 한과 비애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 그 시절 비명에 간 나의 친구 아니 우리 모두의 친구 진돗개의 슬픈 눈물을 생각하며 다시는 이 땅에 풀 한 포기 개 한 마리라도 외세에 희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길 바라면서 이 작은 비석을 그에게 바칩니다. 1994년 10월 3일 전 NWA 인터내셔널 헤비급 세계 챔피언 면민들이 한푼 두푼 돈을 모았고 1994년 10월에 공덕비가 세워졌다. 공덕비 옆에는 선생의 동상 대신 진돗개 상을 세워진 것이다. 스승 역도산을 만나 세계적인 프로레슬러로 성장
무역선이 오사카에 닿자 김일은 일본 경찰에 잡혀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김일은 1년을 형무소에서 보내다 역도산 선수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한다. 1957년 역도산 선수의 보증으로 형무소에서 풀려 나와 도쿄의 역도산 체육관 문하생 1기로 입문한다. 1958년 12월 일본에서 ‘오오키 긴다로’라는 닉네임으로 역사적인 데뷔전을 가졌다. 1963년 12월 10일 일본의 ‘모도’ 선수와 WWA 태그 타이틀 도전권을 획득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WWA 세계 태그 챔피언을 획득한 12월 15일 스승 역도산은 일본인 야쿠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났다. 김일 선수가 스승 역도산보다 더 큰 선수로 성장한 건, 가난을 이기고자 이국 땅 일본으로 역도산 선수를 찾아가 레슬링을 배우려는 절박감에서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스승 역도산을 잃고 그 아픔을 레슬링 경기로 승화시켜, 초인적인 집념과 의지력으로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김일 선수는 전 세계 헤비급 1위 ‘킬러 카부 콕스’와 결전 중, 병에 이마를 맞아 24바늘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1964년 미국 텍사스 아모레에서 노스 아메리카 태그 챔피언에 올랐다. 1964년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도전권 리그전을 미국 텍사스 시스톤에서 치렀다. 1965년 8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극동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했다. 1966년 일본 도쿄에서 올아시아 태그 챔피언에 오른다. 또 1967년 4월 2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마크 루인을 2 : 1로 겪고 WWA 제23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1968년 서울에서 킬러 오스틴을 겪고 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했다. 프로 통산 10년만에 주 4∼5회 평균 경기를 치른 결과 1500회의 경기를 돌파했다. 1969년 11월 김일 선수가 보유했던 통산 타이틀은 WWA 태그 및 싱글 챔피언, 미 로키 마운틴 챔피언, 극동 헤비급 챔피언, 아시아 태그 챔피언,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등 8개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서 미스터 아토믹을 물리치고 7차 방어에 성공했다. 국민들에게 스포츠로 용기를 심어준 '박치기 왕' 다시 김일 선수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자. 일본에서 인터내셔널 헤비급 타이틀 초대 챔피언 역도산 사망 후 8년 만인 1972년 12월 6일 박치기의 명수 챔피언 보보 브라질에게 2 : 1로 역전승하여 타이틀을 거머쥔다. 이 인터내셔널 헤비급 타이틀은 루 테즈, 자이언트 바바, 보보 브라질 등 세계 강호들이 챔피언에 올랐던 권위와 명성이 드높았다. 1974년 11월 같은 역도산 문하생인 NWA 챔피언 ‘안토니오 이노끼’와 대결에서 경기 무제한의 단판 승부에서 분패하였다. 1975년 3월 다시 프로 레슬링 오픈 시리즈에서 이노끼와 재격돌하여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점점 국내 프로레슬링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제5공화국의 박정희 정권이 조국 근대화를 앞세운 새마을 운동을 한참 펼칠 때였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궁핍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새벽이면 일어나 ‘잘 살아보세’를 부르며 밤을 세워가면서 부지런함을 무기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축하한 가장 큰 이유는 황소 만한 몸집의 미국 선수나 일본 선수를 작은 몸집의 김일 선수가 경기에서 이겨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용기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6년 국내 최초로 금성사가 흑백텔레비전을 개발하여 판매한 가격은 6만8350원으로 쌀 20가마를 사는 돈이었다. 10년 후인 1976년 6월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로 컬러텔레비전을 개발하여 보급한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국내 텔레비전의 홍보 효과는 김일 선수가 가장 큰 공로자인 것이다. 이 시절은 한 마을에 텔레비전이 한두 대 보급되던 때였다. 김일 선수가 펼치는 경기를 보기 위해서 서민들은 더 부지런히 일하여 텔레비전을 장만했다. 이 고단한 국민들에게 레슬링 경기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용기를 심어준 스포츠요, 용광로였다. 어린 시절 꿈과 용기를 심어준 고향의 큰어른 김일 옹의 부음을 접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사시다 가시는 고인께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시길 고개 숙여 빌면서 이 글을 선생님의 영전에 받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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