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은 내 주무기로 머리를 단련시켰다. 재떨이·골프채 등에 맞아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64년 내가 미국서 챔피언 되던날, 선생은 일본서 운명을 달리했다.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함경도출신인 그는 몸집이 크다는 이유 때문에 일본까지 끌려왔다. 처음에는 스모 선수로 이름을 얻었다. 스모계에서는 요코즈나 바로 다음의 2인자인 세키와케까지 올랐다. 하지만 「일본인이 아니면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그는 미련없이 스모판을 떠났다.
레슬링으로 전향한 역도산에게는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58년 전설적인 철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루 테즈를 꺾고 세계챔피언이 됐다. 그가 레슬링으로 이름을 날리자 일본인들은 스모영웅과 유도영웅들을 뽑아 역도산에 대적하려 했다. 유도 영웅 기무라 마사히코가 역도산에게 도전장을 냈다가 피투성이가 돼 링을 떠났고 요코즈나를 지냈던 아즈마 후지도 링 위에 올랐으나 역도산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역도산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 죽지 않는 호걸이었다. 미국인 레슬러 부르저와의 대결은 유명하다. 미국 원정길에 술집에서 부르저를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엄지손가락으로 콜라병을 따서 갈기갈기 찢은 뒤 역도산에게 던졌다. 역도산은 컵을 들어 이빨로 깨서 씹어 삼켜버렸다. 그만큼 화통한 사람이었다.
당시 역도산의 제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역도산 밑에서 운동을 하던 선수들이 많긴 했지만 제자는 아니었다. 내가 온뒤로 1년뒤 선생이 브라질에 이민가 있던 안토니오 이노키와 시골구석에 처박혀있던 자이언트 바바를 데려왔다. 그는 훈련도중에는 용서가 없었다. 그가 배로 한번 얼굴을 누르면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마치 강력한 고무포로 얼굴을 덮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뭉그러진 왼쪽 귀는 그때 얻은 「훈장」이다.
59년쯤 나는 프로무대에 올랐다. 링위에 오르면 오로지 이겨야겠다는 생각뿐. 그러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링위에 서면 내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를 눈여겨보시던 선생은 내게 박치기를 해보라고 했다. 누구나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머리를 단련시키기 위한 훈련을 시켰다. 재떨이로 머리를 치기도 하고 골프채로 이마를 단련시켰다. 하루도 머리가 성할날이 없었다.
그는 내게 이름도 지어줬다. 오키 긴타로(大 金太郞). 긴타로는 전설속의 주인공으로 소문난 장사를 뜻하는 말이다. 64년 드디어 챔피언에 도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선생은 출국 전날 긴자에서 내게 술을 사주며 잘하고 돌아오라고 했다. 그것이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내가 일본을 떠난 뒤 선생은 술집에서 무라다라는 건달의 칼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때 나는 링위에서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모토와 조를 이뤄 랩 마스터를 꺾고 감격의 테그챔피언이 된 후에야 선생의 소식을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입국마저 거부당했다.
일본 체류기간동안 신원보증을 섰던 역도산이 죽었으니 이제 들어오지 못한다는 설명. 분통이 터졌다. 결국 나는 스승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정리·최병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