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 모지랑이
아주 가끔씩 빛바랜 앨범을 들추어 보면,
많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 찍은 흑백사진들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그런 사진 중에 압권인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큰 누나의 결혼기념으로 우리 5남매가 당시의 쇠머리 우리 집 마당에서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면 지금도 웃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가 두 무릎 부분이 동그랗게 기워진 바지를 입은 동생이 맨 앞자리의자에 앉았는데 그 기워진 부분이 너무나도 잘 클로즈업되어 있기 때문이다. 형님과 나는 중․고교 교복을 입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4학년인 동생은 그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누나들과 형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온 몸에 힘을 주고 앉아 있는 폼이라니!
당시의 우리는 설빔이라고 설에나 새 옷을 입어 봤을까 그 외에는 새 옷을 얻어 입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초등하교 입학식 때? 한 학년 올라가서 첫 등교 시? 확실한 기억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옷을 얻어 입었을까?
요즘 옷들은(유아복, 학생복, 등산복, 스키복, 골프웨어 심지어 속내의까지 등등) 디자인도 독특하지만 기능도 여러 가지로 뛰어나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입을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그 당시 겨울에는 나일론 점퍼(속에는 스펀지를 넣음)에 골덴바지면 최고였고, 여름에는 런닝셔츠에 반바지면 전부였다.
그리고 옷을 자주 갈아입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밖에서 뛰어노는 놀이 자체가 온몸으로 때우는 일인지라 옷이 무척이나 잘 닳아졌다.
그러기에 그 옷이 닳아지면 기워 입고, 또 닳아지면 또 기워 입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우리의 몸뚱이는 말없이 자라 어느 땐가는 옷이 작아져서 입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그 옷은 당연히 밑의 동생이 물려 입게 되니 그런 옷이 어련하랴!
요즘 직장에서는 ‘나눔의 문화’라고 하여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수집하여 불우이웃을 돕고 있는 단체에 기증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일 년에 3~4차례나 있는 행사라 나도 이제는 가져다 낼 물건이 없을 정도인데 수집된 그 물건들을 보면 하나같이 새것이다.
물론 팔아서 돈사야 하기도 하고 다시 써야 하는 물건들이기에 망가지거나 더러워진 것은 가져 올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요즘의 생활실태가 그렇게 풍족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옷을 예로 들어보면 요즘 사람들은 옷이 닳아져서 못 입은 것이 아니라 유행에 뒤쳐져 안 입을 뿐이다. 하기야 옷의 품질이 좋아 잘 닳아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식이라야 달랑 아들 하나 딸 하나이니 물려 줄 사람도 없다.
각설하고.
우리 집 살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선풍기다.
1981년,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해 여름에 구입한 대한전선에서 만든 날개만 빼고는 쇠로 만들어진 아주 튼튼한 선풍기.
지금도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 에어컨을 켜기에는 조금은 죄스러운 더운 여름날에 우리는 그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는 것이다.
지금은 소비가 미덕이라지만 아껴 쓰는 것이 미덕이었던 우리가 어렸을 적.
솥이나 냄비를 오래 써서 구멍이 나면 잘 보관하고 있다가 ‘구멍 난 솥이나 냄비 때워!’하고 외치면서 일 년에 한두 번씩 나타나는 떠돌이 땜장이에게서 그것들을 때워서 썼으며, 머리 부분이 다 닳은 수저로 누룽지를 벅벅 긁어 숭늉을 만들었고, 아침마다 일어나 모지랑비로 마당을 빡빡 쓸었던 기억들을 더듬으며 ‘달창나다’와 ‘모지랑이’를 소개한다.
물론 그것들이 더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낡아지면 엿과 바꿔 먹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달창나다 - ①물건을 오래 써서 닳아 해지거나 구멍이 뚫리다. ②많던 물건을 조금씩 써서 없어지게 되다.
모지랑이 - 오래 써서 끝이 닳아 떨어진 물건. (모지랑갈퀴, 모지랑비, 모지랑숟가락 등등으로 쓰임)
올 여름이 얼마나 더웠으면
위에서 설명한 선풍기가 나의 사무실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날개 연결고리가 끊어졌는데 도저히 연결이 불가능하단다.
쇳덩이도 오래 쓰면 낡는다는 진리 앞에
우리 몸을 소중히 다뤄야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