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2)(h4)
금년의 추석은 2.4 째주 토요일이 휴무인 내게 계획된 추석절을 보낼 수 있는 비교적 긴 5일간의 연휴였다.
그래서 추석 당일의 성묘는 물론이고 감성돔 낚시, 돌아가신 은사님에게의 성묘, 적대봉 등산,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내가 초등학교 6년을 다녔던 쇠머리에서 궁전으로 넘어가는 재(쇠머리재)를 넘어가 봐야겠다고 계
획했다. 그리고 만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연휴 첫째 날.
괜히 마음이 설레어 빨리 출발하자고 아침부터 설쳤다. 거금도닷컴에 들러 이제 출발한다며 고향에서 만나자
는 인사를 남기고 우리가 차를 출발시킨 시간이 8시. 12시 쯤에 신촌 처가에 도착했는데 동네에 사람이 없다.
다들 거금도 농협의 하나로마트개장기념으로 농협에서 주최한 농업인축제에 참석한 것이다. 어차피 많은 사람
을 만나 보기로 계획한 나로서는 오늘이 좋은 기회였다. 옷을 갈아 입고 축제장소인 금산중학교로 향했다.
오후 2시부터 언제든지 연락만 하면 반갑게 맞아주는 상하촌의 충일이와의 쐬주잔을 시작으로 하여 중학교 정
문앞 김일식당에서 무려 5시간을 버티고 마셨으니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곳을 다녀가고 인사하고 술
잔을 권했을까?
밤이 되자 운동장의 특설무대는 KBC방송국에서 주최한 노래자랑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관중이 만원이
다.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서서 노래자랑을 구경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술좌석은 우리 초
등학교 동창생들만 남아서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다. 그러고 있으려니 같은 동창이자 손위 처남인 양호가 나
를 찾는다. 어머니(나의 장모님)께서 대형 티브이를 경품으로 받았다는데 자식들로서 그냥 있을 수가 있겠냐구
의견을 구한다. 마다 할 내가 아니지. 그래 이럴 때 장모님 한번 띄워 주시자. 우리는 맥주를 박스째 사 들고
장모님이 앉아 구경하고 계시는 객석으로 들어가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 다들 노래자랑에 심취해
있는데 갑자기 병 따는 소리, 술 권하는 소리로 약간은 소란스러웠는지 방송국 관계자가 와서 자중을 구한다.
그래 자중 해야지. 그러나 여보시요. 지금 이 자리는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 자리이지 당신들 자리는 아니지
않소. 생방송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편집할 것인데 어르신들 신나게 술 한잔씩 권하는 것이 진행에 무슨 지장
이 있느냐고 나무라고는 가져간 술이 바닥 날 때까지 우리는 술을 따라야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쓴 밀짚
모자가 카메라를 방해한 모양이었다.
낮에 낚시 때문에 만나지 못한 병옥이가 밤 11시에 신촌으로 찾아왔다. 나는 어떻게 술자리가 끝났는지 모르
지만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6시에 기상했다.
둘째 날.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낚시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어제의 숙취로 낚시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 낚시는 내일로
연기하고 오늘은 산으로 가자. 처남 부부와 우리부부 넷이서 적대봉을 향했다.
적대봉! 이번이 네번째의 산행인가? 10년 전인가(그 때 초등학교도 안 다녔던 둘째처남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 놈이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맞는 것 같다) 집사람과 함께 억새가 우거진 산을 찾은 것이 첫 번째이고 내 평생을
잊지 못할 두번째의 산행은 장인어른 제사를 모신 다음 날 처남인 양호와 함께 일출을 보고자 적대봉을 찾았을
때인 2003년 6월 29일 이라고 나의 산행일지에 적혀 있다. 새벽 3시 50분에 집에서 출발하여 4시 15분부터
파생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정상에 도착하니 5시 20분. 비록 조금 늦어 정상에서의 일출은 보지 못하였지만
그 날 우리가 정상에서 보았던 그 신비한 비경은 나의 얉은 필력으로는 어떻게 묘사해 볼 수도 없는 멋진 광경이
었다.
그 날.
적대봉을 중심으로 하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구름띠가 둥그렇게 평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의 눈에 펼쳐
지는 우리 거금도의 아름다운 모습과 섬을 둘러 싸고 있는 구름띠 안의 바다의 윤슬(아침이나 오후에 태양 빛
에 반사한 바다나 호수의 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현상)과 거금도를 중심으로 하여 점점이 떠 있는 섬들(나라도,
시산도, 허우도, 충도, 금당도, 연홍도, 소록도 및 이름 모를), 아침바다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바다안개는 풍
남면의 바다바위 절벽을 스멀스멀 기어 오르고. 아 또 있다! 그 구름들 위로 뾰쪽하게 얼굴만 내밀고 있는 9개
의 산봉우리들.
바로 우리가 앉아 있는 적대봉의 정상이 우주의 한 중심이 된 것이다.
이 신비스러운 광경에 우리는 한참을 취한 듯 바라볼 수 밖에. 이제 우리는 그 산봉우리를 세기 시작한다.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그리고 제암산, 광주의 무등산, 화순의 모후산, 순천의 조계산, 고흥의 팔
영산, 광양의 백운산! 맞게 헤아렸는지 틀렸는지는 모르지만 전남의 산은 설렵했다고 자부하는 나의 느낌과 봉
우리의 위치로 보아 감히 맞았다고는 자부하지만 과연 그러한 산들이 평소에도 이 곳 적대봉에서 보이는지에 대
하여는 자신할 수 없다.
그 날 이후 나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어김없이 적대봉을 찾았고 지난 1월 1일의 일출을 적대봉에서 맞이하였으며
또 내년의 일출도 적대봉에서 맞을 생각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우리가 보았던 그 광경을 거금팔경에서 말하는
積臺歸雲 혹은 積臺起雲도 아닌 또 다른 積臺氣雲이라고 생각하며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적대봉의 등산로 초입인 파상재.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는지 차량이 한 대 주차되어 있다.
금장으로 넘어가는 임도의 공사가 한창일 때의 어느 날 새벽에 공사사실을 모르고 손전등도 없이 왔다가 등산로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메다가 발길을 돌렸던 기억과 지난 해 추석 때 적대봉의 일출을 보고자 새
벽에 혼자 여기까지 와서 차의 트렁크를 열었는데 내 등산화는 없고 마눌님 등산화만 2컬레가 있어 황당해 하
며 산행을 포기하고 혼자 금산일주도로를 자동차 드라이브만 했던 기억이 난다.
조금 오르니 약수터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금의회원들의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면서 시원하게 약수를 마시고 되
돌아 오는 길에 주변의 쓰레기를 정리하였다.
조금 더 오르니 돌로 정성들여 쌓은 소원탑이 있다. 아까 성치에서 차로 파상재로 올라갈 때 예전에 볼 수 없었
던 무엇인가가 보였는데 그게 바로 새로 쌓은 소원탑이다.
우리 거금도와 소록도를 잇는 연도교공사가 차질없이 진행되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다음에는 딸랑구와 내가 준
비중인 시험도 내년에는 꼭 합격하게 해 달라고 또 오늘 저녁부터 가족끼리 있을 고스톱에서 지지 않게 해 달라
고 빌었는데 정말 효험이 있었는지 그날 저녁부터 어제까지 5전 전승으로 지난해 장인어른 제사 때에 구겨졌던
고스톱의 자존심을 살릴 수 있었다. 그 때에는 앞으로 10만원을 내게 주면서 같이 좀 하자고 사정하면 모를까
여기 처가 집에서는 절대로 고스톱을 안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마당목치.
능선 안부에 도착하니 처남부부가 저만치 가고 있다. 처남은 테니스로 몸을 다듬고 처남댁은 날마다 뒷 산을 오
르고 하여 도저히 산행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따를 수 없다. 같이 팔영산엘 올랐을 때도 우리의 가방을 그네들
이 메고 갔을 정도이다.
올 1월의 일출 산행은 길이 험했는데 금의회의 노력으로 등산로가 말끔하게 정비되어 또 한번 금의회원에게 감
사하는 마음으로 정상을 향한다.
정상!
정상에 올라가 가져온 캔 맥주로 목을 축이며 쉬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올라 왔다. 석교가 고향이며 금산초교
49회. 현재는 고흥군청에 근무하고 있단다.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친구가 될 수 있고 가족이 될 수 있는 그래
서 산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은 맥주를 하나 건네주며 거금도닷컴을 아느냐고 물었다. 자주 들르는 곳
이란다. 간단히 우리의 소개를 하고 그 곳에서 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같이 하산하여 헤어졌는데 우리네 삶의 가
교역할을 해 주고 있는 거금도닷컴에 새삼 감사드린다.
그날 오후.
내가 태어나고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쇠머리엘 들렀다.
미리 동생이 벌초를 해 놓은 조상님들의 산소 및 엄마의 산소를 먼발치로 둘러보고 나는 등산화 끈을 조이고
지팡이를 펴 들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쇠머리에서부터 궁전까지의 길을 가 볼 요량이다.
신작로가 나기 전까지는 우리네 조상님들, 부모님들이 몇 십년 동안을 걸어 다니셨던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6
년을 다녔던 길인지라 비록 잡초가 우거지고 나무들이 가로 막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길의 형태는 유지되고 있
었다.
어렵지 않게 쇠머리재에 올라섰다.
당시에는 분명히 땅콩을 재배했던 우춘이 성네 밭이 나무로 우거져 있다. 계속 길을 따라 가니 알수 없는 사람
들의 묘가 많이 나타난다. 누구의 묘인지를 알아야 인사를 하던지 할 것인데 알 수가 없다. 새삼 흘러간 세월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날씨마져 흐린 해질녘의 산행인지라 조금은 으스스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고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만 알아
도 그렇지 않을 것인데 몇 십년 동안을 사람의 왕래가 없는 길을 혼자 걸으니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이 길을 와 보랴 하는 마음으로 계속 길을 따라가다 보니 내쳐 궁전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되돌아 갈 차를
두고 왔기에 궁전마을이 눈 앞에 바라다 보이는 바람고지에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렸다.
금년의 추석은 2.4 째주 토요일이 휴무인 내게 계획된 추석절을 보낼 수 있는 비교적 긴 5일간의 연휴였다.
그래서 추석 당일의 성묘는 물론이고 감성돔 낚시, 돌아가신 은사님에게의 성묘, 적대봉 등산,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내가 초등학교 6년을 다녔던 쇠머리에서 궁전으로 넘어가는 재(쇠머리재)를 넘어가 봐야겠다고 계
획했다. 그리고 만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연휴 첫째 날.
괜히 마음이 설레어 빨리 출발하자고 아침부터 설쳤다. 거금도닷컴에 들러 이제 출발한다며 고향에서 만나자
는 인사를 남기고 우리가 차를 출발시킨 시간이 8시. 12시 쯤에 신촌 처가에 도착했는데 동네에 사람이 없다.
다들 거금도 농협의 하나로마트개장기념으로 농협에서 주최한 농업인축제에 참석한 것이다. 어차피 많은 사람
을 만나 보기로 계획한 나로서는 오늘이 좋은 기회였다. 옷을 갈아 입고 축제장소인 금산중학교로 향했다.
오후 2시부터 언제든지 연락만 하면 반갑게 맞아주는 상하촌의 충일이와의 쐬주잔을 시작으로 하여 중학교 정
문앞 김일식당에서 무려 5시간을 버티고 마셨으니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곳을 다녀가고 인사하고 술
잔을 권했을까?
밤이 되자 운동장의 특설무대는 KBC방송국에서 주최한 노래자랑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관중이 만원이
다.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서서 노래자랑을 구경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술좌석은 우리 초
등학교 동창생들만 남아서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다. 그러고 있으려니 같은 동창이자 손위 처남인 양호가 나
를 찾는다. 어머니(나의 장모님)께서 대형 티브이를 경품으로 받았다는데 자식들로서 그냥 있을 수가 있겠냐구
의견을 구한다. 마다 할 내가 아니지. 그래 이럴 때 장모님 한번 띄워 주시자. 우리는 맥주를 박스째 사 들고
장모님이 앉아 구경하고 계시는 객석으로 들어가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 다들 노래자랑에 심취해
있는데 갑자기 병 따는 소리, 술 권하는 소리로 약간은 소란스러웠는지 방송국 관계자가 와서 자중을 구한다.
그래 자중 해야지. 그러나 여보시요. 지금 이 자리는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 자리이지 당신들 자리는 아니지
않소. 생방송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편집할 것인데 어르신들 신나게 술 한잔씩 권하는 것이 진행에 무슨 지장
이 있느냐고 나무라고는 가져간 술이 바닥 날 때까지 우리는 술을 따라야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쓴 밀짚
모자가 카메라를 방해한 모양이었다.
낮에 낚시 때문에 만나지 못한 병옥이가 밤 11시에 신촌으로 찾아왔다. 나는 어떻게 술자리가 끝났는지 모르
지만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6시에 기상했다.
둘째 날.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낚시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어제의 숙취로 낚시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 낚시는 내일로
연기하고 오늘은 산으로 가자. 처남 부부와 우리부부 넷이서 적대봉을 향했다.
적대봉! 이번이 네번째의 산행인가? 10년 전인가(그 때 초등학교도 안 다녔던 둘째처남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 놈이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맞는 것 같다) 집사람과 함께 억새가 우거진 산을 찾은 것이 첫 번째이고 내 평생을
잊지 못할 두번째의 산행은 장인어른 제사를 모신 다음 날 처남인 양호와 함께 일출을 보고자 적대봉을 찾았을
때인 2003년 6월 29일 이라고 나의 산행일지에 적혀 있다. 새벽 3시 50분에 집에서 출발하여 4시 15분부터
파생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정상에 도착하니 5시 20분. 비록 조금 늦어 정상에서의 일출은 보지 못하였지만
그 날 우리가 정상에서 보았던 그 신비한 비경은 나의 얉은 필력으로는 어떻게 묘사해 볼 수도 없는 멋진 광경이
었다.
그 날.
적대봉을 중심으로 하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구름띠가 둥그렇게 평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의 눈에 펼쳐
지는 우리 거금도의 아름다운 모습과 섬을 둘러 싸고 있는 구름띠 안의 바다의 윤슬(아침이나 오후에 태양 빛
에 반사한 바다나 호수의 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현상)과 거금도를 중심으로 하여 점점이 떠 있는 섬들(나라도,
시산도, 허우도, 충도, 금당도, 연홍도, 소록도 및 이름 모를), 아침바다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바다안개는 풍
남면의 바다바위 절벽을 스멀스멀 기어 오르고. 아 또 있다! 그 구름들 위로 뾰쪽하게 얼굴만 내밀고 있는 9개
의 산봉우리들.
바로 우리가 앉아 있는 적대봉의 정상이 우주의 한 중심이 된 것이다.
이 신비스러운 광경에 우리는 한참을 취한 듯 바라볼 수 밖에. 이제 우리는 그 산봉우리를 세기 시작한다.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그리고 제암산, 광주의 무등산, 화순의 모후산, 순천의 조계산, 고흥의 팔
영산, 광양의 백운산! 맞게 헤아렸는지 틀렸는지는 모르지만 전남의 산은 설렵했다고 자부하는 나의 느낌과 봉
우리의 위치로 보아 감히 맞았다고는 자부하지만 과연 그러한 산들이 평소에도 이 곳 적대봉에서 보이는지에 대
하여는 자신할 수 없다.
그 날 이후 나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어김없이 적대봉을 찾았고 지난 1월 1일의 일출을 적대봉에서 맞이하였으며
또 내년의 일출도 적대봉에서 맞을 생각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우리가 보았던 그 광경을 거금팔경에서 말하는
積臺歸雲 혹은 積臺起雲도 아닌 또 다른 積臺氣雲이라고 생각하며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적대봉의 등산로 초입인 파상재.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는지 차량이 한 대 주차되어 있다.
금장으로 넘어가는 임도의 공사가 한창일 때의 어느 날 새벽에 공사사실을 모르고 손전등도 없이 왔다가 등산로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메다가 발길을 돌렸던 기억과 지난 해 추석 때 적대봉의 일출을 보고자 새
벽에 혼자 여기까지 와서 차의 트렁크를 열었는데 내 등산화는 없고 마눌님 등산화만 2컬레가 있어 황당해 하
며 산행을 포기하고 혼자 금산일주도로를 자동차 드라이브만 했던 기억이 난다.
조금 오르니 약수터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금의회원들의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면서 시원하게 약수를 마시고 되
돌아 오는 길에 주변의 쓰레기를 정리하였다.
조금 더 오르니 돌로 정성들여 쌓은 소원탑이 있다. 아까 성치에서 차로 파상재로 올라갈 때 예전에 볼 수 없었
던 무엇인가가 보였는데 그게 바로 새로 쌓은 소원탑이다.
우리 거금도와 소록도를 잇는 연도교공사가 차질없이 진행되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다음에는 딸랑구와 내가 준
비중인 시험도 내년에는 꼭 합격하게 해 달라고 또 오늘 저녁부터 가족끼리 있을 고스톱에서 지지 않게 해 달라
고 빌었는데 정말 효험이 있었는지 그날 저녁부터 어제까지 5전 전승으로 지난해 장인어른 제사 때에 구겨졌던
고스톱의 자존심을 살릴 수 있었다. 그 때에는 앞으로 10만원을 내게 주면서 같이 좀 하자고 사정하면 모를까
여기 처가 집에서는 절대로 고스톱을 안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마당목치.
능선 안부에 도착하니 처남부부가 저만치 가고 있다. 처남은 테니스로 몸을 다듬고 처남댁은 날마다 뒷 산을 오
르고 하여 도저히 산행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따를 수 없다. 같이 팔영산엘 올랐을 때도 우리의 가방을 그네들
이 메고 갔을 정도이다.
올 1월의 일출 산행은 길이 험했는데 금의회의 노력으로 등산로가 말끔하게 정비되어 또 한번 금의회원에게 감
사하는 마음으로 정상을 향한다.
정상!
정상에 올라가 가져온 캔 맥주로 목을 축이며 쉬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올라 왔다. 석교가 고향이며 금산초교
49회. 현재는 고흥군청에 근무하고 있단다.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친구가 될 수 있고 가족이 될 수 있는 그래
서 산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은 맥주를 하나 건네주며 거금도닷컴을 아느냐고 물었다. 자주 들르는 곳
이란다. 간단히 우리의 소개를 하고 그 곳에서 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같이 하산하여 헤어졌는데 우리네 삶의 가
교역할을 해 주고 있는 거금도닷컴에 새삼 감사드린다.
그날 오후.
내가 태어나고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쇠머리엘 들렀다.
미리 동생이 벌초를 해 놓은 조상님들의 산소 및 엄마의 산소를 먼발치로 둘러보고 나는 등산화 끈을 조이고
지팡이를 펴 들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쇠머리에서부터 궁전까지의 길을 가 볼 요량이다.
신작로가 나기 전까지는 우리네 조상님들, 부모님들이 몇 십년 동안을 걸어 다니셨던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6
년을 다녔던 길인지라 비록 잡초가 우거지고 나무들이 가로 막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길의 형태는 유지되고 있
었다.
어렵지 않게 쇠머리재에 올라섰다.
당시에는 분명히 땅콩을 재배했던 우춘이 성네 밭이 나무로 우거져 있다. 계속 길을 따라 가니 알수 없는 사람
들의 묘가 많이 나타난다. 누구의 묘인지를 알아야 인사를 하던지 할 것인데 알 수가 없다. 새삼 흘러간 세월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날씨마져 흐린 해질녘의 산행인지라 조금은 으스스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고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만 알아
도 그렇지 않을 것인데 몇 십년 동안을 사람의 왕래가 없는 길을 혼자 걸으니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이 길을 와 보랴 하는 마음으로 계속 길을 따라가다 보니 내쳐 궁전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되돌아 갈 차를
두고 왔기에 궁전마을이 눈 앞에 바라다 보이는 바람고지에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중학교 다닐때 가보았는데 그때는 정상으로 안가고
적대봉 넘어 동백나무가 우거진 골짜기로 갔습죠
아직도 그 곳이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 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은 뚜렸하지 않지만 한마디로 그 곳은
천국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구름띠요
표현이 한마디로 끝내줍니다
우리는 어려서 학교에 갔다오면 소 찾으러 탱개박골로 갔거든요
그 곳에서 일 몰을 보고 있으면 내 짧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표현이
어려웠었는데......
좋은 글 잘읽고 제2탄으로 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