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때의 정월 대보름에는 우리의 사물패가 각 집마다의 마당, 큰 방, 부엌, 마루 등에서 풍악을 치며 잡귀를 쫒아냈다. 우리는 그 뒤를 신나게 따라다니는데 그 날은 동네의 잔치날이다. 그 사물패의 상쇄가 순채 할아버지였는데 꽹과리로 사물패를 리더하다가 나팔을 신나게 불어 재끼시곤 하고, 또 어떤 때는 머리에 쓴 상모를 이리저리 멋있게 돌리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홱 쳐들면 상모에 매달린 끈이 마치 살 아있는 듯 뻣뻣이 서게 하는 기막힌 연기를 연출하시곤 하셨다. 모두의 노력과 기능이 서로 조화되어 한 판의 재밌 는 농악이 연주되겠지만 그 한 가운데에서 그 것을 지휘하는 상쇄의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된다 할 수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한의 상쇄의 최고자는 그 분이신것 같다. 또 당시에는 식량증산이 국가의 기본이라 그에 걸 맞는 경기 등이 개최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쟁기질시합이다. 각 부락마다 최고의 소와 최고의 일꾼을 출전시키는데 우리 쇠머리에서는 순호 아버지가 대표로 나오시곤 하셨다. 일정한 면적의 논을 일정한 깊이로 갈아엎는 시합이었는데 이제는 트랙터, 콤바인 등의 농기구 때문에 볼 수 없는 그 때만의 추억이다. 해태의 생산이 주수입원이었던 쇠머리의 여름은 여자들은 발장치기, 남자들은 새나꾸꼬기로 바쁘다. 지난 가을에 추수했던 볏집을 거풀은 다 솎아내고 실한 것으로만 손에 쥐기 좋게 한 주먹씩 가지런히 묶어 놓았다가 우리집 새 나꾸 꼬는 날이 되면 그 묶음들에 물을 적당히 적시어(물 축인다고 함)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나팔모양의 입구에 정확히 꽂아 넣는 길남이 아버지에게 계속 공급해 줘야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으나 오늘은 그래도 덕분에 쌀 밥 먹는 날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제는 나이론에 밀려 짚으로 꼰 새나꾸를 구경조차 할 수 없 으니 길남이 아버지는 그 기계를 어떻게 처분했을까. 그리고 발장 잘 치기로는 정숙이 누나(김영필씨의 딸)가 최고 였던 것 같다. 위에서 잠깐 소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당시에 소는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 전답을 팔아야만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학을 우골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말은 시골사람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내려면 집안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를 팔아야 했던 것을 빗대어 만든 말이었다. 지금의 소야 우리들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는 소고기 정도로 밖에 인식이 안 되지만 그 때에는 농사일에도 필수적으로 소가 있어야 했지만 해 마다 한 마리씩 낳는 새끼가 더 중요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소중한 소를 잘 먹이는 일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일과의 하나였다. 이따금씩 어른들은 잡아 온 뱀(하사 종류)을 산 채로 풀에 넣어 자기네 소에게 먹이곤 하였지만 날마다 소를 먹이는 일은 우리들 어린 사람들 몫이었다. 그 때 소 먹이는 사람의 대장이 금술이 아제였던가? 여름이면 아침에 소를 먹였다가 불등의 그늘에 매어 놓았고 또 오후가 되면 소를 먹이려 간다. 먹을 것이 흔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소먹이꾼들은 당번을 정해 보리 같은 것을 볶아서 나눠 먹곤 했던 그 추억이 아련하다. 설 날은 우리 어린 사람에게는 최고의 날이었다. 그 날이 되면 몇 일간은 그 지긋 지긋한 해우를 안 뜨니까 발장 치를 일도 없고(이해를 할 사람은 하고 못할 사람은 못함) 우리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연을 신나게 날 릴 수 있고 또 많지는 않지만 약간의 세배 돈도 받을 수 있고. 고기와 떡꾹 그리고 쌀밥을 먹을 수도 있고, 아무튼 신나는 날이다. 우리 아버지도 섣 달 그믐이 되면 꼭 연을 세 개씩 만드셨다. 형, 나, 그리고 동생 것. 설날 아침이면 추위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갱본으로 달려 나가 연을 날리곤 하였는데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연은 아버지의 마음같이 그렇게 높이 높이 날아주지 못했다.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연을 만들곤 하였으나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연보다(는) 더 높이 날릴까 말까? 지금도 살아 있는 덴둥의 오동나무에는 우리가 날리다가 걸린 연이 찢어 진 채로 한겨울을 나곤 하였다. 이런 연 날리기는 기지 아제가 최고였던 듯 하다. 그 사람의 방패연은 하늘 높이 걸려 있는데 그림을 그려 놓은 듯 움직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갯가에서 문어 잡기는 초도네(채성이 엄마)가 최고였고, 달리기는 훈아 아제(춘식이는 다음 다음에 나타났음), 구슬치기는 해식이 성(목표하는 구슬을 향해 조정했다가 손에 있는 구슬을 탁 튕겨 내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는 그 환상적인 폼이여), 뜨거운 꾼 감재 먹기는 장용 성, 노래 잘 하기는 기봉 아제가 최고였으며, 젊은 우리와 가게에서 막걸리내기 삼봉치기는 기인 아제가 최고였고, 목소리 크기로는 길수 아제가 최고였고, 감샌낶기로는 평일이 아제도 잘 했지만 그래도 학모 성이 최고인 듯하고, 장기실력은 명순 아버지가 최고였고, 큰 기침소리는 도순 성 아버지 것이 최고였고 힘으로는 만순 아제가 최고였으며 놀고 먹는 데는 원일이가 최고였다. 그럼 나는 쇠머리에서 무엇이 최고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자존심 때문에라도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몇 가지를 밝힌다. 바둑도 내가 제일 잘 둘 것 같고, 퍼팩트를 기록한 볼링실력도 아직까지는 내가 제일일 듯 하다? 또한 어렸을 적 남 들이 다하는 수영도 마다하고 오로지 나 홀로 연마했던 공기놀이의 실력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다. 우리 아버지도 최고가 있었으니 그것은 술 드시는 일. 그것은 개인1위가 아닌 단체1위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동갑내기 술친구 삼총사가 계셨으니 이미 고인이 되신 김영찬씨(복용 성 아버지)와 멀리 이국만리인 캐나다로 이민가신 김영헌씨(원일이 아버지)가 그 분들이다. 나주에 계시는 아버지는 지금도 술 한잔에 취하시면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이신데 그렇게 못 해드리는 이유가 다 그 놈의 술 때문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원일이 아버지는 지금도 잘 계시는지? 덕분에 우리 삼형제는 지금도 술하면 빠지지는 않은 실력이다. 쇠머리의 추억은 계속됩니다. 혼자만의 기억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좋은 추억이 있으신 분은 댓글로 올려주시고 올리지 못하겠으면 저에게 멘트라도 주시면 당신의 이름으로 올려드리겠으니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ㆍ 우두(牛頭) : 마을의 지형(地形)이 소의 머리와 같이 생겼으므로 쇠머리라고 부르다가 한자를 訓借(훈차)하여 우두(牛頭)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4.10.06 19:01
쇠머리의 추억(우리부락 명인들)
조회 수 1605 추천 수 0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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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숙 2004.10.0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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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2004.10.07 01:57바지락 , 굴 따기는 영희가 또래중에선 최고였죠. 먹는 재미는 제쳐두고
바구니 한가득 바지락이 채워져가면 그 포만감을 오빤 모르실걸요? 다른 친구나 언니 동생들 바구니를 넘겨다 보며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구.
특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그런 날씨엔 바지락이 길게 눈을 뜨므로 그 눈을 찾아 캐다보면 어느새 바구니가 그들먹 해 지죠.
그러다가 바지락눈의 다섯배쯤 되는 큰 눈을 발견하게 되는 운수 좋은 날은 바구니 속엔 대합이 대장자리에 앉아 바지락들을 평정하게 되죠.
지금도 바닷가엘 가면 그때의 기억으로 바지락이 많이 살고 있을 곳을 쉽게 찾아내곤 한답니다. 그 일은 제게 일이 아닌 재미나는 놀이중의 하나였었어요. 무얼 하든지 일등을 해야 직성이 풀렸던 성미가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던것 같애요.
여자아이들이 전적으로 했던 일중의 하나가 산에 솔잎나무 긁으러 다니는 일이었는데 그일은 저희 작은 언니가 잘했어요.(연숙언니)
자기 몸집보다 3배쯤 커보이는 나무 바구니를 잘도 이고 왔죠. 작은언닌 어른이 되서야 그일을
후회 하더군요. 그래서 키가 안 자란거라고...ㅎㅎㅎ. 키가 안자란 것중의 또 한가지 원인은
저 때문이래요. 아기인 절 업어주는 일은 작은언니 담당이었대요. 그런데 저도 할말이 없는 건 아니죠. 아기때 제가 거의 우는 일이 없었대요.그래서 언니가 한번 업고 나가면 노는데 정신이 팔려
때가 두번 세번 지나도 애 젖먹이러를 오지않았대지 뭐예요. 그일을 가지고 언니네 부부랑
저희 부부가 입씨름을 하면 무승부로 끝이 난답니다.
오빠 저도 조금씩 기억을 찾아가고 있는거 맞죠? 잘하고 있나요?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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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2004.10.07 04:35후후. 다음 추억에는 나무하러 다녔던 이야기 쓸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았겠군.
'산에 솔잎나무 긁으러 다니는 일'은 '나무하러 간다'고 표현하는데 그걸 여자들만 했던 것은
아니야. 남자들도 수시로 다녔거든, 물론 남자들은 갈나무 보다는 낫과 괭이와 도끼를 들고
등걸나무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
남자들 중 갈나무를 제일 잘했던 사람은 창호 아버지시지.
어렸을 때 지금의 창호네 집뒤와 학모네 집(당시는 안용이네 집) 앞 사이에 길이 있었는데
창호네 집 뒤에는 항상 숯가리나무가 차고차곡 잘도 쟁여져 있었어. 또 등걸나무 잘하기는
글쎄. 기주 아제 쯤 됐을 것 같애. 길남이 집에 가면 항상 때기 좋게 잘게 쪼개진 그런 등걸
나무가 엄청 쟁여져 있었으니가.
어제 낮에 전화 정말 반가웠다.
딸랑구에게 혜숙이와 영희의 전화번호를 내 휴대폰에 입력해달라고 했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마눌님이 "이제 전국구로 뛰고 있네"하더라니까.ㅎㅎ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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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옥 2004.10.07 10:29철용아
자네 마누라의 "전국구" 표현은
내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 줄려고 해도 그렇지를 못할 것 같다.
뭐 "도둑이 제발..." 그런 말이 있지만 이것은 아주 공공연하게
내 김병옥을 지칭해서
광주에 있는 술 잘 마시는 친구도 무자게 성가신데
이젠 서울 사람들까지 불러 들여서 이집을
전국에 있는 금산 사람들의 집합장소로 만들려고 한다는
아주 心中에 있는 語弊가 분명하게 담긴 말씀이지만
내가 그래도 참기로 했다.
내가 아주 너그러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광주 생활이 6개월이나 남았는데
그런 말 듣고 나만 삐쳐 보아야 자네라도 끈이 떨어지면
나의 광주 생활만 삭막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내가 참는 것이다.
또 오늘 이만저만한 일로 시청에 까지 와서 점심을 산다고 하니
내가 속마음을 내색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어서 참기로 했으니
그리 알고 자중하기를 지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장본인인 자네 마누라는
자네가 알아서 적의 처리하기 바라네
그렇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고(그럴 친구도 아닌 것 같지만)
나에게 어폐가 담긴 말은 하지말라고 주의를 주게
만약 또 그런다면
1달에 1회정도 자네 집을 방문했었는데
이제는 월 2~3회로 횟수를 확대 개편하겠으며
내년 추석에는 자네 처가에 금년의 2배인 8번정도 가서
술상을 차리게 하겠다고 내가 그런다고 그러게
잘 알겠제 철용아
그리고 철용이는 좋겠다.
글만 올려 놓으면
얼굴 이쁘고 마음씨 고운 후배들이
경쟁적으로 꼬리 글을 달아주니
영희와 혜숙이는
내가 이번 참에 잘 알았으니
내 글이 올려 올때를 잘 살피시게
조금이라도 늦으면 서울가서 기어코 만나
적절한 혼쭐을 낼테니까 말이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쇠머리 사람들
오랬동안 행복하시게
(신촌에서 우두로 시집온 이모씨는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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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2004.10.07 22:10병옥 선배님!
내 생각으로는 이모씨를 빼버리면
안될것 같은데요 6개월 동안 광주에서
사실려면 이모씨한테 가장 많이 아부해야 될 것 같은데
괜히 내가 걱정이 되네 어찌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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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옥 2004.10.08 09:14후배
어제 서울로 올라와 집에서 잘 지내고 있다네
그런데
이모씨의 행복문제는
우두 출신인 남편이 행복하면
그 남편의 부인도 어느정도는 행복할테니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이 말을 해버려야 하겠네
신촌 출신들도 행복하시게
(궁전 옆 금당도가 마주 보이는 동네로 시집간 사람은 되도록이면 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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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2004.10.08 11:52빼고 또 빼고 따따블로 왕따 시켜불면
선배님 대문도 안열어 줄것 같은디
나 더 걱정되네요[괜한 걱정]
오랜만에 가족들과 즐겁게 Well- being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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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다 그렇게 저장해 놓앗다가 요로코롬 쏟아내실까?
한편의 드라마를 본것같다.
삼촌 계속 이어주세요.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