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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

[섬산화첩] 거금도 적대봉

by 물비늘 posted Oct 22, 2010

조선일보 월간 산 [474호] 2009.04

 

매서운 삭풍도 터지는 봄 꽃망울은 어쩌지 못하네

 

뭍에서는 아직 삭풍(朔風)이 마른 가지를 붙잡고 흔드는데, 남쪽 섬 거금도에는 벌써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고 한다. 오는 봄을 막으려고 움트는 나뭇가지를 꺾어버릴 수는 있어도, 터지는 꽃망울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한겨울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매화향(梅花香)에 취해 보려고 거금도로 봄을 찾아 나섰다. 봄은 뙈기밭 일구는 촌로(村老)의 무잠뱅이로부터 온다지만, 양지 밭 언덕에 홍매화 만발한 꽃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나물 캐는 아낙의 손등으로도 오는가 보다.

거금도(居金島)는 산과 바다를 잘 아우르고 있다. 바닷가를 벗어나면 잘 가꾸어진 논과 밭은 뭍이라는 착각에 빠져 들게 하고, 바닷가로 나서면 이곳이 어촌임을 느끼게 한다. 다른 섬들에 비해 비교적 넓은 농토와 바다의 풍부한 수산물이 많아서인지, 같은 전라도에서도 인심(人心)하면 고흥 인심이라고 하는 말은 거금도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 줄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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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금도의 봄 소식.


 

 

황소 잔등 같은 유순하고 밋밋한 섬. 그러나 막상 산으로 접어들면 울창한 숲과 옹골찬 암릉이 산행의 묘미를 한층 더해 주는 산. 그 섬 산에 여명이 밝아오면 해무가 걷히고 멀어져 보이던 작은 섬들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금산면은 산세가 비단처럼 곱고 부드럽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개의 유인도와 23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으며, 면사무소가 있는 거금도는 그 중 가장 큰 섬이다. 우리에게는 레슬러 김일의 고향 금산(錦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거금도 적대봉(592.2m)은 고흥 제일봉인 팔영산(608.6m) 다음으로 높은 산이며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산이다.

호수 같은 봄 바다를 헤치고 한과 설움의 슬픈 섬 소록도를 돌아 신평항에 도착한다. 대부분의 가족 단위 산행은 파성재(주차장)~마당목대~적대봉(2.6km :1시간30분)을 택한다. 우리는 오천리~남동릉~적대봉(봉화대)~북동릉~금산정사~동정~신평항(약10km : 5시간)코스를 걷기로 하고 오천리로 향했다.


등산로 입구엔 벌써 노란 민들레 피어

 

들목에 ‘적대봉’ 간판이 세워진 오천교회 옆 작은 등산로에는 노란 민들레가 봄을 알리고 매화향이 온 들판에 은은하다. 흰 매화꽃은 벌써 만개했고 홍매화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렸다. 겨울에 피는 붉은 동백꽃은 그리움에 멍든 가슴을 토해낸 것 같아 어딘가 애잔하다면, 매화꽃은 겨우내 움추렸다 순간적으로 터뜨리기에 더욱 화사하다. 짭조름한 갯내음과 은은한 매화향의 어울림은 이곳이 아니면 어디에서 그 멋과 향을 느낄 수가 있겠는가.

마늘밭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우리는 적대봉으로 올랐다. 오늘은 말 그대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봄 날씨다. 초입부터 이구 대장은 아예 웃옷을 벗어 배낭에 구겨 넣었다. 코흘리개였던 막내 여동생은 벌써 중년의 여인이 되어 이번 산행에 오빠를 따라나서지만 왠지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고향 산에서 이렇게 오빠랑 함께 산행을 하니 더욱 정감이 가고 의미가 깊네” 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마늘밭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니 초입부터 가파른 등산로는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게 한다.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15분쯤 오르면 오천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 좋은 암봉에 오르게 된다. 요즘 사진에 빠진 류수경 목사는 발아래 펼쳐진 그림 같은 전원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암봉에 서서 내려다본 오천마을은 농토가 넓은 어촌이라 평온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그곳에도 봄은 찾아오고 있다. 바닷가 어부들은 겨우내 발목 잡혔던 어선들을 손보며 출어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고, 마을 옆 들녘에는 농부의 손놀림이 바쁘다.

소나무와 도토리나무, 소사나무가 어우러져 터널을 이루고 있는 호젓한 능선 숲길을 따라 걸었다. 가끔씩 군락을 이룬 마른 억새 사이에 돋아난 푸른 새싹은 애써 봄을 알리려는 듯 고개를 삐죽 내민다. 돌 틈에서 꼭 움켜쥔 손으로 한겨울을 보낸 바위손은 이제 막 연녹색을 띠며 손바닥을 펴기 시작한다.

소사나무 가지에 적대봉 이정표가 삐딱하게 매달려 있다. 이곳부터는 다시 완만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오빠, 이 꽃 좀 봐. 너무 예쁘다.”

뒤따라오던 누이 영자가 마른 도토리 잎 사이로 비집고 나온 하얀 노루귀꽃을 발견하고는 너무 좋아 어린애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올 들어 처음 만난 산속 야생화라 더욱 귀엽고 예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보라색 노루귀꽃도 피어 있다. 보라색 꽃은 하얀색 수술이 워낙 또렷하여 마치 채색화처럼 예쁘다. 바로 옆에는 초의선사가 입었다는 우장풀도 꽃대를 피웠다. 홀아비바람꽃을 많이 닮았다.

조금 올라 조망 좋은 너럭바위에 서니 그림 같은 청석마을과 오천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마을은 동화 <의좋은 형제>에 나오는 그 마을처럼 느껴졌다. 청석마을은 집을 손가락으로 세어도 될 정도로 몇 안 되는 마을이지만 오천마을은 크고 부촌처럼 느껴졌다.

 

 

가꾸어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인 등산로들

가꾸어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인 등산로는 어릴 적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며 보리피리 꺾어 불던 그 산길 같아 친근감이 더하다. 바위틈에 자란 여린 진달래 가지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분홍빛 진달래 꽃잎은 목욕탕에서 막 나온 누이의 홍조 띤 얼굴처럼 맑고 곱다. 살며시 다가가 입맞춤했다.

한가로운 소사나무 숲길을 걸었다. 안부에 ‘상수원 보호구역’‘출입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다.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을 막아놓았다. 이곳에서 다시 가파르게 올라서는데 이번에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장관을 이룬다. 한 편의 시상(詩想)이라도 떠오를 법한 호젓한 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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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목재에서 바라본 적대봉.



‘적대봉 2.5km 청석 2km 오천 3.5km’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마친 후 평지나 다름없는 능선길을 조금 걷다 청석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쳤다. 작은 고개를 내려서니 아름드리 산벚꽃나무와 사철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비자나무가 여기에 합세하여 녹색 정글을 이루었다.

오천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너럭바위에 올라앉아 계곡을 내려다본다. 섬 속의 산중을 느꼈다. 계곡의 암반은 햇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빛났다.

‘홍연 관음사 500m, 홍연 1km’ 안내표시판이 매달려 있다. 홍연마을에서 적대봉을 오르는 것이 가장 빠른 코스다.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암봉에서 적대봉을 올려다보니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야 한다.  사진 몇 컷을 찍고 안부로 내려서는데 이구 대장이 벌써 건너편 능선길 절반을 오르고 있었다. 하기야 백두대간을 14번이나 종주했으니 이쯤이야 봄날 산보나온 기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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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봉에서 내려다본 오천마을.



소사나무 숲속 터널을 빠져나오니 정상 조금 아래 사람이 거처하던 움막으로 보이는 곳에 등산객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수북히 쌓였다. 왜들 이러는지. 우물도 파 놓고 정한수 떠 놓는 됫돌도 있는 것으로 보아 도를 닦는 사람 아니면 중병에 걸린 사람이 있었나 보다. 이 높은 곳에 물이 흐르는 샘이 있으니 움막을 치우고 샘을 잘 관리하면 물이 귀한 섬 산에서 여름날에는 목마른 사람들에게 요긴한 쉼터가 될 수 있겠다.

남서능과 이어진 능선으로 올라서니 적대봉 300m라고 표시되어 있다. 3주 전 1차 탐방 때 올랐던, 파성재에서 마당목재를 거쳐 적대봉으로 이어진 잡목 가시나무 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동릉은 숲과 암봉의 조망처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어 여름산행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도 봉래산, 장흥 천관산, 제암산 등 모습 눈에 들어

적대봉(積臺峰, 烽燧臺 : 592.9m)에 올라 고흥 특산물인 유자청주를 이 대장과 둘이서 한 잔씩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으로는 연륙교가 이어진 끝자락에 나로도 봉래산이 우뚝 솟았고, 남서쪽으로는 완도 금당산이 병풍으로 둘렀다. 장흥 천관산과 제암산에 이어 고흥 천등산과 마복산 등 남해를 끼고 이어지는 호남의 명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소록도와 연결 중인 거금대교는 2011년이면 완공된다고 하니 거금도도 뭍으로 변할 날이 머지않다. 건너편 소록도가 갑자기 한없이 큰 섬으로 내게 다가오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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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석인 독수리바위와 봉화대.




한과 설움으로 응어리진 채 93년을 바다에 외로이 떠 있던 소록도가 곧 육지와 연결이 된단다.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이 뭍이 그리워 피눈물을 흘렸기에 노을에 물든  바닷물이 저토록 붉게 끓어오를까. 한센인의 섬 소록도를 한하운은 ‘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중략>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겹도록 울다가는 청춘(靑春)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自殺)을 아끼는 것이오.

요즘처럼 생활이 고달프고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죽음을 한두 번쯤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거금도 적대봉에 올라 소록도를 건너다보며 한하운의 시를 읊노라면 그의 시구대로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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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 앞 바다와 거금대교.




봄이 와도 봄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지금의 생명 앞에 감사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살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진정 나의 신께 감사하며 살자. 꽃씨가 날아간 억새꽃 줄기는 빗자루 되어 하늘을 쓸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하늘은 맑고 노을은 더욱 붉다.

봉수대를 내려선다. 여기서 신평까지는 5.8km. 공허한 가슴을 끌어안고 동북능선을 따라 신평으로 내려선다. 이제는 한센인의 섬 소록도에도 봄이 오겠지.

넓적바위 너덜지대를 지나 아픈 상처만큼 조각난 독수리바위를 안고 돌아 기차바윗길을 내려서는데 자꾸 목이 메고 눈앞이 어른거렸다.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꺾어 금산정사가 있는 동정마을로 하산을 한다. 거금도 적대봉은 깊은 느낌을 주는 산이다.


/ 그림·글 곽원주  cafe.daum.net/ksejungart

 

발췌 : 월간 산 http://s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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