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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적대봉 안내 , 물만내 소개 , 사화랑 봉수대

by 운영자 posted Feb 28, 2003



94년 철선에서 바라본 적대봉 거금도에 솟아 있는 적대봉(積臺峰)은 마치 바다에 떠있는 고래등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산이다. 섬산이면서도 고흥군에서는 팔영산(八影山, 608.6m)다음으로 높은 적대봉은 펑퍼짐한 산세와 달리 전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완도, 남쪽으로 거문도 동쪽으로 여수 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 올 뿐만아니라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바라보인다 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때문에 적대봉 정상은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를 신속하게 전달해주는 봉수대는 둘레 약 34m, 직경 약 7m의 규모다.

적대봉 기슭은 또한 조선때 목장성(牧場城)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소록도, 절제도, 시산도, 나로도와 함께 도양(道陽)목장에 속한 속장(屬場)의 하나였던 거금도는 옛이름이 절이도(折爾島)로 적대봉을 중심으로 30리 길이의 성을 쌓아 말 116마리를 키웠던 세납 (稅納)목장으로 전한다.

거금도의 남북을 종단하여 석정리와 어전리를 잇는 임도 곳곳에 목장 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적대봉 일원은 예전 수림이 울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해안가의 방풍림만이 옛모습을 겨우 떠올릴 수 있게 하지만, 옛 문헌에 의하면 거금도는 조선시대 사복시 (司僕侍)에 속한 둔전(屯田)과 왕대산지가 있었고, 선재(船材)의 확보를 위해 벌채를 금지했을 정도로 질 좋은 나무가 많이 자랐던 곳으로 유명하다.


적대봉 주변의 해안 경관도 뛰어나다. 

섬의 동쪽 오천리는 해안선을 따라 조약돌이 널려있는 등,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또한 섬의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익금해수욕장은 수심 2∼3m속의 해산물이 보일 정도로 물이 맑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방풍림을 배경으로 길게 뻗은 은빛 백사장은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산행코스 : 성치마을 → 파상재 → 정상 → 파상재 → 송광암 → 중촌(5시간) 
산행기점인 성치마을은 신평선착장과 금진선착장을 잇는 도로 사이에 위치해 있다. 
신평선착장에서는 면소재지가 위치한 대흥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 성치마을 입구에서 내린다. 

금진선창으로 들어설 경우는 선착장에 대기중인 금산버스를 타고 용동까지 간 다음 용동에서 신평행 버스를 이용한다.

적대봉정상.jpg




적대봉 봉화대봉화는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이었다. 본 봉화대는 조선조 초기부터 전국 직봉 경로 제 5거(五炬) 돌산 방답진을 기점으로 남서 해안을 경유 한성을 잇는 요충지 주봉으로 전국에서도 유일하게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된 유적지이다. 적대봉 정상에 위치하고 봉수대는 조선중기에 신설된 것으로 사화랑 봉수로 추정되고 있다. 이 봉수대는 동으로는 발포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녹도진 봉수에 응하고 있으며 1502년(연산군8년) 8월 이우에 설치되어 1758년(영조34년)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며 적대봉은 592m 로 관내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정상에는 봉수대와 가을의 갈대가 절경이며 등반코스로도 유명하고 정상에선 다도해의 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화랑 봉수(沙火郞 烽燧)



이 봉수는 조선 중기에 신설된 6개 간봉중(間烽中) 사화랑 봉수로 비정된다. 현재 이들 간봉들은 대부분 유구나 지명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 비정은 곤란하다.
그러나 일부 유구가 남아 있는 곳이나 지명(봉화산, 망매산) 또는 봉화불을 피웠다고 전해져 오는 곳에 대한 현지 조사의 결과를 문헌기록과 대조해보면 어느 정도의 위치 비정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유구가 남아 있는 곳으로는 금산면 석정리 적대봉 봉수지(積台峰 烽燧址), 도화면 구암리 가인동(속칭 봉화골) 봉화산봉수지, 동일면 덕흥리 동산 봉수지, 봉래면 외초리 청석산 봉수지(靑石山 烽燧址), 영남면 우천리 우미산 봉수지(牛尾山 烽燧址)가 있으며, 지명(망매산)상 봉화터로 추정할 수 있는 곳으로는 도양읍 봉덕리 봉동 망매산, 풍양면 매곡리 망매산, 도화면 가화리 화옥망산이 있다.
또한 봉화불을 피웠다고 전해져오는 곳으로는 도양읍 봉암리 비봉산, 도화면 발포리 도제산, 동일면 덕흥리 상산, 봉래면 사양리 사양도, 봉래면 신금리 진터산, 영남면 금사리 사도진 뒷산 등이다. 한편<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6개의 간봉들의 응소지역은 다음과 같다.

지 지 명

연 간

응 소 지 역

《 세 종 실 록 지 리 지 》

1454년

북준 장흥 장기

《 동 국 여 지 승 람 》

1481

남응 유주산, 동응 마복산, 서응 장기산

《 동 국 여 지 지 》

1656

《 흥 양 지 》

1758

동응 마복산, 서응 장기산

《 여 지 도 서 》

1759

동응 마복산 봉수, 서응 장기산 봉수

《 대 동 지 지 》

1832

(원봉)

《 호 남 지 》

1925

동응 마복산, 서응 장기산



위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들 6개 간봉들은 녹도진(현 도양읍 봉암리)과 사도진(현 영남면 금사리 사도)사이에 위치하며, 소포 봉수를 제외한 5개 봉수의 위치는 녹도진과 발포진(현 도화면 발포리 성촌)사이로 압축된다. 이를 토대로 6개간봉 기록과 현존 유구 및 지형, 지명등을 대조하여 간봉들의 위치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화 봉수는 봉화터로 전해져 오고 있거니와 지명에서도 서로 일치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현 도화면 가회리 화옥의 망산이 분명하며, 가내포봉수는 「가인(佳人)」은 「가내(加乃)」의 전음(轉音)의 가능성이 크고, 포구로서 적합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봉화산에 현존하는 유구가 기록과 서로 일치하고 있는 점에서 도화면 구암리 가인동의 봉화산으로 비정된다. 또한 다고두 봉수는 봉수 기록외에도 다른 기록을 통해 위치비정이 가능한데 즉 연산군 3년(1497) 2월 25일에 발생한 녹도왜변, 동 3월의 돌산왜변, 연산군 5년(1499) 3월의 여도왜변의 영향으로 연산군 8년(1502) 8월 다고두보의 설치를 보게 된다. 이것은 선초 고흥포(풍양면 고옥리 축두)에 설치되어 있던 축두만호진 세종 17년(1435) 7월 소흘라량(所訖羅梁)을 거쳐 세종 21년(1439) 4월 발포로 옮겨 발포만호진이 설치됨에 따라 녹도진과 발포진 사이의 옛 축두만호진을 비롯한 그 주변일대는 방어상 취약지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고두 봉수는 이들 지역으로 들어서는 해안의 가입부에 위치하고 있는 풍양면 매곡리 망매산으로 비정된다.

이 점은 가화봉수에서 이 곳 망매산에 이르는 해안일대에 중종 18년(1523) 풍안평 백석포장성과 율현보성이 축성되는 점에서도 반증된다. 사화랑 봉수는 녹도와 발포양진과 상망(相望)의 거리에 있으며, 녹도에서 발포진에 이르는 해안뿐만 아니라 외양(外洋)을 모두 관망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금산면 석정리 적대봉으로 비정된다. 한편 흑지두 봉수는 도양읍 봉덕리 봉동의 망매산이나 도양읍 봉암리 비봉산으로, 소포응소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사화랑봉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지 지 명

연 간

응 소 지 역

《 신 증 동 국 여 지 승 람 》

1531년

서응가화, 동응소포

《 동 국 여 지 지 》

1656년

《 흥 양 지 》

1758년

금폐



위의 기록에 의하면 사화랑 봉수는 요망한 적변(賊變)을 녹도진과 발포진에 연락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실제 적대봉에서는 녹도와 발포진 뿐만 아니라 이들 양진 사이의 해안과 주변의 먼 바다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흑지두 봉수는 서쪽으로 사화랑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화봉수와도 서로 연락관계를 유지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랑 봉수는 앞서 언급한바와같이 연산군대 잇따른 왜변에 따른 대비책으로 다고두보를 설치하게 되는 연산군 8년(1502) 8월이후에 설치되어 영조 34년(1758) 이전에 폐지되었다.

발췌: 고흥군사 - 제2장 조선전기의 사회제도 - 제5절 교통(交通)·통신(通信) - 3. 봉 수(烽燧)






▣ 적대봉물만내


금산면 오천리 적대봉 아래(해발 592m)에 위치한 물만내는 

폭 5-10m, 길이 500여m 의 암반위는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면서 

깊은 웅덩이와 아름다운 폭포를 이루고, 주변경관이 수려하여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물만내 여행기


나그네님께서 찍은 물만내 사진물만내라는 곳을 알게 된게 언제였을까~
아마 2001년 쯤일까.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더 무관심하다고, 당시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곳이었다.
금산하면 떠오르는게 다른 어떠한 곳도 아닌 집안 뜰방에서 보면 전봇대의 전깃줄 오선음표에 걸쳐 보이는 적대봉이 맨 먼저 생각나지만 과연 물만내는 어떠한 곳일까.
궁금증만 더해가고 막상 적대봉에 갈라치면 들러야지 하면서도 가지 못하는 곳.

그래서 그랬을까 큰맘 묵고 생전 처음 물만내를 다녀왔다.
전에 사진 찍으면서 오천 상수도 바로 위에 까지 다녀와서 물만내랍시고 사진을 올렸던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인간의 손길이 아직은 덜 탄곳, 자연의 흐름대로 남겨져 있는 곳,
거금팔경을 지었다고 하는 고산 윤선도가 물만내를 다녀갔다면 제 1경을 물만내계곡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과연 물만내는 신천지나 다름 없었다.

이름 그대로 물이 많이 흘러내려 물만내라고 했을것이다.
물만내 하류에는 아직도 조선시대에 말을 키웠던 흔적이 남아있고,
조망이 괜찮은 산등성이 등성이 마다 망을 볼 수 있는 호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 시대를 잠시 가늠해 볼 수도 있다.

물만내 가는 길은,
성치재에서 적대봉 가는 길에 마당목치에서 물만내로 하산하는 것과
오천 상수도 길을 따라 물만내 등산길로 적대봉을 등정하는 것,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성치재에서 적대봉을 등정한 후 하산하는 길에 마당목치에서 물만내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보자.
대부분 적대봉을 등정하고 바로 올라왔던 길로 하산해버리는데 이제부터는 물만내를 꼭 가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오르는 길보단 내려가는 길이 훨씬 수월할테니 내려가면서 물만내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듣다보면
안빈낙도가 따로 없는 감흥을 느껴 잠시나마 세상 모든 시름을 잊게 될것이다.

주의할점은 사람의 왕래가 적어 하류지점 동백나무 군락부분에서 길이 끊어진 흔적이 있다, 하지만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으니 크게 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에 내가 갔던 코스의 흔적이다.(총 소요시간 4시간 30분)

'성치재 적대봉 입구' → '마당목치' → '물만내' → '서촌 적대봉 입구' → '서촌↔마당목치 적대봉 구간' → '성치재 적대봉 입구'

말그대로 적대봉 등성이를 한바퀴 돈 것이다. (정말 머리가 돌지 않은 이상, 다시는 하고 싶지 않는 코스인 셈이다.)

사진을 못찍어 아쉬움이 많았지만 더운 여름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물소리를 머릿속에 담아왔기 때문인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물만내 가는 길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전에 등산로와 예전 찍어놓은 사진중에 쉽게 찾을 수 있는 걸로 준비했음.

 

  • ?
    김창선 2007.07.11 01:30
    저기 적대봉 꼭때기에가서 무재 지내던 그시절
    물만내 골짜기에가서 양당목해서 질머지고 마당목치로 올라오면 얼마나
    길이 미끄럽던지.
    물만내를지나서 오천방향으로 저수지 못가서 어너리골이라는 조그막한 동내가
    있었는대 지금도있는지  40년전의 그곳 정말 숲이 아주좋군요
    고향에 한번가본 기분이듭니다  잘보았읍니다.
  • ?
    사화랑 봉수 2011.01.10 22:10 Files첨부 (1)

    3. 봉 수(烽燧)

    봉(烽)은 봉화의 뜻이며 밤에 봉화를 올려 연락하는 것을 말하고 수(燧)는 낮에 연기를 올려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봉수는 주야간의 의사표시의 수단을 총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봉수는 중앙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변경과 해양 지방의 정황과 소식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한 통신수단이었다 하겠다. 중앙정부는 봉수를 통하여 국경지대 및 해안지방의 국방경비 상황을 항상 파악할 수 있었으며, 적절한 대응책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안보상 중요하게 여겼다. 군사적 목적에서 국가의 공적이 통신체제로써 봉수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주대(周代)부터 봉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봉화를 사용하였다. 수로왕(首露王) 관련기록에 봉화가 보이고 있으며, 삼국 시대에 봉화를 사용한 기록들을 보아 고대 왕권국가가 탄생하면서 봉화가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봉수가 법제적으로 제도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고려에 들어선 이후였다.

     

    고려 의종(毅宗) 3년(1149) 8월에 봉수의 횟수에 따른 정세의 정도와 봉수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부역 인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봉수제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나 이 때에 들어서 더욱 구체적으로 정비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대체로 고려 성종에서 현종 연간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제도가 정비되면서 봉수제도도 편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 제도적으로 정비된 봉수제는 원(元) 간섭 기를 거치면서 그 조직이 무너지게 되었다.

    원의 세력이 고려에서 약화되고 왜구가 연안지방에 침략하면서 다시 봉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고려 말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강화된 봉수제는 조선에 들어 와서도 계속 중앙정부의 관심사가 되었다. 특히 세종 조에 들어서면서 봉수에 관한 여러 규정이 정비되어 나갔다.

    세종대에 봉수 관계요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정하여졌으며, 봉수처에 연대(煙臺)를 높이 쌓고 병기를 비치하도록 하는 등 봉수제를 엄격히 하였다. 세종 28년(1446)과 29년(1447)에는 봉수에 관한 세부규정이 정하여짐에 따라『경국대전』에 보이는 봉수제의 골격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세종 28년 10월, 정하여진 봉수제는 봉수를 직접 담당하는 봉수군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29년 3월에 봉수에 관하여 규정한 내용은 주로 봉수시설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경국대전』 병전(兵典)에 봉수조가 실리게 되었으며, 이로써 조선시대 봉수제에 대한 대강이 확립되었다. 경국대전에 보이는 봉수에 관한 주요 규정은 다음과 같다.

     

    - 봉화 거화(炬火)수

    1거 → 평시 2거 → 적 출현 3거 → 적 국경에 접근 4거 → 적 국경 침범 5거 → 적과 아군과 싸울 경우

    - 보고경로

    서울 → 오원(伍員)이 병조에 보고, 병조는 승정원 보고 지방 → 오장(伍長)이 영진(營鎭)의 장(長)에게 보고

    - 봉화노선 - 5개 방면 직봉노선, 각 방면의 간봉노선 정함

    - 봉화담당인원

    서울→1개소에 봉수군 4인, 오원 2인. 연해와 변경봉수→1개소에 봉수군 10인, 오장 2인 내지봉수→1개소에 봉수군 6인 오장 2인

    - 봉화담당자 차역 - 봉화군과 오장은 봉화 근처의 사람으로 차정

    - 신호불가능시 - 봉수군이 차례로 달려가서 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흥양현에 11개의 봉수가 보이는데 이 가운데 팔전산(팔영산), 천등산, 장기산, 마북산은 직봉으로 수덕산은 간봉으로『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나, 나머지 여섯 곳의 봉수 가운데 유주산 봉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중종 년간에 설치한 곳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 봉수는 중종 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흥양 일대의 포구에 설치하였다가 후대에 그 역할이 소멸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들 11개의 봉수에 대한 위치 설치 년대 응소지역을 차례로 정리해 본다.

     

     

    (1) 수덕산 봉수(愁德山 烽燧)

    - 소재지 : 고흥읍 호동리

    수덕산 봉수는 {수덕(修德)}<대동지지·호남지(大同地志·湖南誌)>, {수덕(藪德)} <증보문헌비고>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한자표기는 동일지명에 대한 이기라 할 수 있다.

     

    수덕산 봉수에 대한 제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지명

      간년 

       봉수명

       응소지역 

     동 국 여 지 승 람

     1481년

     수덕산(愁德山)

     남응장기산, 동응천등산, 서지보관문

     동 국 여 지 지

     1656년

     수덕산(愁德山)

     남응장기산, 동응천등산, 서지보관문

     흥 양 지

     1758년

     수덕산(愁德山)

     남응장기산, 동응천등산, 지보관문

     여 지 도 서

     1759년

     수덕산(愁德山)

     남응장기산, 동응천등산, 지보관문

     대 동 지 지

     1832년

     수덕산(愁德山)

     남장기산(권설

     호 남 지

     1925년

     수덕산(愁德山)

     남응 장기산 동응 천등산

     

     

    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수덕산(愁德山) 봉수는 남쪽 장기산 봉수(현 도양읍 관리 장계산)와 동쪽 천등산 봉수(현 풍양면 송정리 천등산)로부터의 적변(賊變)을 서쪽 관문(흥양 읍성)으로 전달하던 제 5거(炬) 권설봉수(간봉)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는 남쪽에 천등산 봉수와 서쪽에 장기산 봉수와 동쪽에 흥양읍성이 각각 위치하고 있어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한편 세종실록에 의하면 수덕산 봉수는 세종 9년(1427) 7월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당시 수덕산 봉수는 고흥읍 행정리 수덕마을에 위치한 수덕산 봉수와는 다른지역임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수덕산 봉수는 장기산 봉수로부터 전달된 연해의 적변을 관문(흥양 읍성)에 보고한 것으로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 수덕산 봉수가 설치된 세종 9년(1427) 7월 당시 고흥현의 치소는 조양현 (현 보성군 조성면)에 있었다. 따라서 흥양읍성에 보고 하였다는 내용은 논리상 맞지 않으며 이 당시 설치된 수덕산 봉수는 다른 장소(도화면 수덕산)에 있었음을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도화면 수덕산에는 현재 연대(煙臺)는 보이지 않고 석축담장의 유구만 남아있다. 또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그 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2) 장기산 봉수(帳機山 烽燧)

    - 소재지 : 도양읍 관리

    장기산 봉수는 선초부터 개설되어 있던 봉수로《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장기(場機)」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는 장흥도호부의 속현이었던 도양현에 속한 봉수였으나 세종 23년(1441) 행정개편에 따라 흥양현에 편입되었다.

     

    장기산 봉수에 대한 전거를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 지 명

    간 년 

     봉 수 명

     응 소 지 역 

      세 종 실 록 지 리 지

     1454년

     장기산(場機山)

     동준 보성 천등, 서준 보성 정흥

     동 국 여 지 승 람

     1481년

     장기산(場機山)

     동응 천등산, 서응 보성군 정흥사 북응 수덕산

     동 국 여 지 지

     1656년

     장기산(場機山)

     동응 천등산, 서응 보성군 정흥사 북응 수덕산

     흥 양 지

     1758년

     장기산(場機山)

     동응 천등산, 서응 보성군 정흥사 북응 수덕산

     여 지 도 서

     1759년

     장기산(場機山)

     동응 천등산, 서응 보성군 정흥사 북응 수덕산

     대 동 지 지

     1832년

     장기산(場機山)

     원봉(元烽)

     호 남 지

     1925년

     장기산(場機山)

     동응 천등산,서응 보성군 정흥사 북응 수덕산

     

    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장기산 봉수는 천등산 봉수(현 풍양면 송정리 천등산)와의 상호 연락뿐만 아니라 천등산 봉수로 부터의 적변을 보성군 정흥사(寶城郡 正興寺) 봉수(현 보성읍 봉산리 봉화산)와 수덕산 봉수(현 고흥읍 호동리 수덕산)에 전달하던 제5거 원봉(직봉)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위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응소지역은 각 시기마다 달랐다. 즉 선초에는 장흥도호부 두원현 소속의 팔전산 봉수- 보성군 풍안현 소속의 천등산 봉수-장흥도호부 도양현 소속의 장기산(帳機山) 봉수로 이어지는 연락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세종 9년(1427) 7월 보성군 도화현에 마복산(馬伏山) 봉수(현 포두면 차동리 마복산)와 수덕산 봉수(현 도화면 사덕리 수덕산)가 설치됨에 따라 팔전산-마복산-수덕산-천등산-장기산 봉수의 연락체계로 변화되었다. 이들 봉수는 세종 23년(1441) 2월 행정 개편으로 흥양현에 편입되었다. 이 후 어느 시기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마복산과 수덕산 봉수가 폐지됨에 따라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성종대 흥양지방에 침입한 왜구로 인해 인명피해가 잇따르자 성종 6년(1475) 2월 마복산 봉수와 유주산 봉수(현 도화면 구암리 가화리 유주산)를 복설한데 이어 성종 6년(1475) 2월부터 성종 12년(1481)간에는 수덕산 봉수(현 고흥읍 행정리 수덕마을 수덕산)가 설치됨에 따라 ① 팔전산-마복산-천등산-장기산-보성 정흥사 봉수(직봉) ② 팔전산-마복산-유주산-천등산-수덕산 봉수-흥양읍성(간봉)③ 장기산-수덕산봉수-흥양 읍성(간봉) 등 3개의 연락망을 유지하였다.

     

    연산군 8년(1502) 8월 다고두보(多古斗堡)의 설치를 전후한 시기에는 잇따른 왜변에 대한 조치로서 6개소의 간봉(間烽)이 설치되었다.

     

    즉 사화랑봉수(沙火郞 烽燧: 현 금산면 석정리적대봉(積台峰)), 흑지두 봉수(黑之頭 烽燧: 현 풍양면 매곡리 망매산), 가화봉수(加禾 烽燧:도화면 가화리 화옥마을 망산), 가내포 봉수(加乃浦 烽燧: 도화면 구암리 가인동 봉화산),소포 봉수(召浦 烽燧: ?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간봉들은 연산군 3년(1497) 2월 25일의 녹도왜변 동 3월의 돌산왜변, 연산군 5년(1499) 3월의 여도왜변 등의 영향으로 설치된 것이다.

     

    이들 간봉들의 연락체계는 간봉상호간의 연락망만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어 기존의 봉수연락체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각 간봉들의 위치로 보아 이들 간봉들은 각각 장기산 봉수·유주산 봉수·천등산 봉수·마복산 봉수 등과 연락체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흥양지』(1758년)에 이들 7개의 봉수가 폐지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영조 34년(1758) 이전에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봉수의 연락체계도 ① 팔전산-마복산-천등산-장기산-보성정흥사 봉수(직봉)와 ② 장기산-수덕산 봉수-흥양읍성(간봉)으로 이원화되어 이들 봉수가 폐지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유지되었다.

     

    (3) 천등산 봉수(天燈山 烽燧)

    - 소재지 : 풍양면 송정리

    천등산 봉수는 선초부터 개설되어 있던 봉수로서 본래는 보성군의 속현이었던 풍안현에 속해 있었으나 세종 23년(1441) 2월 행정개편으로 흥양현에 편입되었다.

      봉 수 명

      응 소 지 역

     비 고

     사화랑 봉수

     서응 녹 도 동응 발 포

     일명 흑두봉수(동국여지지)

     흑지두 봉수

     서응 사화랑 동응 가 화

     일명 단장봉수(신증흥양지)

     다고두 봉수

     서응 흑지두 동응 가 화

     

     가 화 봉수

     서응 다고두 동응 가내포

     

     가내포 봉수

     서응 가 화 동응 소 포

     

     소 포 봉수

     서응 가내포 동응사도 북응여도

     

     
    천등산 봉수에 대한 제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천등산 봉수는 제5거 원봉(직봉)인 것 만은 확실하나 각 시기마다 응소지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전기에는 팔전산 봉수(현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천등산 봉수-장기산 봉수(현 도양읍 관리 장계산), 조선 중기에는 팔전산-마복산-천등산-장기산 봉수와 유주산 봉수(현 도화면 구암리 가화리 유주산)-수덕산 봉수(현 고흥읍 행정리 수덕마을 수덕산) 조선후기에는 팔전산- 마복산-천등산-장기산 봉수의 연락체계를 유지하였다. 폐지연대는 고종 31년(1894)이다.

     

     

     

     

    (4) 사화랑 봉수(沙火郞 烽燧)

    - 소재지 : 금산면 석정리 적대봉 봉수지(積台峰 烽燧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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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봉수는 조선 중기에 신설된 6개 간봉중(間烽中) 사화랑 봉수로 비정된다.

    현재 이들 간봉들은 대부분 유구나 지명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 비정은 곤란하다.

    그러나 일부 유구가 남아 있는 곳이나 지명(봉화산, 망매산) 또는 봉화불을 피웠다고 전해져 오는 곳에 대한 현지 조사의 결과를 문헌기록과 대조해보면 어느 정도의 위치 비정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유구가 남아 있는 곳으로는 금산면 석정리 적대봉 봉수지(積台峰 烽燧址), 도화면 구암리 가인동(속칭 봉화골) 봉화산봉수지, 동일면 덕흥리 동산 봉수지,봉래면 외초리 청석산 봉수지(靑石山 烽燧址), 영남면 우천리 우미산 봉수지(牛尾山 烽燧址)가 있으며, 지명(망매산)상 봉화터로 추정할 수 있는 곳으로는 도양읍 봉덕리 봉동 망매산, 풍양면 매곡리 망매산, 도화면 가화리 화옥망산이 있다.

    또한 봉화불을 피웠다고 전해져 오는 곳으로는 도양읍 봉암리 비봉산, 도화면 발포리 도제산, 동일면 덕흥리 상산, 봉래면 사양리 사양도, 봉래면 신금리 진터산, 영남면 금사리 사도진 뒷산 등이다.

     

    한편<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6개의 간봉들의 응소지역은 다음과 같다.

     

     지 지 명

    연 간 

    응 소 지역 

     세 종 실 록 지 리 지

     1454년

     북준 장흥 장기

     동 국 여 지 승 람

     1481년

     남응 유주산, 동응 마복산, 서응 장기산

     동 국 여 지 지

     1656

     남응 유주산, 동응 마복산, 서응 장기산

     흥 양 지

     1758년

     동응 마복산, 서응 장기산

     여 지 도 서

     1759년

     동응 마복산 봉수, 서응 장기산 봉수

     대 동 지 지

     1832년

     (원봉)

      호 남 지

     1925

     동응 마복산, 서응 장기산

     

     

    위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들 6개 간봉들은 녹도진(현 도양읍 봉암리)과 사도진(현 영남면 금사리 사도)사이에 위치하며, 소포 봉수를 제외한 5개 봉수의 위치는 녹도진과 발포진(현 도화면 발포리 성촌)사이로 압축된다. 이를 토대로 6개 봉 기록과 현존 유구 및 지형, 지명등을 대조하여 간봉들의 위치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화 봉수는 봉화터로 전해져 오고 있거니와 지명에서도 서로 일치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현 도화면 가회리 화옥의 망산이 분명하며, 가내포봉수는 「가인(佳人)」은 「가내(加乃)」의 전음(轉音)의 가능성이 크고, 포구로서 적합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봉화산에 현존하는 유구가 기록과 서로 일치하고 있는 점에서 도화면 구암리 가인동의 봉화산으로 비정된다.

     

    또한 다고두 봉수는 봉수 기록 외에도 다른 기록을 통해 위치비정이 가능한데 즉 연산군 3년(1497) 2월25일에 발생한 녹도왜변, 동 3월의 돌산왜변, 연산군 5년(1499) 3월의 여도왜변의 영향으로 연산군 8년(1502) 8월 다고두보의 설치를 보게 된다.

     

    이것은 선초 고흥포(풍양면 고옥리 축두)에 설치되어 있던 축두만호진 세종 17년(1435) 7월 소흘라량(所訖羅梁)을 거쳐 세종21년(1439) 4월 발포로 옮겨 발포만호진이 설치됨에 따라 녹도진과 발포진 사이의 옛 축두만호진을 비롯한 그 주변일대는 방어 상 취약지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고두 봉수는 이들 지역으로 들어서는 해안의 가입부에 위치하고 있는 풍양면 매곡리 망매산으로 비정된다.

     

    이 점은 가화봉수에서 이 곳 망매산에 이르는 해안일대에 중종 18년(1523) 풍안평 백석포 장성과 율현보성이 축성되는 점에서도 반증된다. 사화랑 봉수는 녹도와 발포양진과 상망(相望)의 거리에 있으며, 녹도에서 발포진에 이르는 해안뿐만 아니라 외양(外洋)을 모두 관망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금산면 석정리 적대봉으로 비정된다.

     

    한편 흑지두 봉수는 도양읍 봉덕리 봉동의 망매산이나 도양읍 봉암리 비봉산으로, 소포응소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사화랑봉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지지명

    연간 

    응소지역 

     신 증 동 국 여 지 승 람

     1531년

     서응가화, 동응소포

     동 국 여 지 지

     1656년

     서응가화, 동응소포

     흥 양 지

     1758년

     금폐

     

    위의 기록에 의하면 사화랑 봉수는 요망한 적변(賊變)을 녹도진과 발포진에 연락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실제 적대봉에서는 녹도와 발포진 뿐만 아니라 이들 양진 사이의 해안과 주변의 먼 바다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흑지두 봉수는 서쪽으로 사화랑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화봉수와도 서로 연락관계를 유지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랑 봉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연산군 대 잇따른 왜변에 따른 대비책으로 다고두보를 설치하게 되는 연산군 8년(1502) 8월 이후에 설치되어 영조 34년(1758) 이전에 폐지되었다.

     

     

    (5) 유주산 봉수(楡朱山 烽燧)

    - 소재지 : 도화면 구암리

    유주산 봉수는 성종 6년(1475) 2월 전라도 관찰사의 계본(啓本)에 의해 마복산 봉수(馬伏山 烽燧)와 함께 복설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에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언제 어떤 경위로 치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종(端宗) 즉위 이후 왜구들의 심상치 않은 조짐에 긴장한 조정에서는 예종 1년(1469) 5월 김국광(金國光)·이극배(李克培) 등을 하삼도(下三道)에 파견하여 연변의 방어 상태와 연해의 진(鎭)·포(浦)로서 혁파할 곳과 복구할 곳을 조사하는 한편 보수와 성자(城子)에 대해서도 적간(摘奸)토록 조처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의 침입과 그로 인한 피해 는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성종이 즉위하고서는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 피해는 경상·전라도 남해안 일대의 전지역에 걸친 것이었다. 흥양지방의 경우만 예로 들더라도 성종 원년(1470) 1월에 발포 선부(船夫) 4인이 살상된 데 이어 성종 5년(1474) 9월에는 흥양현 선부 3인이 살상당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유주산 봉수의 복설은 이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유주산 봉수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지명

     연 간

    응 소 지 역

     신 증 동 국 여 지 승 람

     1531년

     서응 녹도, 동응 발포

     동 국 여 지 지

     1656년

     서응 녹도, 동응 발포

     신 증 흥 양 지

     1758년

    금폐

     

    위 기록에 나타난바와 같이 유주산 봉수는 마복산 봉수(현 포두면 차동리 마복산)로 부터의 적변을 천등산 봉수(현 풍양면 송정리 천등산)에 전달하던 간봉임을 알 수 있고 폐지연대는 영조 34년(1758)이전이다.

     

    (6) 가내포 봉수(加乃浦 烽燧)

    - 소재지 : 도화면 구암리

    가내포봉수는 연산군 8년(1502)경에 설치되었는데 그 전거는 다음과 같다.

    지 지 명

     연 간 

     응 소 지 역

     동 국 여 지 승 람

     1481년

     동응마복산, 서응천등산

     동 국 여 지 지

     1656년

     동응마복산, 서응천등산

     신 증 흥 양 지

     1758년

     금폐

     

    위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가내포 봉수는 주변의 적변을 서쪽의 가화봉수와 동쪽의 소포 봉수에 전달하던 간봉으로서 이들 봉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로선 소포 봉수에 대한 지명이나 유규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비정이 곤란하지만 가화 봉수는 현 도화면 가화리 화옥마을의 망산(望山)으로 가내포 봉수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현재는 제방을 쌓아 바다와 차단되어 있으나 봉화산 남쪽의 가인동은 본래

    내만(內灣)된 포구로서 적합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와 함께「가내(加乃)」,「가인(佳人)」은 상사음(相似音)으로 동일 장소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위의 기록과 현재의 위치 등으로 미루어 보아 봉화산 봉수지는 가내포 봉수로 비정된다. 그러나 여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조선 후기《신증흥양지》(1758년)에는 다고두 봉수가 단장봉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가인동 남쪽에「안단장」,「바깥단장」의 지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명이나 봉화산 봉수가 다고두(단장)봉수와 무관함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흥양현 봉수조에 의하면 다고두 봉수는 "서쪽으로 흑지두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화 봉수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서쪽의 흑지두 봉수와 동쪽의 가화 봉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흑지두 봉수는 도양읍 봉덕리 봉동의 망매산 혹은 봉암리 비봉산으로 비정되고 있고 , 가화 봉수는 도화면 가화리 화옥의 망산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기록과 주변 유적·지명 등을 검토해 볼 때 다고두봉수는 풍양면 매곡리 망매산으로 비정된다.

     

    (7) 마복산 봉수(馬伏山 烽燧)

    - 소재지 : 포두면 차동리 내산

    마복산 봉수는 세종 9년(1475) 7월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후(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고 수덕산 봉수 참조) 성종 6년(1427) 전라도 관찰사의 계본에 의해 유주산 봉수와 함께 복설되었다.

     

    복산 봉수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 지 명

    연간 

    응 소 지 역 

     동국여지승람

     1481년

     서응팔전산, 남응유주산, 서응천등산

     동국여지지

     1656년

     서응팔전산, 남응유주산, 서응천등산

     흥 양 지

     1758년

     동응팔영산, 서응천등산

     여 지 도 서

     1759년

     동응팔전산봉수, 서응천등산봉수

     대 동 지 지

     1832년

     원봉

     호 남 지

     1925년

     동응팔영산, 서응천등산

     

    위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마복산 봉수는 제5거 원봉(직봉)이며, 영조 34년(1758)을 기준으로 응소지역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성종 6년(1475) 2월 봉수의 설치로부터 영조 34년(1758)경까지는 팔전산 봉수(현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로부터의 적변을 각각 유주산 봉수(현 도화면 구암리 유주산)와 천등산 봉수(현 풍양면 송정리 천등산)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1758년 이후부터 폐지되기까지는 팔전산 봉수로부터의 적변을 천등산 봉수에만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유주산 봉수의 폐지에 따라 응소지역이 변동되었기 때문이다. 폐지 년대는 고종 31년(1894)이다.

     

    (8) 동산 봉수(烽燧)

    - 소재지 : 동일면 덕흥리

    동산 봉수에 대한 전거는 전혀 없다. 따라서 언제, 어떤 경위로 설치되었으며 폐지되었는지는 상고 할 수 없다. 다만 사도진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상 중요한 비중을 가진 곳임이 주목된다. 동산 봉수는 그 위치상 직접 요망한 적변이나 청석산 봉수(현 봉래면 외촌리)로 부터 상산(上山) 봉수(현 봉래면 덕흥리)를 통해 전달 받은 적변을 각각 서쪽의 팔전산 봉수(현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 및 우미산 봉수(현 영남면 남열리 우미산) 등지에 전달하던 간봉으로 추정된다.

     

    (9) 청석산 봉수(靑石山 烽燧)

    - 소재지 : 봉래면 외초리

    쌍봉산 남동쪽 봉우리에 위치한 봉대이다. 이에 대한 전거는《호남지》가 유일한데 "외나로도 청석삭립 유봉대(外羅老島 靑石削立 有烽臺)"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언제,어떤 경위로 설치되었으며 폐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 다만 고흥군의 최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고 고흥이 왜구의 초정지(初程地)임을 감안할 때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점만은 분명하다 하겠다. 청석산 봉수는 그 위치상 주변해안의 적변을 내나로도 상산봉수를 통해 사도진이나 마복산 봉수에 전달하던 간봉으로 추정된다.

     

    (10) 팔전산 봉수(八顚山 烽燧)

    - 소재지 : 영남면 양사리

    팔전산 봉수는 선초부터 개설되어 있던 봉수로 기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 지 명

    연 간 

    응 소 지 역 

     세 종 실 록 지 리 지

     1454년

     동응순천백야관봉수, 서응보성천등

     동 국 여 지 승 람

     1481년

     동응순천부백야관, 남응마복산

     동 국 여 지 지

     1656년

     동응순천부백야관, 남응마복산

      흥 양 지

     1758년

     동응순천백야관, 남응마복산

     여 지 도 서

     1759년

     동응순천백야관봉수, 남응마복산봉수

     대 동 지 지

     1832년

     원봉

     호 남 지

     1920년

     동응순천부백야관, 남응마복산

     

    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팔전산 봉수, 순천 백야관 봉수(順天白也串 烽燧: 현 여천군 화양면 장수리 봉화산)로 전달하던 제5거 원봉(직봉)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폐지 연대는 고종 31년(1894)이다.

     

    (11) 우미산 봉수(牛尾山 烽燧)

    - 소재지 : 영남면 우천리

    우미산 봉수에 대한 전거는 전혀 없다. 따라서 언제, 어떤 경위로 설치되었으며 폐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여도진의 입구에 위치하여 순천백야관 봉수와 팔전산 봉수의 중간지점인 점을 감안하면 우미산 봉수는 순천백야관 봉수(현 여천군 화양면 장수리 봉화산)로 부터의 적변을 팔전산 봉수 (현 영남면 양사리 팔영산)에 전달하던 간봉으로 추정된다.               

     

     

     

     

    출처 : 고흥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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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안내 > 하단 지도 크게보기 클릭 2017.5.9 | 지도 크게 보기 © NAVER Corp. 거금해양낚시공원 홈페이지 http://ggdofishingpark.com/ http://newosilent.blog.me/220183575218
    Date2017.02.20 Category낚시터 Reply0 Views1366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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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거금도 생태 숲

    거금도 생태숲 위치 : [548-936] 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산98-1번지 일원 고흥군 금산면(錦山面) 거금도(居金島)에 솟아 있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고래등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적대봉(높이 592m)의 남쪽자락인 청석마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적대...
    Date2012.08.17 Category생태공원 Reply0 Views13874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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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고흥군 사이버 관광지도

    이미지 크기 2512px X 3639px *[출처] 고흥문화관광, 사이버 관광지도 링크 http://tour.goheung.go.kr/web?site_id=7&menu_id=91&
    Date2012.08.16 Category안내 지도 Reply0 Views15276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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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금산면 도로망도 및 버스시간표2

    금산면 도로망도 이미지 출처 : 고흥문화관광 사이트 링크 http://tour.goheung.go.kr/tour/s03/04_00.html 녹동 => 금산 버스 시간표 금산 => 녹동 버스 시간표
    Date2012.08.16 Category안내 지도 Reply2 Views10312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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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고흥 관광 안내도

    고흥 지도 1 2 3 4 5 6 7 8 9
    Date2010.03.11 Category안내 지도 Reply0 Views1306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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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전남 고흥군 금산면 신전리 연홍1

    거금도 서쪽 1㎞ 해상에 있으며,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에 있다. 원래는 돌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300여 년 전 밀양박씨가 처음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연(鳶)과 같...
    Date2010.03.02 Category미술관 연홍 Reply1 Views13592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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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코스가이드] 고흥 거금도 적대봉

    흰눈 인 한라산과 호남 남부 명봉 조망대 동정~북동릉~봉화대~오천 조망 명코스 월간 산 [498호] 2011.04 한라산(1,950m)이 곧 제주도라면 적대봉(積臺峰·592.2m)이 곧 거금도(居金島·전남 고흥군 금산면)다. 산자락이 뻗지 않은 곳이 없어 바닷가 어디든 적...
    Date2011.04.08 Category산山 Reply0 Views2193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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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모닥불 송년산행] 섬산낙조산행 ㅣ 고흥 거금도 적대봉 르포1

    조선일보 월간 산 [470호] 2008.12 남해 섬산 오르며 가는 해를 바라본다 동정~북동릉~봉화대~남서릉~오천 종주산행 한라산(漢拏山·1,950m)이 제주도라면 적대봉(積臺峰·592.2m)은 거금도(居金島·고흥군 금산면)였다. 바닷가 어디서든 적대봉 산그늘을 피할 수...
    Date2010.10.22 Category산山 Reply1 Views1402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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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섬산화첩] 거금도 적대봉

    조선일보 월간 산 [474호] 2009.04 매서운 삭풍도 터지는 봄 꽃망울은 어쩌지 못하네 뭍에서는 아직 삭풍(朔風)이 마른 가지를 붙잡고 흔드는데, 남쪽 섬 거금도에는 벌써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고 한다. 오는 봄을 막으려고 움트는 나뭇가지를 꺾어버릴 수...
    Date2010.10.22 Category산山 Reply0 Views1324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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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내가 꿈꾸는 남도여행 [거금도 권] (송기장 著)

    거금도 여행은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환상여행 거금도 여행은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환상여행 ▲ 천등산에서 바라본 거금도 ⓒ 머물고싶은순간(nokdong.net) 거금도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고흥읍에서 녹동까지 자동차로 이동한 후(자동차 20분 소요) 거금...
    Date2004.12.02 Category안내 지도 Reply0 Views2667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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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거금도 관광안내도, 적대봉 개념도

    Date2003.02.28 Category안내 지도 Reply0 Views6279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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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거금도 해수욕장 안내1

    익금 해수욕장 연락처1 금산면사무소 061-830-6507 관리소 익금해수욕장 관리자 010-6236-7670 , 금산면사무소 소재지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익금해변길 32 남해안 최남단의 맑고 푸른 바다와 은빛 모래사장 시원한 소나무송림과 현대식 편의시설을 갖추고 ...
    Date2003.02.28 Category해수욕장 Reply1 Views3233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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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적대봉 안내 , 물만내 소개 , 사화랑 봉수대2

    거금도에 솟아 있는 적대봉(積臺峰)은 마치 바다에 떠있는 고래등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산이다. 섬산이면서도 고흥군에서는 팔영산(八影山, 608.6m)다음으로 높은 적대봉은 펑퍼짐한 산세와 달리 전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완도, 남쪽...
    Date2003.02.28 Category문화유적 Reply2 Views26408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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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송광암 안내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5

    송광암은 진리의 섬 (居金島) 금산면 어전리 (용두산자락) 7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으로 부터 776년전 고려 신종 3년 서기 1209년 해동 불일보조국사(海東佛日普照國師) 께서 창건하셨다. 전설에 의하면 국사께서는 모후산에 올라 터를 찾기 위하여 나무...
    Date2003.02.28 Category송광암 Reply5 Views1946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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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거금도 오시는 길 안내1

    먼저 기차를 탈 것인지, 고속버스를 이용하실것인지 결정을 하시고.. 기차를 이용하신다면 "순천"까지 내려오는 전라선을 타십시요.서울에서 순천까지 한 5시간 남짓 걸리니깐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오시면 될 것입니다. 기차 시간을 모른다구요..그렇다고 포...
    Date2003.02.28 Category안내 지도 Reply1 Views30518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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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철부선 휴항] 녹동터미널-거금도 간 버스운임 및 시간표2

    2011년 12월 16일 거금대교 개통으로 인해 금산면 버스 운행의 시간표가 변경 조정되었습니다 (도양읍 ⇔ 금산면) 농어촌버스 운행명령서 운수업체 : 대흥여객 대표 , (주)고흥여객 대표 여객자동차운송사업법 제23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 다음과 같이 농어촌버...
    Date2003.02.28 Category안내 지도 Reply2 Views38977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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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고흥군의 연혁과 관광 안내도

    ■고흥군 연혁 (고흥군청홈페이지로) *1285년(고려조) 충렬왕 11년 장흥부 관할에서 고흥현으로 승격 감두를 두었음. *1395년(조선조) 현을 폐지하고 보성군 도양현에 속하였고 진을 설치함. *1441년(조선조) 세종대황때 장흥부의 두원현과 도양현을 설치 보성...
    Date2003.02.28 Category안내 지도 Reply0 Views22631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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