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금도 서쪽 1㎞ 해상에 있으며,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에 있다. 원래는 돌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300여 년 전 밀양박씨가 처음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연(鳶)과 같다 하여 연홍도(鳶洪島)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거금도와 맥이 이어져 있다 하여 연 ‘연(鳶)’자를 이을 ‘연(連)’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섬의 지형이 말의 형상과 같다 하여 마도(馬島)라 불렀다는 설도 함께 전해진다.
섬 모양은 ‘ㄱ’자 말(馬)형이며, 최고점은 81m로 경사가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대부분 사질해안이나 곳곳에 암석해안도 있다. 1월 평균기온 0℃, 8월 평균기온 26℃, 연강수량 1,389㎜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주요농산물로는 보리·콩·녹두·양파·마늘 등의 밭작물이 있다. 근해에서는 멸치·노래미·낙지 등이 잡히며, 김·미역·톳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서쪽의 모래 해변에는 동백나무·곰솔 등이 무성한 해수욕장이 있다.
■ 현황
【위치】 고흥군 금산면 신전리
동경:127˚ 06' . 북위:34˚27' . 면적:0.55㎢ . 해안선:4.0km . 표고:81m
【근접섬거리】0.5km(거금도)
【가구수】74가구
【인구】142명(남69명, 여73명) 19세 이하 14명(9.8%),65세 이상 53명(3.2%)
【주소득원】수산업(멸치,톳,미역,기타어류)
■ 생활권역
【주생활권】도양읍
【부생활권】고흥읍
■ 도서지원
【임야】27ha【경지】24ha(밭24ha)
■ 공공기관과 시설
【공공기관】연홍 보건진료소(061-844-4650)
■ 기간시설
【항구】소규모어항 1개소
【위치】선착장 2개소 0.25㎞.물양장 100㎡, 방파제 2개소 0.18㎞
【도로시설】농어촌도로 1.3㎞. 비법정도로 1㎞(포장 0.2㎞)
【급수시설】우물 42개소 74가구(1일생산량 2700톤으로 저수지를 개수한 우물임)
【전력시설】한전 전력이용 전가구(100%)
■ 지역생산물
【수산물】톳 1500톤()120백만원). 미역 1250톤(100백만원). 멸치 10톤(120백만원).기타어류 542톤(650백만원)으로 2000년 통계자료이다.
【농산물】마늘. 고추 소량재배
■ 산업별인구
【인구】1차산업종사자 141명. 3차산업종사자 1명(보건진료소 공무원)
■ 생업장비
【어선】5톤미만 동력선 38척 총톤수 62.3톤. 무동력선 2척 1.12톤
【차량】자가용 3대.화물차1대
■ 농수산업시설과 조직
【어촌계】연홍어촌계. 계원수 65명. 연락처:진성용(061-843-7373)
■ 생활편의 시설
【기타】구멍가게 1개소
■ 교통
이웃 거금도와 나룻배를 이용하고(1일 5회 정도). 도양읍과의 사이에 1일 2회(도양읍 출발 오전9:30. 오후 3:00. 요금 2200원) 정기선 항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 도서역사
마을이 있는 섬의 지형이 말과 같이 생겨 본래 마도라 불렀고. 신전리와 신양리가 물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며 섬의 중앙에 홍리라는 마을이 있어 연홍도라 부른다고 한다. 금산면의 가장 서북쪽에 위치하며 1928면 김희홍씨와 김치숙씨가 들어와 연홍이라 개칭했다고 한다. 김해김씨가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모내기노래,상여가 등 민요가 전해온다. 지리적인 여건으로 4계절 낚시를 할 수 있는 곳이다.
■ 문화유적
▲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고산목(孤山木): 고산 윤선도선생이 병자호란 당시 운둔할 결심으로 남하하여 보길도에 머물다가, 이곳의 산수가 수려함을 보고 서기 1603년 거금도를 찾아 거금8경을 지으시고 연홍도에서 기념식수를 하니, 후에 이를 고산목이라 칭함.
▲ 공덕비
* 김공휘대규송덕비(金公諱大圭頌德碑): 신양간척지 매립간척공사와 농지조성에 공헌
* 전군수김공장술송덕비(前郡守金公長述頌德碑): 연홍초등학교 신설과 신양간척지 조성 및 군민 복지행정 등 지역사회에 공헌.
연홍도
어디서든 사계절 낚시를 할 수 있는 섬
[連洪島 ]
연홍도는 고흥반도에서 거금도를 거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섬이다. ‘섬 속의 섬’이라고나 해야 할까. 50여 호에 1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거금도 신양마을 서쪽에서 0.5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도선이 닿는 선착장은 섬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방파제 끝에 부교가 있다. 왼쪽 방파제 끝은 철부선이 닿을 수 있는 경사제다. 거금도 신양 사이에는 나룻배를 이용하고(1일 5회), 도양읍 녹동과의 사이에 1일 1회 정기선 항로가 있다.
거금도가 육지와 다리가 놓아지기 전에는 고흥 녹동 신항에서 완도의 평일도와 금당도행 차도선이 하루 5회 운항했는데 하루에 한차례씩 거금도와 연홍도(連洪島) 사이의 해협으로 들어와 연홍도에 배를 대고 간다. 이 배를 이용하면 차량이나 화물이 손쉽게 들어올 수 있다.
우리 일행은 거금대교를 지나서 신양 마을에 차를 세워 두고 도선을 이용해 연홍도에 왔다. 좌우로 길게 해안길이 이어진다. 마을은 왼쪽 해안 쪽으로 있다. 해발이 50미터도 채 안될 것 같은 양쪽으로 나무조차 드문 야산을 낀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논이나 습지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 바다에 작은 배 몇 척이 정박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방파제가 낀 미니 선류장이 있다. 돌을 쌓아 방파제를 만든 선류장이다. 방파제 입구에 대기실이 있다. 한쪽 두어 평 남짓의 간이대합실 안에 놓인 장의자가 이채롭다. 대기실 뒤로 해안길이 이어진다. 마을은 왼쪽에 위치한다. 호안을 따라 집들이 늘어서 있다. 집 담장에 그래피티 작업을 했는지 엷은 색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어 밝은 느낌이다. 동화처럼 예쁜 그림들이 담벼락에 이어져 있는데 코난의 후예들과 훨훨 날아가는 백구들이 예뻐 보였다.
해안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광장 옆 오른쪽으로 오르막길이 있다. ‘연홍길 24-2’옆에 있는 길로 섬의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중간지점에 커다란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집 한 칸은 들어설 수 있는 면적이다. 송덕비 옆으로는 대리석으로 된 이력과 시비 비슷한 비석이 나란히 있다. 연홍초등학교 신설과 신양간척지 조성 및 군민 복지행정 등 지역사회의 공헌에 대한 내용이다.
오르막길을 올라서면 복지회관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또 다른 길이 있다. 교회 가는 길이다. 섬 서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승용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이어 바로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집들이 있다. 워낙 작은 섬이라 그런지 물이 부족하여 빗물을 받아서 두었다가 사용하는 물통이 놓여 있다.
이곳이 이 섬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계속 내려가면 바로 해안이다. 또 다른 포구가 나타난다. 실제로는 이 섬의 중심포구가 이곳이다.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입구를 제외한 사방이 방파제인 이곳에 배들이 제법 있다.
여기서 바로 보면 포구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섬 자체가 특이하게 생긴 덕이다. ‘ㄱ’자 모양을 하고 북쪽으로 낮은 산이 막고 있다. 비록 그리 높지 않은 뒷동산 수준이지만 포구를 포근하게 감싼 느낌이다. 거기에다 바로 앞에 있는 섬 금당도가 막고 있다. 달리 피항지가 아니다.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에 있다. 왼쪽 방파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집은 ‘연홍길 53-3’ 가정집과 창고 비슷한 시설이 몇 채 있다. 그 옆으로 왼쪽 즉 남방파제 가는 길이다. 여기서 호안을 바라보면 마치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약간의 숲을 형성한 좀 높은 지대다. 이곳을 지나면 왼쪽으로 북방파제 가는 길이자 물양장이 있다. 이 옆에도 철부선이 닿을 수 있는 경사제가 있다. 여기서 해안길을 따라 계속 가면 왼쪽 해안으로 특이한 바위가 보인다. 귀두 모양을 한 바위다. 여기서 해안길을 따라 바라보면 해안이 있고 북쪽으로 약간의 모래가 있는 해변이 있다. 대부분 사질해안이나 곳곳에 암석해안도 있다. 서쪽의 모래 해변에는 동백나무·곰솔 등이 무성한 해수욕장이 있다. 오른쪽으로 학교터가 보인다. 바로 ‘연홍미술관’이다.
입구 오른쪽 기둥 위에 ‘연홍미술관’이라는 간판이 있다. ‘연홍길 94’가 부착된 이순신 동상이 있다. 정문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가운데에 박석을 깐 흙길이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미술관은 학교 교사는 교실처럼 보이지 않은 모양새다. 문을 열면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지는 낭만적인 장소이다. 단층 건물은 이색적인 모습을 한 건물로 변해 있었다. 큰 건물이 두 채이고 그 뒤로 부속건물이 몇 채 딸려 있다. 왼쪽 건물은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고 오른쪽 본 건물은 미술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미술관 앞에 책 읽는 소녀상이 있는데 색상은 아주 바랬다. 세월의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지 미술관인데도 아무 채색도 하지 않고 있다. 8년 동안이나 주인없이 방치된 이 폐교를 수리하여 50평의 전시실과 60명이 사용할 수 있는 숙소를 갖추었다. 그렇게 넓지 않은 마당, 예전에는 조그만 운동장으로 쓰던 이 공간은 아담한 정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이 섬 출신인 김정만(80세) 화백이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들어와 폐교를 수리하여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김 화백은 순천에서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여수순천사건을 겪었고 육군 대령으로 제대 후에 어릴 때 꿈인 그림을 그리고 싶어 홍대에서 만학으로 공부한 다음,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고향의 산과 바다 등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작품을 지역과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기증하고 있다. 일종의 사회사업 차원에서 미술을 사회에 환원하는 문화운동을 벌이고 있다.
주인도 없는데 미술관을 잘 구경하고 난 다음에 마을로 나오는 길에서 선호남(50) 관장을 만났다. 그 분은 연홍미술관을 ‘아름답고 멋진 섬마을의 미술관’이라고 소개했다.
“도시에는 여기보다 시설이 훨씬 더 좋은 사설미술관들이 많지요. 그렇지만 아름다운 남해바다를 정원으로 삼은 미술관은 여기가 유일할 겁니다.”
선 관장은 시간만 나면 바다에 널려진 몽돌을 주워 와서 앞 마당에 깔고, 전시실에 있는 소품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그는 이 섬을 ‘미술의 섬’으로 꾸밀 예정이며 나무와 조경과 조각으로 이름난 거제도의 관광지 외도처럼 테마가 있는 미술의 섬으로 가꾸고 싶다고 했다. 섬 어디를 가 보아도 그림과 조각을 쉽게 볼 수 있고 소득이 없는 가난한 이곳 주민들을 위해 꽃 축제도 구상하고 있었다.
연홍미술관은 올해로 개관 15년을 맞는다. 150여 점의 작품을 상설전시를 하면서 섬과 바다와 고흥을 주제로 특별전을 꾸준히 열고 있다. 그 동안 연홍미술관은 접근성이 0점이나 다름없었다. 고흥 녹동항에서 하루에 한 번에 오는 배도 있지만 시간을 잘 맞추기가 어렵다. 그래서 녹동항에서 거금도 차도선을 타고 와 금진항에 내려서 다시 신양마을로 차를 타고 와서 나룻배를 타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거금대교의 개통으로 한결 접근성이 쉬워서 작년에 이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무려 3000명 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연홍미술관의 배를 타는 기쁨과 휴식과 숙박을 겸하여 전시품과 더불어 연홍도의 아름다움과 거금도, 소록도의 풍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특징을 가진 것이다. 선 관장은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로 연홍미술관을 개관한 김정만 화가와 고흥 민예총 사무국장 시절에 만나 5년 전부터 연홍미술관 운영을 맡고 있다.
학교 뒤로는 고추밭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는데 주요 농산물은 마늘과 고추 등이다. 임야 27ha, 경지 24ha인데 그 중 밭이 24ha이다. 학교 주변에도 몇 가구의 집들이 있다. 학교 앞에서 오른쪽 즉 북쪽 해안길을 따라 가면 학교 끝 지점에서 길이 갈린다. 해안에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몇 채 있고, 길은 그 오른쪽으로 이어지는데 오르막길이다. 왼쪽으로 섬의 북서쪽 끝까지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북쪽으로 이어진 해안길이 나타난다.
북방파제 앞으로 집이 몇 채 있고 그 사이로 길이 있다. 도선선착장 가는 길이다. 이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주변에 폐가들이 제법 보이고 더 올라가면 밭이 나타난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마을 입구다. 왼쪽으로 연홍교회가 보인다. 이 앞으로 능선길이 있는데 시멘트로 포장된 산길이다. 이 산길을 중심으로 섬을 보면 마을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교회 아래 동남쪽의 섬 중심지 마을과 교회 바로 아래 서쪽에 위치한 몇 채의 가구가 있는 작은 마을과 학교 부근의 마을이 그것이다.
약 300여 년 전에 밀양 박씨가 섬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마을에는 김해 김씨가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현재는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교회 앞에 하얀색의 조립식 건물이 한 채 있다. 이 건물 옆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열녀비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면 왼쪽으로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나무로 된 계단길이다. 이 길은 바로 선착장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이 나무계단 길을 버리고 직진하면 오른쪽 밭 아래에 일군의 비석군이 있다. 부근에 정자쉼터가 있는데 이 옆에 송덕비와 함께 ‘김공휘대규송덕비(金公諱大圭頌德碑)’라는 비석이 있다. 신양간척지 매립간척공사와 농지조성에 공헌한 사람에 대한 공덕비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복지회관에 닿는다.
선착장 입구 대기소를 지나 계속 걸어가면 왼쪽에 허름한 창고 등의 시설물이 있고 끝자락에 잘 만든 집 한 채가 있다. 그리고 계속 가면 거금도 신양마을과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섬의 동쪽 끝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길은 왼쪽으로 꺾여 들어간다. 해안도로는 계속 이어진다. 북쪽 해변 끝에서 왼쪽으로 난 언덕길을 건너가면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보이는 마을이 거금도 배천마을이다.
원래는 돌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게 된 면적 0.55km2, 해안선 길이 4km의 작은 섬 ‘연홍도(連洪島)’. 섬 이름의 유래에는 몇 가지가 있다.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연(鳶)과 같다 하여 연홍(鳶洪)이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큰섬(거금도)과 맥이 이어졌다 하여 연홍(連洪)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신천리와 신양리가 물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며 섬의 중앙에 홍리라는 마을이 있어 연홍도라 부른다고도 한다. 또 하나는 섬의 지형이 말(馬)과 같다 하여 마도라 칭했다 한다. 일부에서는 1928년 김희홍 씨와 김치숙 씨가 들어와 연홍이라 개칭했다고도 한다.
이제 연홍도를 떠나갈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연홍도는 1973년도에 128가구 859명, 분교생이 132명이었다. 김양식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섬을 떠나게 되어 지금은 50호에 1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희망은 젊은이들인데, 교통과 문화가 발달된 녹동항과 바로 앞에 있는 어미섬인 거금도에만 귀농인들이 몰려들어서 아쉬운 마음이다. 이 섬의 살길은 어업과 낚시업인데 연홍도의 위치가 어중간하여 대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김양식이나 멸치잡이, 그리고 낚시는 먼 바다까지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잘 것 없는 이 섬에 오랫동안 폐교되어 방치된 분교가 연홍미술관으로 거듭나고 있어 다행이다. 섬을 찾아오는 관광객들과 이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콘텐츠 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거금도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이 귀농하리라 기대하면서 섬을 떠난다.
법정리는 신전리 인데????
수정하셔야겠네요
너무 오랫만에 거금도 닷컴을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