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 그리운 억만이 성!
누구에게나 기억에 남는 책 한 권쯤은 있는 법이다.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되어 함께 웃다 울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아쉬움에 잠겼던 책.
그리하여 벅찬 감동으로 새벽을 맞으며 자신이 한층 성숙해졌다고 절로 느끼게 하는 그런 책을 말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책이 몇 권 있는데(성웅 이순신, 무협소설 정협지, 보물섬, 삼총사 등등), 그 중에서도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기억된 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중학교 시절(1968년~1970년)에 몇 번이나 반복해 읽으면서 같은 처지를 공감하며 함께 아파했던 청춘 명랑소설(지금은 최요한이라는 작가가 썼으며 1972년도에 절판되었다는 사실 밖에 알 수 없는)인「억만이의 미소」이다.
할머니와 단 둘이 불우하게 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중학교 3학년인 억만이!
엄청 못생긴 얼굴에 거의 낙제생 수준의 공부실력, 여기에 건들거리며 놀기 좋아하는 억만이!
그러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그런 억만이에게도 탁월한 재주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학교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축구실력이었다. 또한 같은 또래에서는 드물게 힘이 센 장사로 씨름선수이기도 했고.
그런 억만이가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된 이웃 여학교의 아리따운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혼자 애태우지만 공부 잘하고 예쁜 그 여학생이 가난하고 못생긴 억만이를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이때부터 억만이의 파란만장한 짝사랑과 가슴앓이가 시작되고,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시작되는데………
오래되어 책 줄거리가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으니 소개한다.
억만이는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벽돌을 지고 위층으로 나르는 공사장엘 나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받은 돈을 배가 고파 다시 먹는데 다 써 버린다. 이에 절망하며 억만이는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공사장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겠다고 계획을 세우지만 이내 억만이는 그 계획을 취소하고 일상으로 되돌아오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사실 억만이는 팬티를 갈아입을 처지가 못 되어 팬티에 구멍이 나 있었는데 자기가 죽은 후에 짝사랑하고 있는 그「공부 잘하고 예쁘고 아리따운 그 여학생」이 자기가 입고 있는 구멍 난 팬티를 보게 될까봐서 차마 자살을 못하겠다고 억만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세대를 살면서(소설 속의 억만이는 나의 실제 나이보다 두세 살 더 먹은 것으로 계산된다) 같은 아픔을 겪고, 같은 꿈을 꾸면서 살았기에 어쩜 억만이는 나의 꿈이자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억만이를 알고 있는 우리세대 전부의 희망이었을 게다. 그래서 우리는 억만이와 아픔을 같이 나누었고, 억만이를 사랑했고, 억만이를 응원했던 것이다.
꿈과 희망은 고난을 먹고 자란다고 했다.
그 고난을 먹고 자란 우리의 희망이었던 「억만이 성」은 때론 생게망게하기도 하였지만 지금쯤은 분명히 사랑하는 그 여학생과 어느 하늘 아래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생게망게 - 하는 행동이나 말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양.
알콩달콩 - 아기자기하고 사이좋게 사는 모양.
성과 헤어진 지가 벌써 40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성의 얼굴은 눈에 선합니다.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