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훨씬 지난 초등학교로 기억한다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주섬주섬 책을 싸매고 흙먼짓길 뛰어와
소를 몰고 마을 뒷산에 오른다
소 고삐를 풀어두고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
목장성을 오르자는 몇몇 아이들과 의기투합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불구불 숲길을 따라가다 파성재에 도착한다
파성재는 넓다랗게 트여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거금도의 神聖(신성)인 적대봉의 비경을
마음껏 볼 수 있어 좋았다
파성 마을엔 적대봉 밑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있었는데
그곳은 피래미들이 많아 개구장이들 놀잇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물놀이에 싫증이 나면 우리는 목장성에 올랐다
어른들의 위험하다는 고함소리는 뒷전이었고
성이 낡고 부서진 곳을 지랫대 삼아 평평한 곳에 앉아 놀았다
城郭(성곽)은 북(파성)에서 남(진자무 마을)으로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져 있었으며
높이는 아이들 키 두세배는 족히 넘었을듯 싶었다
그때는 누가 이런 무거운 돌을 어떻게 운반해 왔으며
일률적으로 외벽이 꼭 맞도록 城壁(성벽)을
아주 정교하게 築城(축성)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누군가 나라의 戰亂(전란)시 필요한 軍馬(군마)를 사육하여
전쟁물자를 비축했다는 전설같은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목장성의 연대나 기원, 성곽의 구조와 성격, 축성 기법, 투입 인원,
운반 수송 능력, 성곽의 위치 선정과 배치 관계 등
체계적인 문헌사료들도 읽어보고 싶은데
목장성은 훼손되고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적잖이 아쉽기도 하다
*그때 파성 마을은 10여 가구 쯤으로 기억한다
[거금도 연혁에서 발췌한 글]
절이도 목장성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 206호이며
세조 12년(1466년) 2월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으로 기축
적대봉과 용두봉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남북방향으로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 등
포구 선군들의 지원을 받아 축성하였으며
약 800여필의 말을 사육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1470년 364필의 말을 방목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음
길이는 4,652m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며
축조방법으로 내벽은 먼저 바닥에 잡석을 깔고
그 위로 너비 30-80cm 두께 20-60cm 크기의 부정형 할석으로
80cm까지는 성돌의 열이 맞지 않게 막쌓기를 하였으며
그위로 너비30-50cm, 두께 15-30cm의 판석형 돌로 열을 맞추었다.
비교적 돌의 정연한 면을 바깥쪽으로 하여
성벽의 전체 면이 고르게 축조하였다
외벽은 3단의 계단식으로 축성되었는데
1단은 수직으로 80cm올라가서 내측으로 80cm 들어간다
2단은 80cm올라가서 내측으로 40cm 들어가고
3단은 다시120cm 올라간다.
이렇듯 조선시대 초기 축성된 흔치 않은 성이며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는 기록이 있음
*점마별감(點馬別監)*
조선시대에 각 도 목장에서 기르는 말을 點考(점고)하기 위해
봄·가을에 임시로 파견하던 司僕寺(사복시)의 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