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 둔벙치는 저잣거리였다.
오일장(2일, 7일)이 열리는 날이면 물물교환이나 상거래도 왕성하였다.
어머님 손을 잡고 따라가면
따끈한 돼지국밥과 달달한 팥죽도 먹을 수 있었고
당시 유행하는 노트나 헌책도 얻을 수 있었다.
장터는 난전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는데
잡화, 방물, 농기구, 죽세품, 그릇, 채소, 과일, 의류, 신발,
약초, 생선, 뻥튀기, 학용품 등
생활용품이나 공산품, 음식물, 농기구들이 다양했다.
대폿집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이들의 막걸리 잔이 부딪히고
공회당 앞 광장에서는 엿장수, 약장수의 신나는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제값을 받으려는 장꾼들과 한푼이라도 깎아보려는
촌로들간의 오가는 흥정도 즐겁고 정겨움이 뚝뚝 배어나왔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여기저기 사 모아둔
소쿠리, 타래 실, 낫, 괭이, 삽, 좀약, 쥐덫, 양재기 등을 들고
마을 사람들과 똘곡재를 넘어
십여리를 다시 걸어왔다.
조선 초기에는 일정한 기한없이 상거래가 이루어졌지만
조선 후기부터 오일장이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그때부터 시장을 형성하여 물물교환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그때의 오일장은 향촌의 큰 행사였고
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섬의 훈훈한 잔칫날이었다.
또 서로 떨어져 있던 친척들의 안부도 묻고,
이웃들에게 애경사를 알리기도 하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장날은 고향의 때묻지 않은 순박한 풍경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도 평화롭고 아늑하게 남아있다.
그때 둔벙치 장날의 난전이나 공회당은
마음 속에 영원할 것이다.
금산장(錦山場)이 녹동장(鹿洞場:3일,8일)에 비해
품질과 가격, 입지조건 등
시장의 다변화에 밀리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춰갔으며
난전이나 전통시장은 상가로 현대화되면서
완전히 그 실체를 잃어갔다
특히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물건을 운반해야 하는
선박의 한계에 결정적인 약점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권의 변화와 더불어 인구밀도가 높은 녹동이 도양읍으로 승격하면서
유동인구가 대폭 늘어났으며
부산 여수 거금도 금당도 평일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매 시간 운영되었고
오일장 보다는 현대식 상가나 음식점, 극장, 병원, 약국, 묙욕탕 등
문화시설이나 상거래가 활발하여
금산의 경제는 녹동 지역경제에 서서히 잠식되었으며
거금대교가 소록도, 녹동을 거쳐 개통되었기에
그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