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 배래
지금부터 10년도 더 지난 2001년 초여름인 7월 초.
여수세무서에 근무하는 동문들이 일요일을 택해 백도를 여행한다고 같이 갈 수 있으면 가잔다. 나는 군대를 만기 제대하던 해인 1979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 동안 거문도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고, 1984년엔가 여수세무서에 근무할 적에 직원들의 낚시 대회가 그곳 백도에서 개최되어 하룻밤을 묵은 경험이 있어 백도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마눌님과는 한 번도 거문도와 백도를 여행한 일이 없어 쾌히 승낙했다.
날씨마저도 우리의 여행을 축복해 주듯 구름한 점 없이 하늘은 맑고 바람도 없어 배에 오르는 사람마다의 표정이 평화롭다. 그래도 나는 안다. 바다의 생리를! 지금은 숨죽은 듯이 고요하지만 글쎄……
여행일정은
09:30 여수 출발해서 11:30 백도 도착
11:30 ~ 13:00 점심식사 및 휴식(술과 과일 및 도시락을 준비했으며 회는 현지에서 작살로 잡아 조달할 예정)
13:00 ~ 15:00 백도 관광(백도는 일반인의 상륙이 금지되어 있기에 선상관 광만 가능함)
15:00 백도 출발해서 17:00 여수 도착
오늘의 행사를 주관한 여수에서 안경점을 경영하는 백자호 동문 후배님과 선주 및 기관사를 포함한 우리 일행 40여명은 예정된 시간에 배를 출발시켰다. 80명이 정원인 관광선은 2대의 기관을 힘차게 돌리며 40노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물보라를 시원하게 내뿜으며 항구를 뒤로 밀어 낸다. 바야흐로 저 멀리 남쪽으로 110여 km 정도 떨어져 있는 절해의 고도인 백도를 향해 2시간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배는 점점 육지와 멀어지고 이제 점점이 떠 있는 한려수도의 섬들이 하나 둘씩 우리를 비켜가곤 하니 모처럼의 바다여행에 신이 난 사람들은 저절로 흥에 겨워 끼리끼리 삼삼오오로 모여 앉아 마치 이 세상에 근심걱정 하나 없는 듯한 행복한 표정으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안주삼아 술잔들을 돌리고 있는 모습들이 한없이 평화롭다. 그러나 어찌 알리요. 곧 다가올 우리의 운명을!
출항한 지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바다의 한 가운데로 나오니 보이는 것은 수평선뿐이요 떨어지는 것은 선수에 부딪쳐 일어나는 포말들의 잔해뿐이다. (이렇게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위」를 ‘배래’라고 한다)
이제 취기도 적당히 오르고 배 멀미도 조금씩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선실로 들어가 누워 무료함과 멀미를 달래고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술 한잔씩은 나눌 수 있는 우리 몇 사람은 선수를 지키며 호연지기를 다지고 있었다.
섬놈인 내가 예상한 대로 역시 바다는 육지에서 멀리 나오니 잔잔하지가 않다. 점점 풍랑은 거세지고 덩달아 선체의 로울링이 심해진다. 앞으로 1시간은 더 가야 되는데.
이때, 돌연 배의 후미에서 "불이야, 불이야!"하는 급한 외침과 함께 몇 사람의 아주머니들이 선수로 뛰어 온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우리는 뜨악하니 서로의 눈길만 교환하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후미 기관실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급하게 기관실로 뛰어가 보니 2대의 기관 중 1대의 기관에 불이 붙어 있고 기관사는 혼자서 열심히 바닷물을 길러 불을 끄고 있는 중이었다. 기관실에 딸린 방에 누워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대피하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고.
순간!
나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 불을 끌 수 있을까?
만약 끌 수 없다면?
주위에 섬 하나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화물선 하나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나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나 똑 같을 수밖에 절대적인 상황.
나머지 하나의 기관마저 꺼 버리고 진화작업을 하는 동안 동력을 상실한 배는 높아지는 파도에 대책 없이 흔들거리고 이제야 상황을 알아 챈 사람들의 두려움에 찬 아우성과 멀미에 의한 구토 등으로 한동안 선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한번 상상해 보라. 검붉게 타오르며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을 피해 너 나 할 것 없이 살아보겠다고 바다로 풍덩 풍덩 뛰어 들어가는 지옥도의 풍경을!
바다로 뛰어 든 사람들은 하나 둘씩 흩어지고 타다 남은 배는 서서히 가라앉고! 조금 후에는 언제 그랬냐 싶게 평상시처럼 물결만 출렁이는 바다의 모습을.
그러나 역시 뱃사람들은 달랐다.
선장이 나서더니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우리 몇몇은 열심히 바닷물을 길어 올려 기계에 끼얹고……
기름에 붙은 불이라 쉬이 꺼지지도 않았지만 물을 계속 끼얹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는 못하였다.
그러기를 얼마였을까?
계속 물을 길어 올리는 작업을 하면서도 내 머리 속은 온통 자식들 생각뿐이다.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대학교 1년 수료하고 의경으로 자원해서 군에 간 아들 녀석과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딸이 우리 없이 이 험한 풍파를 헤치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등등 좋지 않은 쪽으로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다행히 불은 더 번지지 못하고 꺼졌다. 공포에 젖은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선실에서 꼼짝을 않는다.
모든 상황을 수습하고 불이 난 기관을 작동시키지 못한 채 나머지 1대의 기관에 시동을 걸어 배를 출발시키니 역시나 40노트의 속력을 자랑하던 배의 속도가 15노트로 뚝 떨어져 버리지 않는가!
드디어 백도에 도착!
당초의 예정보다 약 2시간이나 늦게 13:20분에 도착한 것이다.
선수만 접안할 수 있는 백도의 선착장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씩을 내려주니 이제는 살았다라고 좋아해야 할 사람들이 웬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 멀미로 탈진하여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누울 자리부터 찾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어떻게 육지로 되돌아 갈 것인가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해경에 조난신고를 하여 군함을 오게 하자.”, “공군에 신고하여 헬기를 보내 달라고 하자.”, “백도 전체를 그대로 육지로 옮겨 갈 방법은 없느냐?”는 등 극도의 배 멀미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백도는 바위섬이기 때문에 키가 큰 나무들이 없어 배 멀미와 더위로 심신이 탈진한 사람들을 가려 줄 그늘이 없는 것도 그들이 더욱 두려워하는 이유의 하나였다.
아, 이를 어찌 할 것인가?
그때 오늘의 행사를 주관한 백자호 후배님이 “자, 힘들어도 조금만 참읍시다. 곧, 맛있는 횟감을 잡아 올 테니 조금만 참고 힘 내십시요!”라고 하더니 선장과 기관사를 대동하고 배를 출발시켰다. 반신반의하며 30여분을 기다렸을까?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월척도 넘는 이름 모를 고기를 10여 마리 이상을 잡아왔다!
섬에 내려 휴식을 취하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사람들에게 그 고기들을 안주삼아 소주를 몇 잔씩 돌리니 그 때서야 사람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생기를 찾는 것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여 예정시간보다는 늦어 졌지만 계획한 백도관광을 마치고 여수항에 되돌아오니 그 뜨거웠던 7월의 태양이 막 서산을 넘어가면서 온 바다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백사장, 아까 그때 심정이 어떻던가?”
백사장이 웃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에이, 선배님. 괜찮아요. 배에 구명조끼가 80개나 있어 한 사람에게 2개씩 입혀 바다에 던져 놓으면 한 이틀은 끄덕없으니까요(아무렇지 않으니까요)!”
배래 :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위.
두멍 : ① 물을 많이 담아 두고 쓰는 큰 가마나 독. ② 깊고 먼 바다를 비유 적으로 이르는 말.
내일부터 10월 3일까지 추석연휴로 정했다.
근래 몇 년동안 못보았던 감성이 손맛이나 느껴볼까?
다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