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찾아오는집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지하골 마을이다.
예전에 이 마을 황토를 사용하여 기와를 구웠다고 하는데 그때 불렀던 속칭 그대로가 마을 지명이 되었단다.
지하골 마을은 총10가구가 있는데 우리 농촌이 그렇듯이 대부분 노인들이고 젊은 사람은 거의 없는데 작년 이맘때 내가 이곳으로 이사해 오자 마을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왔다며 다들 좋아 하신다.
우리집은 지하골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집 뒤쪽엔 대나무 숲이 있고 대나무숲 뒤이어 소나무 밤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살랑 살랑 바람이 불어오는 날은 댓잎 부딪치는 서걱거린 소리가 들려오고 솔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 메운다.
금년 여름 태풍 때 하늘 찌를 듯이 솟아올랐던 통대들이 포탄을 맞은듯 허리가 꺾이는 처참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내년 봄비 뒤엔 힘찬 죽순이 쑥쑥 자라나 그 자리를 메워 나갈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흥미로운 일이 있어나고 있다.
철 이른 폭설로 온천지가 하얀 눈 이불을 쓰고 있자 야산에 살던 고라니가 춥고 배가 고팠을까 아니면 동무가 없어 외로웠을까
밤이면 우리집 뒤쪽 숲으로 부터 들어와서 마당을 한 바퀴 돌고 간다.
아직은 낯 설은 타향에 외로운 나의 심사를 알고 같이 놀자고 찾아온 것 같아 내가 곁으로 가고자 하면 녀석은 날 피해 황망히 도망치고 만다.
사람이 사람을 제대로 믿지 못한데 하물며 산짐승인 녀석이 어찌 사람을 믿겠는가!
고라니야!
우리집은 너를 위해 담장도 없단다.
언제든 찾아와서 마음껏 뛰놀다 가렴,
고라니가 떠나간 마당엔 녀석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눈 위에 찍혀있다.
김구선생이 좋아하셨다는 서산대사의 명언에
“눈길을 걸을 때는 함부러 다니지 마라 지금 네가 가는 길은 다음에 오는 사람의 길잡이가 되느니” 했는데
지금까지 내 인생행로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기며 여기까지 걸어 왔는데 과연 난 이 시대에 어떤 족적을 남겨서 내 뒷사람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인가!
밤이 깊어지나 보다.
대나무숲 사이로 눈발에 시린 시월그믐달이 희뿌옇게 빛을 뿌린다.
그 빛을 받아 소복이 쌓인 눈은 더 아름다운 은하의 세계를 연출하고 난 그 광경에 매료 되어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저 멀리 들판 넘어 산 아래 동네는 깊은 잠속에 빠져 있고 눈 속에 묻힌 가로등 불빛만 깜박 깜박 졸고 있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