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고흥선산/창극통해 판소리 현대적 접목(국민일보 1994-04-30)
동편제의 우람한 소리와 서편제의 아련한 소리등 판소리의 여러 바디를 정교하게 다시 짜 「동초제」를 형성한 동초 김연수명창.
신재효이후 판소리 다섯바탕의 사설을 정리,판소리 음악성에 문학성을 가미한 인간문화재(64년 지정).
그는 1907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 거금도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혀 있다.
1백80여개 섬을 소작농처럼 거느린 와우형의 고흥반도.녹동항은 서울에서 1천2백여리.그 곳에서 철선을 타고 소록도를 거쳐 거금도 금진항까지는 뱃길로 20여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먼길이다.
거금도로 향하면서 기자는 두가지 의구심을 품고 떠났다.14세까지 한학을 공부한뒤 고흥보통학교를 나와 서울 중동고보까지 유학했다는 학력이고,또 하나는 비가비(양반출신이나 한양으로 판소리에 능하여 광대가 된 사람을 지칭.재인계급 광대와 구분하기 위한 명칭)라는 기록이 「생선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금진항에 도착하니 거금도의 특산물인 파래 양파를 가득실은 트럭들이 육지로 나가기 위해 승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항구에서 학교 농협 우체국 주점 다방등이 즐비한 면소재지까지는 승용차로 10여분 걸리는 거리.
금산면사무소 진행화총무계장(42)의 안내를 받아 김연수가 영면하고 있는 무덤부터 찾았다.
적대봉에서 뻗어 나온 용두산이 넉넉하게 마을과 들판을 끌어 안고 있는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앞산 중턱에 그의 묘가 있다.죽어 고향에 돌아온 김연수는 자신이 태어난 중촌마을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목숨을 건네받듯 김연수의 바디를 전수받은 유일한 동초제 인간문화재 오정숙명창(60)은 『자리가 너무 차다』는 스승의 선몽에 소스라쳐 82년 서울 장지로부터 이곳까지 이장해 비석과 상석과 석등을 고루 갖춰 놓았다.
무덤에서 내려와 마을 들머리에 김연수가 놓았다는 「연수교」를 둘러 보았다.풍우에 휩쓸려간 다리를 그의 제자들이 다시 시멘트다리로 교체해 놓았다.
중촌마을 한복판을 가로 질러 오른 용두산 자락 외딴곳에 위치한 그의 생가터는 마늘밭으로 변해 있다.그 곳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앞산 중턱에 있는 그의 무덤이 보인다.
무덤과는 2㎞도 못미치는 거리다.이 자리서 태어나 앞산에 묻히기까지 67년의 세월이 허망한 것만은 아니다.그는 갔어도 소리는 남았고 별자리처럼 빛나던 명창이 유택조차 지니지 못한 것에 비하면 그는 죽어서도 행복한 명창이다.
김연수의 유일한 고향친구 노해상노인(86)이 살고 있는 연소마을을 찾아갔다.
연소리 가는 길목,평지마을 입구에 프로레슬러 김일씨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그 마을엔 김일외에도 김광식 김주용 김수완 윤장윤 김세만등 씨름·레슬러 선수가 배출된 「장사마을」이라고 한다.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은 북을 곁에 두고 덩그런 집을 지키고 있는 노노인은 김연수와 함께 유성준명창을 찾아가 수궁가를 보름동안 배웠던 소리동문이자 한학을 함께 배웠던 서당친구다.
노노인은 서당 훈장을 했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소릿길을 걷지 못했다지만 그가 들려 주는 단가 한대목은 동편소리에 성음도 창창하다.
그는 김연수의 선친 김병선의 직업뿐만 아니라,김연수의 학력 가족관계 판소리 사설정리 과정까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충격적인 증언을 한뒤 『인간문화재면 국창이나 마찬가지며 이제는 고인이 된만큼 기사는 쓰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거듭했다.
『연수는 되로 배워 말(두)로 풀어 먹을 정도로 머리는 좋았제』라며 명석한 두뇌에 집념이 강한 노력파였다고 한다.
상경후 중동고등학교에 학력조회를 해본 결과 1937년도를 전후한 졸업생명단에 김연수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었다.「가시」처럼 걸리던 의구심을 현장확인을 통해 뽑아낼 수 있었다.
김연수는,선친의 작업과 학력이야 어떻든 심혈을 쏟은 창극운동을 통해 판소리의 현대적 접목을 가능케한 「문화관리자」로서 판소리사에 자리매김되고 있다.
「나팔 달린 축음기」를 통하여 송만갑 이동백등 국창들의 소리를 듣고 공부하던 김연수는 스물아홉살때 「진품의 소리」를 찾아 나섰다.
당시 순천군수 성정수관사에 머물고 있던 유성준을 찾아가 수궁가를 배웠다.
한학을 통해 사설의 이해가 빨랐던 김연수는 스승의 사설 발음에 이의를 제기하곤 했다.
어느날 수궁가중 용왕진찰하는 대목을 배울때,유성준이 「차전 연실」을 「차전 연시」하고 발음하자 『차전 연시가 아니고 차전 연실이 맞을 것 같습니다.차전이란 질경이 씨를 말하며 연실이란 연꽃열매인데 두가지 다 설사나 눈병등에 쓰이는 한약재입니다』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가 치솟은 유성준은 『이놈아 하라는대로 해.그렇게 유식한 놈이 소리는 왜 배우려고 하느냐.과거를 보던지 정승판서를 하던지 해야지』
유성준 문하를 떠난 김연수는 그 길로 상경,조선성악연구회 연구생으로 들어가 송만갑 정정열명창으로부터 판소리 다섯바탕을 배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판소리 사설을 이해하는 이면(문학성)에 강했던 김연수와 한문성어가 많은 사설의 이해보다는 소리(음악성)에 뛰어난 임방울은 선의의 경쟁자였다.
김연수는 임방울에게 『이면에 맞지않게 소리한다』고 퉁을 주었고 임방울은 『이면 찾다가 소리 버린다』고 응수했다.
그때부터 김연수는 구전심수로 전해온 판소리 사설에 오자와 와전이 많은 것을 깨닿고 올바른 창본을 만들 것을 결심하고 틈틈이 정리하여 생전에 춘향가 창본은 출판했으나 나머지 4권은 사후에 빛을 보게 되었다(74년 문화재관리국 출판).
김연수가 창극계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조선창극단 「장화홍련전」의 배좌수역을 맡으면서부터였으며,해방후 김연수창극단을 조직,「단종과 사육신」에서 성삼문역을 맡아 관록을 과시했다.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이사,50년 대한국악원장,62년 국립극단장을 맡아 국악 중흥과 창극 재건에 진력했으나 여성국극의 위세에 꺾여 창극부진을 타개하지 못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면서 박봉선 오정숙등 후진을 통해 동초제 소리를 전수시켰다.
김연수는 환갑날 사모관대쓰고 결혼한 임임신여사(국악인 임춘앵의 언니,여성국극인 김진진 김경수 자매의 어머니)집에서 74년3월9일 소리인생을 접었다.
김연수가 세상을 떠나던날 동초제를 잇고 있는 그의 제자 오정숙은 국립극장 소극장 무대에서 「수궁가」완창을 하고 있었다.
오정숙은 그날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자신과 함께 무대에 서야할 고수 김동준씨가 나타나지 않고 「수궁가」는 슬픈 소리가 아닌데도 객석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렸다는 것.
공연이 끝나자 김연수의 지정고수 이정업이 『갔어 김연수가 갔어』라는 말에 스승의 죽음을 알고 울었다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큰 그늘이 되었을 텐데…국악계의 어른들이 많았으면 지금처럼 창극활동이 지지부진하지는 않을텐데…』 환갑을 넘긴 나이건만 투정부리듯 아쉬움을 털어 놓는다.
오정숙은 『선생님의 집안 내력이나 이력에 대해서는 물어 볼 수도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며 질문의 핵심을 피했다.
동초제를 잇고 있는 인간문화재 오정숙은 1935년 외가가 있던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선친을 따라 전주다.
성음이 맑고 성량이 풍부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귀동냥한 판소리를 흥얼거려 어른들로부터 혀끝에 침이 마르지 않는 칭찬을 들었다.
열네살때 아버지 오삼용의 손에 이끌려 박옥진 성창순등이 활동하던 아성창극단에 입단,소녀명창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김연수창극단으로 옮겨 4년간 단원으로 있으면서 춘향전을 배웠다.열아홉살땐 박보아 병기 옥진남매가 이끄는 삼성여성국극단에 들어가 2년동안 활동하는등 10여년간 창극무대를 누볐다.
21세부터 판소리에 주력하기 위해 김소희선생에게 「심청가」를 사사했고 59년부터 동초 전수생이 되어 판소리 다섯바탕을 뗐다.
소리 시셈과 집념이 강한 그녀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섯마당을 완창한 첫여류명창으로 판소리계에 우뚝 선다.
72년 「춘향가」 완창을 시작으로 「흥보가」「수궁가」「심청가」「적벽가」등을 완창하여 갈채를 받았고 지난 3월26일에도 「수궁가」 완창무대를 갖는 열정을 보였다.
75년 전주대사습 장원,83년 남도문화제 대통령상,84 KBS국악대상등 굵직굵직한 상을 휩쓸었고 그의 발길이 가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해외공연도 다녔다.
그녀가 가장 잊지 못하는 공연은 90년10월 통일음악제에서 심청가로 평양시민을 울린 것이라고 한다.
그의 뒤를 잇는 제자들은 이일주 민소완 조소녀 은희진 김성애 김소소 연극배우강선숙등 판소리계의 중견과 신예들이 수두룩하다.
작은 체구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의 소리는 무르익을대로 무르익고 곰삭았다.그것은 뛰어난 발림과 정확한 아니리가 뒷받침되어 더욱 돋보인다.<글=이규섭편집부장·사진=윤여홍기자>
◎성음에 따른용어(국악 토막상식)
노량목=기교에 치우쳐 넘치고 흘러내리는 소리
마른목=아주 깔깔하게 말라버린 목소리
굳은목=수리성에 굴곡이 없이 아주 뻣뻣하고 멋없이 나오는 목소리
엮는목=사쁜사쁜 아주 멋있게 엮어내는 목소리
깎는목=소리를 하다가 모가 나게 깎아 내는 듯한 목소리
짜는목=평범하게 소리를 하다가 쥐어 짜듯 맛있게 내는 목소리
찌른목=최상성을 내어 높이 찔러내는 목소리
파는목=아래로 파고 들듯 내는 목소리
둥근목=막힘이 없고 원만하게 내는 목소리
너느목=소리를 쭉쭉 뻗어 널어 놓는듯한 목소리
튀는목=소리를 평성으로 하다가 갑자기 위로 튀어나오는 목소리
엎는목=소리를 바로 해나가다가 한번 엎어 보는 목소리
조으는목=목소리를 맺어 떼려고바싹 조아 들이는 목소리
뽑스린목=평탄하게 나가다가 휘감아 뽑아 올리는 목소리.
◆판소리 다섯 유파 특징은…
◇동편제=섬진강을 기준으로 동쪽 소리를 동편제라 한다.기교를 부리지 않고 목으로 욱이는(모으는) 소리를 말한다.기교를 쓰지 않기 때문에 동편제 소리를 내려면 풍부한 성량을 타고 나야 한다.장단은 템포가 빠른 편이다.속도가 빨라 발림(창자의 몸짓,손짓)할 여유가 줄어들어 연기면에서는 건조한 편이다.장단 마디끝을 졸라매는 정도를 달리하는 것으로 단조로움을 상쇄시키기도 한다.
◇서편제=섬진강 서쪽소리로 선천적 음량에 의존하는 동편제와 달리 후천적 노력이 승패를 좌우한다.가공과 기교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동편제에 비해 소리가 애상적이고 소리의 끝부분이 길게 늘어진다.소리가 늘어져 발림할 여유가 그만큼 많아 연기도 큰 볼거리중 하나다.
◇중고제=동쪽도 서쪽도 아닌 중간의 소리지만 동편제에 가까운 인상이다.동편제와 마찬가지로 성량이 풍부한 사람에 유리하다.중고제 시조는 모흥갑이었고 근세에는 송만갑이 꼽히나 그 후로는 기법을 쓰는 이가 거의 없어 맥이 거의 끊어져가는 유파다.
◇강산제=중고제와 마찬가지로 비동비서를 취한다.소리의 큰 맥은 우렁찬 동편제를 닮았지만 서편제의 기교를 취해 중고제보다 음색이 더 다양한 편이다.
◇동초제=송만갑의 제자였던 고 김연수 명창의 창법을 일컫는다.동초는 그의 아호다.동편제에 가까운 소리이나 강산제보다 더 뚜렷한 발음과 조리에 맞는 언어를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