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연수 명창의 아호는 동초다.
그는 1907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14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에서 신학문을 하였고,
이로써 새로운 세계관에 눈 뜨게 되었다. 1935년 순천에 체류중인 당대의 명창 유성준 문하에서 <수중가> 한판을 떼었고,
동년 7월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 송만갑 문하에 입문하여 <흥부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정정렬 문하에서 <적벽가>와 <춘향가>를 전수하였다.
이로서 동초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섭렵하여 판소리의 대강을 확인, 이로써 여생을 판소리 연구와 전수에 바치기로 뜻을 세웠다.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이사가 되었고, 동 기관의 전속단체인 <조선 창극좌> 대표가 되면서 창극 중흥에 큰 뜻을 펴기 시작했다.
동년 3월, 일본 <빅타>사의 전속가수가 되어, 5대가의 더늠대목을 뽑아서 소리판 30장을 출간, 1940년엔 O.K사의 전속가수로서 <심청가> 전편과 <장끼타령> 한질을 출간한 것이 그의 출세작이다.
동초는 1945년 <김연수창극단>, 1950년엔 <우리 국악단>을 만들어 그의 창극이론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동초는 흔히 말하는 <창극 판소리>의 새로운 창법을 트기 시작하여 판소리계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이르켰다.
여기에는 많은 반발과 명창인 <임방울>과는 그 견해의 차로 늘 불편한 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초는 새로운 시대에 창극이 부응하자면 <창극 판소리>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그의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의 공은 막중하며, 선각사상가라 불러야 할 것이다.
동초는 1957년에는 대한국악원장, 1958년에는 ITI한국본부 부위원장, 1962년에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로 지정 받았다.
동초가 평소에 판소리 5바탕을 심혈을 드려 정리 출판한 일은 동리 신재효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으로 판소리사에 크게 빛나는 것이라 믿는다.
특히 사설에 일일이 장단을 붙이고, 발성까지 지도해 놓아서 후생들의 판소리 입문에 크게 돕는 일을 하였다. 동초 김연수가 판소리와 창극에 공헌한 업적은 말할 것도 없이 많다.
그중 또 하나가 동아방송에서 1967년부터 시작한 판소리 5바탕 전판을 녹음하여 140여회에 걸쳐 연속방송한 것은 그의 초인적이며 기록적인 업적으로 본다. 이 일은 판소리사에 영원히 남을 금자탑이다
[동초의 약력 ]
◇ 1907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출생 14세까지 한학수업.
◇ 1923 -1930 서울 중동중학교를 졸업한후 귀향하여 축음기로 유성기판을 들으면서 7년간 판소리를 독학.
◇ 1935 판소리의 깊은 뜻을 품고 순천에 있던 유 성준선생을 찾아가 수궁가 한바탕을 수득, 동년 7월 상경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가입하고 송만갑선생 문하에 입문,흥보가와 심청가 각 한바탕씩을 수득.
◇ 1936 정정렬선생에게 적벽가와 춘향가 각 한바탕을 수득,
◇ 1937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의 대표로 취임하여 이를 시발로
◇ 1974년 타계할때까지 창극운동을 주도하였고 동년3월 빅타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어 이후 3년간 판소리 다섯마당의 중요대목등을 비롯하여 30여 음반을 취입하였다.
◇ 1938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을 주축으로한 재일동포위문단을 조직하여 이동백, 김창룡, 오태석, 한성준, 박록주씨등과 같이 일본 각지를 순회공연하여 조국애를 고취시킴.
◇ 1939 조선창극단과 만주동포를 위문하기 위해 만주일대를 순회공연.
◇ 1940 일본 OK레코드사에서 창극 심청가를 비롯하여 판소리 장끼타령과 판소리 다섯바탕등의 음반을 취입.
◇ 1945 김연수 창극단을 조직 국극발전에 헌신.
◇ 1950 우리국악단을 조직.
◇ 1950 - 1963 오정숙에게 판소리 다섯바탕을 가르침.
◇ 1957 대한국악원 원장 취임.
◇ 1958 국제극예술협회 I.T.I 한국본부 부위원장에 피선.
◇ 1959 대한국악원 원장 재취임. 동년 9월 국악 공로상을 수상.
◇ 1962 국립창극단 단장에 취임.
◇ 1963 국립창극단을 주축으로한 재일동포 위문단을 조직하여 박귀희 외 30여명과 같이 일본 각지를 순회공연.
◇ 1964 주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음.
◇ 1966 국악진흥의 공로로 전남 고흥군 <군민의 상>을 수상. 제5회 대한민국 공보부 국악상을 수상.
◇ 1967 동아방송국에 판소리 다섯바탕 전판을 녹음하여 140회에 걸쳐 연속방송. 문화재 관리국에서 <김연수 창본 춘향가>가 출간됨. 오정숙이 김연수제 춘향가 전수장학생이 됨.
◇ 1960 - 1970 케네디레코드사에서 음반취입.
◇ 1974. 7 지구레코드사에서 창극 춘향전 음반을 취입.
◇ 1974. 3. 9 신림동자택에서 간암으로 타계.
◇ 1974. 7 문화재 관리국에서 <김연수 창본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가 출간됨.
◇ 1991. 11 한국고음반연구회에서 판소리선집 음반(비매품)에 김연수의 유성기음반을 최초로 복원함.
◇ 1993. 7 서울음반에서 "판소리 인간문화재 김연수 초기녹음선집" 음반을 출반함.
◇ 1994, 8 지구레코드사에서 1966년에 발매했던 김연수 판소리 다섯바탕 눈대목 음반을 재발매 하였다.
그는 1907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14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에서 신학문을 하였고,
이로써 새로운 세계관에 눈 뜨게 되었다. 1935년 순천에 체류중인 당대의 명창 유성준 문하에서 <수중가> 한판을 떼었고,
동년 7월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 송만갑 문하에 입문하여 <흥부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정정렬 문하에서 <적벽가>와 <춘향가>를 전수하였다.
이로서 동초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섭렵하여 판소리의 대강을 확인, 이로써 여생을 판소리 연구와 전수에 바치기로 뜻을 세웠다.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이사가 되었고, 동 기관의 전속단체인 <조선 창극좌> 대표가 되면서 창극 중흥에 큰 뜻을 펴기 시작했다.
동년 3월, 일본 <빅타>사의 전속가수가 되어, 5대가의 더늠대목을 뽑아서 소리판 30장을 출간, 1940년엔 O.K사의 전속가수로서 <심청가> 전편과 <장끼타령> 한질을 출간한 것이 그의 출세작이다.
동초는 1945년 <김연수창극단>, 1950년엔 <우리 국악단>을 만들어 그의 창극이론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동초는 흔히 말하는 <창극 판소리>의 새로운 창법을 트기 시작하여 판소리계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이르켰다.
여기에는 많은 반발과 명창인 <임방울>과는 그 견해의 차로 늘 불편한 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초는 새로운 시대에 창극이 부응하자면 <창극 판소리>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그의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의 공은 막중하며, 선각사상가라 불러야 할 것이다.
동초는 1957년에는 대한국악원장, 1958년에는 ITI한국본부 부위원장, 1962년에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로 지정 받았다.
동초가 평소에 판소리 5바탕을 심혈을 드려 정리 출판한 일은 동리 신재효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으로 판소리사에 크게 빛나는 것이라 믿는다.
특히 사설에 일일이 장단을 붙이고, 발성까지 지도해 놓아서 후생들의 판소리 입문에 크게 돕는 일을 하였다. 동초 김연수가 판소리와 창극에 공헌한 업적은 말할 것도 없이 많다.
그중 또 하나가 동아방송에서 1967년부터 시작한 판소리 5바탕 전판을 녹음하여 140여회에 걸쳐 연속방송한 것은 그의 초인적이며 기록적인 업적으로 본다. 이 일은 판소리사에 영원히 남을 금자탑이다
[동초의 약력 ]
◇ 1907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출생 14세까지 한학수업.
◇ 1923 -1930 서울 중동중학교를 졸업한후 귀향하여 축음기로 유성기판을 들으면서 7년간 판소리를 독학.
◇ 1935 판소리의 깊은 뜻을 품고 순천에 있던 유 성준선생을 찾아가 수궁가 한바탕을 수득, 동년 7월 상경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가입하고 송만갑선생 문하에 입문,흥보가와 심청가 각 한바탕씩을 수득.
◇ 1936 정정렬선생에게 적벽가와 춘향가 각 한바탕을 수득,
◇ 1937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의 대표로 취임하여 이를 시발로
◇ 1974년 타계할때까지 창극운동을 주도하였고 동년3월 빅타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어 이후 3년간 판소리 다섯마당의 중요대목등을 비롯하여 30여 음반을 취입하였다.
◇ 1938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을 주축으로한 재일동포위문단을 조직하여 이동백, 김창룡, 오태석, 한성준, 박록주씨등과 같이 일본 각지를 순회공연하여 조국애를 고취시킴.
◇ 1939 조선창극단과 만주동포를 위문하기 위해 만주일대를 순회공연.
◇ 1940 일본 OK레코드사에서 창극 심청가를 비롯하여 판소리 장끼타령과 판소리 다섯바탕등의 음반을 취입.
◇ 1945 김연수 창극단을 조직 국극발전에 헌신.
◇ 1950 우리국악단을 조직.
◇ 1950 - 1963 오정숙에게 판소리 다섯바탕을 가르침.
◇ 1957 대한국악원 원장 취임.
◇ 1958 국제극예술협회 I.T.I 한국본부 부위원장에 피선.
◇ 1959 대한국악원 원장 재취임. 동년 9월 국악 공로상을 수상.
◇ 1962 국립창극단 단장에 취임.
◇ 1963 국립창극단을 주축으로한 재일동포 위문단을 조직하여 박귀희 외 30여명과 같이 일본 각지를 순회공연.
◇ 1964 주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음.
◇ 1966 국악진흥의 공로로 전남 고흥군 <군민의 상>을 수상. 제5회 대한민국 공보부 국악상을 수상.
◇ 1967 동아방송국에 판소리 다섯바탕 전판을 녹음하여 140회에 걸쳐 연속방송. 문화재 관리국에서 <김연수 창본 춘향가>가 출간됨. 오정숙이 김연수제 춘향가 전수장학생이 됨.
◇ 1960 - 1970 케네디레코드사에서 음반취입.
◇ 1974. 7 지구레코드사에서 창극 춘향전 음반을 취입.
◇ 1974. 3. 9 신림동자택에서 간암으로 타계.
◇ 1974. 7 문화재 관리국에서 <김연수 창본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가 출간됨.
◇ 1991. 11 한국고음반연구회에서 판소리선집 음반(비매품)에 김연수의 유성기음반을 최초로 복원함.
◇ 1993. 7 서울음반에서 "판소리 인간문화재 김연수 초기녹음선집" 음반을 출반함.
◇ 1994, 8 지구레코드사에서 1966년에 발매했던 김연수 판소리 다섯바탕 눈대목 음반을 재발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