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연합뉴스) 전성옥기자 = '그 사람 당골네 집안이야.' 명창 임방울과 소리판에서 쌍벽을 이뤘던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1907-1974)의 소리 내력을 더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전남 고흥 앞바다 거금도(금산면)를 찾아갔을 때였다. 이 지방 노인들은 당대 명창으로서 판소리 다섯 바탕의 사설을 정리해 판소리 사(史)에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김연수에 대해, 당골네 사람이란 것부터 먼저 기억에 떠올렸다. 김연수가 무당 집안이었다는 것은 여태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거금도 답사길은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그의 출신과 행적을 밝혀주는 단초가 됐으며 당골네 집안으로서 온갖 설움을 받았을 김연수 가족 이면사의 아픔도 함께 느껴볼 수 있었다.
1967년 김연수가 발행한 「창본 춘향가」에서 밝힌 자필 이력서에 의하면 그는 1907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태어나 9년간 한학을 수학하고, 20살에 서울로 가 중동중학교를 다녔다. 그당시 양반집 자제로서나 가능했던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뒤 고향으로 돌아와 7년간 축음기로 혼자 소리공부를 했다. 1935년에는 순천에 있던 유성준(1874-1949)에게 「수궁가」를 공부하고 그해 7월 상경, 조선성악연구회에 들어가 송만갑(1865-1939)에게 「흥부가」와 「심청가」를, 이듬해 정정렬(1875-1938) 문하에서 「적벽가」와「춘향가」를 사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격적인 소리공부에 나선 지 불과 2년만에 근세 5명창으로부터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익히는 저력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소리'에 뜻을 둔 것이나 범상치 않은 예술적 재능때문에 그의 출신은 줄곧 호기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확인 결과, 김연수는 거금도에서 대대로 내려온 세습무(世襲巫) 집안 출신이기에 오로지 `소리'만이 입신(立身)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기게 됐고 세습무로서의 `끼' 즉,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동초는 당골 아들이라 해서 모두가 하대를 했지. 나만 동초하고 서로 말을 높이면서 지냈어. 동초는 어릴 때부터 유달리 영특했제. 집안은 비록 당골네였지만 당골판이 거금도 전체인데다 당시 인구가 2만2천여 명이었으니까 살림살이는 넉넉했어. 그래서 서당도 다니고 서울로 유학도 갈 수 있었을 게야' 김연수보다 3살 아래로 금산면장을 지냈으며 김연수의 묘비를 쓴 김영우(金永禹.89.금산면 신전리)씨는 그의 가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2남1녀 중 맏이였고 2남3녀의 자식을 두었다는 김연수의 호적은 금산면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무당 집안이라는 아픈 기억 때문에 김연수 자신이거나 후손들이 호적을 옮겼기 때문일 것으로 금산면 직원들은 추측하고 있다.
지금도 소리꾼하면 무당이나 기생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소리꾼은 대부분 무당 집안 출신이고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기생조합)'이 있어 여자 소리꾼들이 그곳에서 소리수업을 했기 때문에 소리꾼이라는 이미지가 옛날 무당이나 기생과 중복되어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무당 가계의 슬픔은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조선의 법으로, 노비.승려.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工匠)을 팔천(八賤)이라 하였는데, 이 여덟 가지 천민 중에서도 가장 수악한 것이 백정과 무당이었으 니. 이들은 사람축에 끼일 수가 없어, 일반 양인들이 사는 부성(府城)이나 마을 안은 물론이요. 그 언저리에서도 감히 살지 못하고, 저만큼 물러나 귀빠진 곳에 저희끼리 웅크리며 어깨를 부비고 살아야만 하였다.
양반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민촌의 마을 사람 누구에게라도 존대로 말을 바쳐 써야만 하였으며 심지어는 어린아이에게조차 반드시 경어를 써야 했다. < 중략 > 무당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과는 혼인할 수 없다고,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당골네 집안끼리 무계혼(巫系婚)만을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을 낳으면 훗날 그는 무부(巫夫)가 되고, 딸을 낳으면 무녀(巫女)가 되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자 살아보그라. 살자먼 설운 일 많은 거이 한세상이라. 여늬 사람도 이 세상을 진세상이라고, 울고 울어서 질퍽헌 세상이라고, 눈물이 젖어서 무겁다고 허는디, 조선 팔도에 팔천(八賤) 사천(四賤) 무당의 자석으로 나서, 올 디 갈 디 없이 무당 서방이 되야야 허는 우리 같은 사람의 한세상에, 마른 일보다 진일이 더 많은 것은 불을 보디끼 훤헌 일 아니겄냐. 그럴 때는 축축허다고, 젖었다고, 설웁다고 울지 말고, 그저 내가 한낱 소리니라 허고는, 귀신 데불고 한 가락 장고 소리로 놀고 한 가락 피리 소리로 놀아라. 천대허고 박대허는 사람 소리는 듣지 말고, 니 소리 듣고 좋아라 화답허는 귀신들허고 가락으로 놀아. 축축허고 젖은 육신 살어서는 못 벗는 게 사램이지만, 너는 그 육신을 고치 삼어 은실 같고 금실 같은 가락으로 너를 다 뽑아 내그라.안 좋냐?'』 동초 김연수는 그렇게 은실 같고 금실 같은 가락으로 `동초제'라는 판소리 유파를 형성하고 판소리 다섯 바탕의 사설집도 출간해 판소리사에 굵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서러웠다. 74년 3월 9일 세상을 떠난 그는 김포 공동묘지에 묻혀있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수제자 오정숙 명창은 9년뒤에 스승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 금산면의 안산(案山)인 용두봉으로 이장하려 했다. 이때 뜻하지 않은 걸림돌이 생겨났다. 동네 유림들이 일어선 것이다. 어떻게 당골네 자식을 마을 앞산에 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 신사가 자리할 정도로 명당 터인 그곳에 천한 뼈를 묻을 수 있느냐고 다그쳤다.
고흥군청 뒤에 있는 `인간문화재 5호 동초 김연수선생 기념비'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당골네 집안에, 광대 출신을 군청 뒤 공원에 높다랗게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느냐'며 유림들의 반대는 거세기만 했다. 오정숙은 무릎으로 기다시피 온 마을의 노인정을 찾아다니며 읍소를 해야 했다. 일제시대 때 김연수가 마을 앞에 놓은 다리 `연수교'가 큰 물에 떠내려간 것을 안 오정숙이 이 다리를 다시 놓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김연수의 유해와 기념비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무당들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을 지켜내려온 사람들이다. 우리 민속음악을 대표하는 시나위, 시나위로부터 나온 산조, 전통적인 춤의 대명사 살풀이 등이 모두 남도의 무(巫)굿에서 나온 것들이다. 우리의 전통예술은 온갖 서러움 속에서도 그들 손에 의해 지켜져 왔던 것이기에 그들의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하고 다시 자리매김되어야할 것이다.
거금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길은 어느 때보다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짙은 어둠에 삼킨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 너머 왼쪽으로 `서러운 섬' 소록도의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명창 김연수. 그에게도 고향 거금도는 저처럼 `서러운 섬'이었으리라.
1967년 김연수가 발행한 「창본 춘향가」에서 밝힌 자필 이력서에 의하면 그는 1907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태어나 9년간 한학을 수학하고, 20살에 서울로 가 중동중학교를 다녔다. 그당시 양반집 자제로서나 가능했던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뒤 고향으로 돌아와 7년간 축음기로 혼자 소리공부를 했다. 1935년에는 순천에 있던 유성준(1874-1949)에게 「수궁가」를 공부하고 그해 7월 상경, 조선성악연구회에 들어가 송만갑(1865-1939)에게 「흥부가」와 「심청가」를, 이듬해 정정렬(1875-1938) 문하에서 「적벽가」와「춘향가」를 사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격적인 소리공부에 나선 지 불과 2년만에 근세 5명창으로부터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익히는 저력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소리'에 뜻을 둔 것이나 범상치 않은 예술적 재능때문에 그의 출신은 줄곧 호기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확인 결과, 김연수는 거금도에서 대대로 내려온 세습무(世襲巫) 집안 출신이기에 오로지 `소리'만이 입신(立身)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기게 됐고 세습무로서의 `끼' 즉,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동초는 당골 아들이라 해서 모두가 하대를 했지. 나만 동초하고 서로 말을 높이면서 지냈어. 동초는 어릴 때부터 유달리 영특했제. 집안은 비록 당골네였지만 당골판이 거금도 전체인데다 당시 인구가 2만2천여 명이었으니까 살림살이는 넉넉했어. 그래서 서당도 다니고 서울로 유학도 갈 수 있었을 게야' 김연수보다 3살 아래로 금산면장을 지냈으며 김연수의 묘비를 쓴 김영우(金永禹.89.금산면 신전리)씨는 그의 가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2남1녀 중 맏이였고 2남3녀의 자식을 두었다는 김연수의 호적은 금산면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무당 집안이라는 아픈 기억 때문에 김연수 자신이거나 후손들이 호적을 옮겼기 때문일 것으로 금산면 직원들은 추측하고 있다.
지금도 소리꾼하면 무당이나 기생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소리꾼은 대부분 무당 집안 출신이고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기생조합)'이 있어 여자 소리꾼들이 그곳에서 소리수업을 했기 때문에 소리꾼이라는 이미지가 옛날 무당이나 기생과 중복되어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무당 가계의 슬픔은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조선의 법으로, 노비.승려.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工匠)을 팔천(八賤)이라 하였는데, 이 여덟 가지 천민 중에서도 가장 수악한 것이 백정과 무당이었으 니. 이들은 사람축에 끼일 수가 없어, 일반 양인들이 사는 부성(府城)이나 마을 안은 물론이요. 그 언저리에서도 감히 살지 못하고, 저만큼 물러나 귀빠진 곳에 저희끼리 웅크리며 어깨를 부비고 살아야만 하였다.
양반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민촌의 마을 사람 누구에게라도 존대로 말을 바쳐 써야만 하였으며 심지어는 어린아이에게조차 반드시 경어를 써야 했다. < 중략 > 무당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과는 혼인할 수 없다고,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당골네 집안끼리 무계혼(巫系婚)만을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을 낳으면 훗날 그는 무부(巫夫)가 되고, 딸을 낳으면 무녀(巫女)가 되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자 살아보그라. 살자먼 설운 일 많은 거이 한세상이라. 여늬 사람도 이 세상을 진세상이라고, 울고 울어서 질퍽헌 세상이라고, 눈물이 젖어서 무겁다고 허는디, 조선 팔도에 팔천(八賤) 사천(四賤) 무당의 자석으로 나서, 올 디 갈 디 없이 무당 서방이 되야야 허는 우리 같은 사람의 한세상에, 마른 일보다 진일이 더 많은 것은 불을 보디끼 훤헌 일 아니겄냐. 그럴 때는 축축허다고, 젖었다고, 설웁다고 울지 말고, 그저 내가 한낱 소리니라 허고는, 귀신 데불고 한 가락 장고 소리로 놀고 한 가락 피리 소리로 놀아라. 천대허고 박대허는 사람 소리는 듣지 말고, 니 소리 듣고 좋아라 화답허는 귀신들허고 가락으로 놀아. 축축허고 젖은 육신 살어서는 못 벗는 게 사램이지만, 너는 그 육신을 고치 삼어 은실 같고 금실 같은 가락으로 너를 다 뽑아 내그라.안 좋냐?'』 동초 김연수는 그렇게 은실 같고 금실 같은 가락으로 `동초제'라는 판소리 유파를 형성하고 판소리 다섯 바탕의 사설집도 출간해 판소리사에 굵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서러웠다. 74년 3월 9일 세상을 떠난 그는 김포 공동묘지에 묻혀있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수제자 오정숙 명창은 9년뒤에 스승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 금산면의 안산(案山)인 용두봉으로 이장하려 했다. 이때 뜻하지 않은 걸림돌이 생겨났다. 동네 유림들이 일어선 것이다. 어떻게 당골네 자식을 마을 앞산에 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 신사가 자리할 정도로 명당 터인 그곳에 천한 뼈를 묻을 수 있느냐고 다그쳤다.
고흥군청 뒤에 있는 `인간문화재 5호 동초 김연수선생 기념비'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당골네 집안에, 광대 출신을 군청 뒤 공원에 높다랗게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느냐'며 유림들의 반대는 거세기만 했다. 오정숙은 무릎으로 기다시피 온 마을의 노인정을 찾아다니며 읍소를 해야 했다. 일제시대 때 김연수가 마을 앞에 놓은 다리 `연수교'가 큰 물에 떠내려간 것을 안 오정숙이 이 다리를 다시 놓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김연수의 유해와 기념비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무당들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을 지켜내려온 사람들이다. 우리 민속음악을 대표하는 시나위, 시나위로부터 나온 산조, 전통적인 춤의 대명사 살풀이 등이 모두 남도의 무(巫)굿에서 나온 것들이다. 우리의 전통예술은 온갖 서러움 속에서도 그들 손에 의해 지켜져 왔던 것이기에 그들의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하고 다시 자리매김되어야할 것이다.
거금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길은 어느 때보다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짙은 어둠에 삼킨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 너머 왼쪽으로 `서러운 섬' 소록도의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명창 김연수. 그에게도 고향 거금도는 저처럼 `서러운 섬'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