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의 와우(臥牛)형 엉덩이에 해당되는 이곳은 옛부터 전해온 설화가 있다.
왜 녹도(鹿島)라 하였는가?
지금부터 흘러내려온 설화로써 그 내력을 말하자면 옛날 아득한 그 옛날 수도 장안의 권력자 귀족들 그리고 재벌 호적들이 모여 사냥길에 올랐다.
한참 사냥하는 가운데 사슴 한 마리가 발을 다친 채로 사냥꾼들을 간신히 피하여 남으로 남으로 피신하여 허겁지겁 바닷가에 도달 했을 때 하도 목이 말라 쌍충사 끝지점에서 물을 마시고 기운을 되찾았으니 훗날 이곳이 사슴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며 도양 관리가 꼬리 부분이고 동두매가 뒷발, 앞발. 대봉이 꼬리 부분. 소봉과 평화동이 목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새끼 사슴이 현 소록도라 한다.
이 지방 사람들은 와우형 뒷발 기질이기 때문에 그 기질이 강인하고 도의에 밝은 고장이라고 한다.
날로 항구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득량만 청정수역은 황금 어족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그 지역성을 대표하는 자지고부치의 효자 설화가 잠겨 있어 이고장 사람들이 많은 효자 열려상을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효열비가 무려 500기가 이곳에 서 있어 옛부터 내려온 미풍양속의 고을 이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다시 바다건너 4.5㎞ 지점에 웅대한 적대봉이 펼쳐있는 금산면이 있다.
이곳은 첫째로 故 동초 김연수 국창의 출생지요 세계를 놀라게 했던 프로레슬링 김일 선수의 태생지로 와우형인 고흥의 꼬리부분에 해당된 곳이다.
금산면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곳곳에 고인돌(지석묘)이 많이 산포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청동기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전부터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서기 300년경의 조개무지(貝塚)가 금산면 대흥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계속 사람이 살았다고 고증되는 곳이다.
또 고려 神宗 3년(1,200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암을 창건했으며 금산면은 옛부터 절이도(折爾島)로 불러왔으며,조선조 세종1431년 6월에 전라도 처치사가 절이도 등에서 청낭간(靑琅간) [註산호 모양의 빛이 푸른 보석] , 청산호(靑珊瑚) 59매를 국왕에게 올렸으며 동년 8월에 전라감사가 절이도에서 얻은 청낭간을 받쳤다.
그후 신증동국여지 승람 흥양현 山川조에는 현의 남쪽 삼십리에 둘레가 일백리인 목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1598년에 이순신이 절이도 전투에서 적의 머리 71급을 배었다는 사실이 임진 전란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김정호 대동여지도에 송봉산(松封山)으로 표기된 산 이름이 있고 서기 1896년 고종33년 돌산군이 신설되자 그 이듬해에 돌산군 관하의 금산면(최초로 금산면이란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그뒤 일제치하에는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의 명칭을 고려때의 고흥으로 바꾸고 돌산군 금산면이 고흥군 금산면으로 바뀌었다.
고흥군이 와우형 꼬리부분에 해당되는 금산은 동식물의 모든 힘의 근원이 꼬리에 있기 때문인지 금산면 사람들은 대개가 힘이 장대하여 옛부터 씨름장사가 많이 나온곳으로써 그 대표적인 것이 세계레슬링왕 김일 선수를 낳게 하여 국위를 선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산 윤선도가 피난차 이곳에 와서 거금팔경을 작시하여 금산면의 특징을 나타내기도 했다.
(고흥 문화원 제공)_ 고흥 군민광장 3호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