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연합뉴스) 전성옥기자= 유교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를 일컬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한다. "임금과 스승, 아버지의 은혜는 다 같다"는 이 뜻 속에는 유교적 엄격함과 규율이 강하게 묻어 난다. 소리꾼 세계에서의 스승과 제자는 여기에 끈끈한 정이 보태져 어느 경우에는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소리의 대를 잇는다는 것이 `예술의 혼'을 이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공부는 대개 제자가 스승의 집을 찾아가거나 절이나 사랑방에 독선생으로모시고 숙식을 함께 하며 이루어진다. 이렇게 길게는 수년간 함께 지내다보면 제자는 스승의 일거수 일투족을 닮게 마련이다. 우리가 흔히 녹음만 듣고 스승과 제자의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는 이때문인데 제자는 스승의 성격마저도 닮아간다고들 한다.
`동초제(東超制)'의 시조인 김연수(金演洙 1907-1974)와 그의 수제자 오정숙(吳貞淑)명창사이의 사제간 정은 소리꾼 세계에서도 귀감이 되어 자주 회자되곤 한다.죽는 날까지 자신의 예술적 영혼을 제자에게 물려주려 했던 스승으로서의 도(道)와 그같은 스승의 은혜를 저바리지 않는 제자의 도(道)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7일의 일이다. 나이 마흔을 앞둔 오정숙 명창의 동초제 `수궁가' 발표회가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72년 `춘향가', 73년 `흥부가'에 이은 3번째 완창 발표회였다. 오정숙과 후견인 배기봉, 당시 최고의 고수였던 김동준, 여류고수 장송학 등 네 사람은 동초 김연수가 말년을 의탁하고 있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달동네의 김연수 여동생 집에 들어섰다. 발표회를 앞두고 병환 때문에 공연장에 참석 못하는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고 `마지막 수업'도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연수는 간경화로 인해 배에 복수가 차 누워있기도 힘들어했다. 배기봉의도움으로 등에 이불을 괴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김연수는 방사이의 미닫이를 떼고 건넌방 방바닥에 돗자리를 깔라고 일렀다. 이 대목을 회상할 때면 오정숙은 목이 메어 눈물부터 흘린다.
"제가 내일 발표회라니까 말씀도 잘 못하시던 선생님이 돗자리를 깔라고 하세요. 귀한 `소리'를 어떻게 맨 바닥에서 시키겠느냐 하면서요. `수궁가' 초입에서 용왕이 병이 들어 `탑상을 탕탕 뚜다리며/ 용성으로 울음을 운다'고 하는 진양조 대목을 부를 땐데요. 마치 선생님이 병든 용왕 같아요. `어떻게해서든지 선생님을 위한 약을 구해드려야 할텐데'라는 맘만 앞서니 소리가 제대로 나오겠어요? 선생님은 제 마음을 아셨는지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자꾸 저으세요"
눈물을 억지로 훔친 오정숙은 어렵게 소리를 이어가고 김연수는 흡족한 부분이있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못마땅하면 고개를 가로 젓는 `고개짓 수업'이 계속됐다. 그러다 동물들의 상좌 다툼 대목에서 범이 산중에서 내려와 별주부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데서 김연수는 기어이 소리를 중단시켰다. 옆에 있던 배기봉에게 종이와 연필을 가져 오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필기구를 드렸더니 필담으로 `들고 있던 손수건을 바닥에 던진뒤 그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하라'는 거예요. 오정숙의 너름새가 영 그분의 맘에 들지 않았던게지요. 그 너름새를 여러번 연습하고서야 소리를 계속하게 됐어요. 그러다 별주부와 토끼가 산중에서 만나 토끼의 사주팔자를 이르는 대목에서 포수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꾸르르 꽝하며 총을 쏜다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또 소리를 중단시켜요. 선생님은 종이에 끄적이시더니 오정숙에게 갖다 주라는 거예요. 거기에는 `총 쏘는 시늉하고 넘어지라'고 쓰여있었어요"
이렇게 소리공부는 3시간 30분 넘게 계속됐으며 마지막 대목을 부를 때는 제자에게 마지막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는 뜻에서인지 김연수의 흐뭇한 얼굴에 눈물이 번져 나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정숙 일행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틀후, 그러니까 오정숙의 발표회 날인 9일 새벽 2시에 김연수는 기어이 눈을 감고 말았다. 오정숙의 주변 사람들은 김연수의 사망 소식에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스승에 대한 정이 각별한 오정숙이 발표회를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기때문. 결국 오정숙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뉴스에서는 정시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절창 김연수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에, 오정숙이 라디오 듣는 것부터 우선 막아야했다. 오후 2시 발표회 시작을 앞두고 국립중앙극장 소극장 입구에 서있던 배기봉 일행은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김연수의 사망소식을 오정숙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발표회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긴 했어요. 국악인 박송희씨가 제 무대 화장과 의상을 맡곤 했는데 평소 즐겨 듣던 라디오를 못듣게 해요. 무대에 올라서도 수궁가가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객석 여기 저기서 관객들이 훌쩍이는 것이 보였어요. 특히 거문고 산조의 명인인 신쾌동씨가 제 소리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영락없어. 지 스승 소리 솜씨야'하며 눈을 훔쳐내는 거예요. 저는 스승이 병으로 발표회장에 나와보지 못한 것이 섭섭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지요." 오정숙은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말을 이어나간다.
"발표회 후반부에 예정과는 달리 김동준 고수 대신에 동초 선생님의 지정고수였던 이정업씨가 들어왔는데 우느라고 북을 제대로 못칠 지경이었어요. 분위기가 이상하다 여겼지만 스승이 돌아가시리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어질 더질'로 소리를 맺고 무대를 나오니, 그렇지 않아도 눈이 큰 이정업씨가 털썩 주저 앉아서 엉엉 우시는 거예요. 웬일이냐니까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오정숙은 눈물과 화장이 섞여 범벅이 된 채 버선발로 스승의 영전 앞으로 달려갔다. 스승의 초상을 치른 오정숙은 `동초제' 소리의 맥을 잇는 것만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믿고 그 이듬해인 75년에 심청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으며 `적벽가'는 동아방송에 있던 스승의 녹음 테이프를 빌려다가 독습해 76년에 완창 발표회를 열었다. 5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완창 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이렇게 오정숙은 박동진 명창에 이어 판소리 다섯 바탕의 완창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후 오정숙은 김포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스승의 유해를 9년만에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으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동초 김연수가 평생 창극 발전을 위해 몸 담았던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 그의 흉상을 제작해 제막식도 성대하게 열었다. 지금은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스승의 호를 딴 `동초각'를 짓고 동초제 소리를 이어가기 위한 후학 양성에 말년의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동초 김연수의 지정고수로 그보다 한살 아래여서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정업 역시 동초가 세상을 떠난지 꼭 열흘만에 숨을 거뒀다. 이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당대 명창 김연수가 지정고수인 이정업을 데려갔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소리공부는 대개 제자가 스승의 집을 찾아가거나 절이나 사랑방에 독선생으로모시고 숙식을 함께 하며 이루어진다. 이렇게 길게는 수년간 함께 지내다보면 제자는 스승의 일거수 일투족을 닮게 마련이다. 우리가 흔히 녹음만 듣고 스승과 제자의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는 이때문인데 제자는 스승의 성격마저도 닮아간다고들 한다.
`동초제(東超制)'의 시조인 김연수(金演洙 1907-1974)와 그의 수제자 오정숙(吳貞淑)명창사이의 사제간 정은 소리꾼 세계에서도 귀감이 되어 자주 회자되곤 한다.죽는 날까지 자신의 예술적 영혼을 제자에게 물려주려 했던 스승으로서의 도(道)와 그같은 스승의 은혜를 저바리지 않는 제자의 도(道)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7일의 일이다. 나이 마흔을 앞둔 오정숙 명창의 동초제 `수궁가' 발표회가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72년 `춘향가', 73년 `흥부가'에 이은 3번째 완창 발표회였다. 오정숙과 후견인 배기봉, 당시 최고의 고수였던 김동준, 여류고수 장송학 등 네 사람은 동초 김연수가 말년을 의탁하고 있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달동네의 김연수 여동생 집에 들어섰다. 발표회를 앞두고 병환 때문에 공연장에 참석 못하는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고 `마지막 수업'도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연수는 간경화로 인해 배에 복수가 차 누워있기도 힘들어했다. 배기봉의도움으로 등에 이불을 괴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김연수는 방사이의 미닫이를 떼고 건넌방 방바닥에 돗자리를 깔라고 일렀다. 이 대목을 회상할 때면 오정숙은 목이 메어 눈물부터 흘린다.
"제가 내일 발표회라니까 말씀도 잘 못하시던 선생님이 돗자리를 깔라고 하세요. 귀한 `소리'를 어떻게 맨 바닥에서 시키겠느냐 하면서요. `수궁가' 초입에서 용왕이 병이 들어 `탑상을 탕탕 뚜다리며/ 용성으로 울음을 운다'고 하는 진양조 대목을 부를 땐데요. 마치 선생님이 병든 용왕 같아요. `어떻게해서든지 선생님을 위한 약을 구해드려야 할텐데'라는 맘만 앞서니 소리가 제대로 나오겠어요? 선생님은 제 마음을 아셨는지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자꾸 저으세요"
눈물을 억지로 훔친 오정숙은 어렵게 소리를 이어가고 김연수는 흡족한 부분이있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못마땅하면 고개를 가로 젓는 `고개짓 수업'이 계속됐다. 그러다 동물들의 상좌 다툼 대목에서 범이 산중에서 내려와 별주부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데서 김연수는 기어이 소리를 중단시켰다. 옆에 있던 배기봉에게 종이와 연필을 가져 오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필기구를 드렸더니 필담으로 `들고 있던 손수건을 바닥에 던진뒤 그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하라'는 거예요. 오정숙의 너름새가 영 그분의 맘에 들지 않았던게지요. 그 너름새를 여러번 연습하고서야 소리를 계속하게 됐어요. 그러다 별주부와 토끼가 산중에서 만나 토끼의 사주팔자를 이르는 대목에서 포수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꾸르르 꽝하며 총을 쏜다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또 소리를 중단시켜요. 선생님은 종이에 끄적이시더니 오정숙에게 갖다 주라는 거예요. 거기에는 `총 쏘는 시늉하고 넘어지라'고 쓰여있었어요"
이렇게 소리공부는 3시간 30분 넘게 계속됐으며 마지막 대목을 부를 때는 제자에게 마지막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는 뜻에서인지 김연수의 흐뭇한 얼굴에 눈물이 번져 나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정숙 일행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틀후, 그러니까 오정숙의 발표회 날인 9일 새벽 2시에 김연수는 기어이 눈을 감고 말았다. 오정숙의 주변 사람들은 김연수의 사망 소식에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스승에 대한 정이 각별한 오정숙이 발표회를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기때문. 결국 오정숙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뉴스에서는 정시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절창 김연수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에, 오정숙이 라디오 듣는 것부터 우선 막아야했다. 오후 2시 발표회 시작을 앞두고 국립중앙극장 소극장 입구에 서있던 배기봉 일행은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김연수의 사망소식을 오정숙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발표회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긴 했어요. 국악인 박송희씨가 제 무대 화장과 의상을 맡곤 했는데 평소 즐겨 듣던 라디오를 못듣게 해요. 무대에 올라서도 수궁가가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객석 여기 저기서 관객들이 훌쩍이는 것이 보였어요. 특히 거문고 산조의 명인인 신쾌동씨가 제 소리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영락없어. 지 스승 소리 솜씨야'하며 눈을 훔쳐내는 거예요. 저는 스승이 병으로 발표회장에 나와보지 못한 것이 섭섭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지요." 오정숙은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말을 이어나간다.
"발표회 후반부에 예정과는 달리 김동준 고수 대신에 동초 선생님의 지정고수였던 이정업씨가 들어왔는데 우느라고 북을 제대로 못칠 지경이었어요. 분위기가 이상하다 여겼지만 스승이 돌아가시리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어질 더질'로 소리를 맺고 무대를 나오니, 그렇지 않아도 눈이 큰 이정업씨가 털썩 주저 앉아서 엉엉 우시는 거예요. 웬일이냐니까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오정숙은 눈물과 화장이 섞여 범벅이 된 채 버선발로 스승의 영전 앞으로 달려갔다. 스승의 초상을 치른 오정숙은 `동초제' 소리의 맥을 잇는 것만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믿고 그 이듬해인 75년에 심청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으며 `적벽가'는 동아방송에 있던 스승의 녹음 테이프를 빌려다가 독습해 76년에 완창 발표회를 열었다. 5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완창 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이렇게 오정숙은 박동진 명창에 이어 판소리 다섯 바탕의 완창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후 오정숙은 김포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스승의 유해를 9년만에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으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동초 김연수가 평생 창극 발전을 위해 몸 담았던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 그의 흉상을 제작해 제막식도 성대하게 열었다. 지금은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스승의 호를 딴 `동초각'를 짓고 동초제 소리를 이어가기 위한 후학 양성에 말년의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동초 김연수의 지정고수로 그보다 한살 아래여서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정업 역시 동초가 세상을 떠난지 꼭 열흘만에 숨을 거뒀다. 이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당대 명창 김연수가 지정고수인 이정업을 데려갔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