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소리 학계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초를 셋으로나누어 전기 8명창, 후기 8명창, 근세 5명창 시대라 부른다.
「흥부가」가운데 놀부가 제비 후리러가는 대목으로 유명한 권삼득(1771-1841), 가왕(歌王) 송흥록(순조-철종)과 동생 송광록(순조-헌종) 등이 전기 8명창에 속한다. 19세기 후반기는 판소리의 최전성기로 이때 활동했던 박유전,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 등이 후기 8명창으로 불리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는 봉건체제가 해체되고 국권 침탈이라는 민족적 비운에 처해진 시기인데 이때의 근세 5명창이 송만갑(1865-1939), 이동백(1866-1947), 김창룡(1871-1935), 유성준(1874-1949), 정정렬(1875-1938) 등이다.
이들 근세 5명창마저 사라지고 급속한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판소리가 자생력을 잃어가던 1940년부터 60년까지 명창 임방울(1905-1961)과 김연수(1907-1974)가 우리나라 판소리의 양대 기둥 역할을 했다.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의 고향은 전남 고흥군 금산이다. 고흥은 다도해 해상공원 위에 마치 호리병처럼 떠 있는 조그마한 반도다. 고흥반도의 녹동항을 출발, 건너 뛰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 소록도를 오른쪽에 두고 배편으로 20여분 지나다보면 김연수의 고향이며 행정구역상 금산면으로 불리우는 거금도에 이르게 된다. 이 거금도의 한복판에 높이 592m의 적대봉이 솟아있다.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은 김연수와 함께 「이충무공전」을 판소리로 만들기 위해 유적지를 둘러보려고 이곳에 들렀을 때 적대봉을 보고 당대 명창 동초가 태어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며 그 자태에 탄복했다고 전해진다.
동초 김연수는 이 거금도의 주산(主山)인 적대봉 아래에서 태어나 안산(案山)격인 앞산 용두봉 중턱에서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한 채 잠들어 있다. 김연수는 이 적대봉과 용두봉만큼이나 뚜렷한 업적을 판소리사에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판소리 5바탕의 사설 정리고 다른 하나가 창극 발전이다.
판소리는 구두전승(口頭傳承) 예술이다. 판소리에서는 서양음악처럼 일정한 악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꾼이 제자에게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전통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스승과 제자 자신이 악보나 다름없는 육보식교수법(肉譜式敎授法)이다. 이 교수법의 최대 단점은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기에 일부 사설의 누락과 와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노산 이은상은 이를 두고 '국악인들이 다만 창법의 기술만을 배워 익혔을 뿐이므로, 제 자신이 노래를 부르긴 하면서도 그 가사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가사의 내용이 불분명해지고, 다시 그것이 전하고 전할수록, 점점 더 괴상하게 되어서 마지막엔 주역(周易)보다도 더 풀기 어려운 야릇한 말이 되어버린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실정을 안타깝게 여겼던 이가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로 그는 산만하게 전승되던 전기 8명창시대의 사설을 모아 「변강쇠가」를 포함한 판소리 6바탕의 사설을 정리해 후세에 전하게 했다. 그의 업적에 비견되는 것이 동초 김연수로 신재효본을 중심으로 각 판소리 유파별로 다양하게 발전해온 근세 5명창시대의 판소리 5바탕을 다시 집대성해 이를 5권의 사설집으로 출간한 것이다. 김연수는 소리꾼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어릴적 9년간 서당에 다니고 일제시대에 서울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연수는 뜻한 바 있어 29살의 늦은 나이에 `소리'에 정식 입문해 근세 5명창 중 한명인 유성준에게 「수궁가」, 송만갑에게 「흥보가」와 「심청가」, 정정렬에게 「적벽가」와 「춘향가」를 사사해 2년만에 판소리 5바탕을 모두 익히는 저력을 보였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각 판소리 유파의 좋은 대목은 한데 모으고 장단과 가락을 다시 짜 자신의 호를 딴 `동초제'라는 독특한 또하나의 유파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의 덕에 `동초제' 사설은 다른 유파에 비해 정확하고 전체적인 구성이 짜임새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연수의 또다른 업적은 창극을 통한 판소리의 현대화다. 한학에 신식학문을 익힌 김연수는 소리공부 뒤에 연극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31살이 되던 1937년에 스승이었던 근세 5명창과 나란히 조선성악연구회 이사로 취임하고 그해에 이 연구회에서 직영하는 `조선창극좌' 대표로 선임됐다. 이후 39년에는 `조선창극단' 대표를 맡았으며 해방 되던 해에는 `김연수창극단', 50년에는 `우리국악단'을 조직하는 등 창극 발전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다. 김연수는 그뒤 대한국악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는 등 60년대까지 국악계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판소리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동초제'의 시조 김연수. 그는 6.25 전란의 와중에서도 가재도구는 팽개친 채 전해오던 판소리 필사본과 자료만을 가지고 피난길에 오를만큼 판소리의 전승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지난 64년 중요무형문화재 5호인 판소리 예능보유자(춘향가)로 지정됐던 그가 말년에 다시 짜서 즐겨 불렀다는 `이산 저산'은 가사와 성음이 지닌 높은 품격면에서 출중한 가객으로서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
' 이산저산 꽃이 피면/ 산림풍경 너른들/ 만자천홍 그림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간 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구나/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랴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개 없을손가/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이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어/ 월백설백 천지백허니/ 모도다 백발의 벗일레라/ 봄은 갔다가 연년이 오건마는/ 이내 청춘은 한 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네그려/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인생이 비록 백 년을 산대도/ 인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허시는 이가 몇몇인고/ 노세 젊어 놀아 늙어지면는 못노느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히 허면/ 늙어지면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허고 한가할 때 틈타서/ 이렇듯 친구 벗님 모아 앉어/ 한 잔 더먹소 덜먹소 허여가며/ 헐 일을 허면서 놀아보자'
(고흥=연합뉴스) 전성옥기자sungok@yonhapnews.co.kr
「흥부가」가운데 놀부가 제비 후리러가는 대목으로 유명한 권삼득(1771-1841), 가왕(歌王) 송흥록(순조-철종)과 동생 송광록(순조-헌종) 등이 전기 8명창에 속한다. 19세기 후반기는 판소리의 최전성기로 이때 활동했던 박유전,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 등이 후기 8명창으로 불리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는 봉건체제가 해체되고 국권 침탈이라는 민족적 비운에 처해진 시기인데 이때의 근세 5명창이 송만갑(1865-1939), 이동백(1866-1947), 김창룡(1871-1935), 유성준(1874-1949), 정정렬(1875-1938) 등이다.
이들 근세 5명창마저 사라지고 급속한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판소리가 자생력을 잃어가던 1940년부터 60년까지 명창 임방울(1905-1961)과 김연수(1907-1974)가 우리나라 판소리의 양대 기둥 역할을 했다.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의 고향은 전남 고흥군 금산이다. 고흥은 다도해 해상공원 위에 마치 호리병처럼 떠 있는 조그마한 반도다. 고흥반도의 녹동항을 출발, 건너 뛰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 소록도를 오른쪽에 두고 배편으로 20여분 지나다보면 김연수의 고향이며 행정구역상 금산면으로 불리우는 거금도에 이르게 된다. 이 거금도의 한복판에 높이 592m의 적대봉이 솟아있다.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은 김연수와 함께 「이충무공전」을 판소리로 만들기 위해 유적지를 둘러보려고 이곳에 들렀을 때 적대봉을 보고 당대 명창 동초가 태어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며 그 자태에 탄복했다고 전해진다.
동초 김연수는 이 거금도의 주산(主山)인 적대봉 아래에서 태어나 안산(案山)격인 앞산 용두봉 중턱에서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한 채 잠들어 있다. 김연수는 이 적대봉과 용두봉만큼이나 뚜렷한 업적을 판소리사에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판소리 5바탕의 사설 정리고 다른 하나가 창극 발전이다.
판소리는 구두전승(口頭傳承) 예술이다. 판소리에서는 서양음악처럼 일정한 악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꾼이 제자에게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전통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스승과 제자 자신이 악보나 다름없는 육보식교수법(肉譜式敎授法)이다. 이 교수법의 최대 단점은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기에 일부 사설의 누락과 와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노산 이은상은 이를 두고 '국악인들이 다만 창법의 기술만을 배워 익혔을 뿐이므로, 제 자신이 노래를 부르긴 하면서도 그 가사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가사의 내용이 불분명해지고, 다시 그것이 전하고 전할수록, 점점 더 괴상하게 되어서 마지막엔 주역(周易)보다도 더 풀기 어려운 야릇한 말이 되어버린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실정을 안타깝게 여겼던 이가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로 그는 산만하게 전승되던 전기 8명창시대의 사설을 모아 「변강쇠가」를 포함한 판소리 6바탕의 사설을 정리해 후세에 전하게 했다. 그의 업적에 비견되는 것이 동초 김연수로 신재효본을 중심으로 각 판소리 유파별로 다양하게 발전해온 근세 5명창시대의 판소리 5바탕을 다시 집대성해 이를 5권의 사설집으로 출간한 것이다. 김연수는 소리꾼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어릴적 9년간 서당에 다니고 일제시대에 서울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연수는 뜻한 바 있어 29살의 늦은 나이에 `소리'에 정식 입문해 근세 5명창 중 한명인 유성준에게 「수궁가」, 송만갑에게 「흥보가」와 「심청가」, 정정렬에게 「적벽가」와 「춘향가」를 사사해 2년만에 판소리 5바탕을 모두 익히는 저력을 보였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각 판소리 유파의 좋은 대목은 한데 모으고 장단과 가락을 다시 짜 자신의 호를 딴 `동초제'라는 독특한 또하나의 유파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의 덕에 `동초제' 사설은 다른 유파에 비해 정확하고 전체적인 구성이 짜임새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연수의 또다른 업적은 창극을 통한 판소리의 현대화다. 한학에 신식학문을 익힌 김연수는 소리공부 뒤에 연극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31살이 되던 1937년에 스승이었던 근세 5명창과 나란히 조선성악연구회 이사로 취임하고 그해에 이 연구회에서 직영하는 `조선창극좌' 대표로 선임됐다. 이후 39년에는 `조선창극단' 대표를 맡았으며 해방 되던 해에는 `김연수창극단', 50년에는 `우리국악단'을 조직하는 등 창극 발전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다. 김연수는 그뒤 대한국악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는 등 60년대까지 국악계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판소리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동초제'의 시조 김연수. 그는 6.25 전란의 와중에서도 가재도구는 팽개친 채 전해오던 판소리 필사본과 자료만을 가지고 피난길에 오를만큼 판소리의 전승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지난 64년 중요무형문화재 5호인 판소리 예능보유자(춘향가)로 지정됐던 그가 말년에 다시 짜서 즐겨 불렀다는 `이산 저산'은 가사와 성음이 지닌 높은 품격면에서 출중한 가객으로서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
' 이산저산 꽃이 피면/ 산림풍경 너른들/ 만자천홍 그림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간 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구나/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랴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개 없을손가/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이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어/ 월백설백 천지백허니/ 모도다 백발의 벗일레라/ 봄은 갔다가 연년이 오건마는/ 이내 청춘은 한 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네그려/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인생이 비록 백 년을 산대도/ 인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허시는 이가 몇몇인고/ 노세 젊어 놀아 늙어지면는 못노느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히 허면/ 늙어지면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허고 한가할 때 틈타서/ 이렇듯 친구 벗님 모아 앉어/ 한 잔 더먹소 덜먹소 허여가며/ 헐 일을 허면서 놀아보자'
(고흥=연합뉴스) 전성옥기자sungok@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