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도장’ 관장실로 가면서도 역도산을 만나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 상황에 맞는 상징이 있게 마련이다. 일본에선 역도산을 빼놓을 수 없다. 패전민 콤플렉스가 감도는 속에서 거대한 미국인을 때려 눕히는 역도산은 서민에게는 구세주라고 할 수 있었다. 또 아이들에게는 동경하는 영웅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천황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 이름은 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전후 일본 국민의 최대 영웅이자 일본 프로레슬링 창사자인 역도산은 텔레비젼·신문·잡지 등 전 매스컴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는 슈퍼 스타였다. 일본의 거물급 인사들도 만나기 힘든 역도산을 밀항자인 내가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더욱이 역도산은 수용소에 수감된 나를 신원보증까지 해 주며 석방시켜 주지 않았는가. 나는 역도산을 만나면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요시무라 요시오를 따라 관장실로 가면서 그 어떤 광명이 나를 비추는 것 같았다.
관장실 문은 묵직하게 열렸다. 요시무라와 함께 관장실로 들어갔다. 이곳저곳을 눈으로 열심히 훑었다. 곳곳에 걸려 있는 트롯피와 상패. 그리고 역도산 사진들. 그것을 본 순간부터 내 몸은 마술에 걸렸다.
이윽고 역도산이 눈앞에 들어왔다. 정신이 아찔했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역도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눈에 역도산임을 알아봤다. 딱 벌어진 어깨. 당당한 체구. 그리고 호탕한 목소리.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카리스마 넘치는 강인한 모습.
위아래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 역도산은 나직한 목소리로 “자네가 김일인가”라고 물었다. 역도산은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웅이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도 기뻤다. “예”라며 짧고 굵게 대답했다. 역도산은 이어 “한국에서 씨름을 했다면서”라고 물었다.
나는 세계 프로레슬링 챔피언 역도산 앞에서 씨름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 나지막하게 “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역도산은 “죽을 각오로 현해탄을 건너왔으니 앞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뎌라”라고 말했다. 나는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했다. 역도산은 내게 다가와 “잘 다듬으면 쓸 만하겠어”라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열심히 해”라고 격려도 해 줬다.
역도산과의 첫 만남은 짧았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역도산을 만난 후 걸어 나오니 둔기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띵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가 역도산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그를 만난 순간 꿈이 현실이 되었다. 당장 내일이면 프로레슬링 선수로 데뷔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흥에 겨워 입가에선 절로 휘바람이 나왔다.
역도산이 “현해탄을 건너왔으니 모든 것을 참고 견뎌라”라고 말한 것은 지금부터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메시지로서 기대와 걱정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나의 운명. 동물적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필연처럼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역도산을 만난 후 ‘그는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저 밑바닥부터 용솟음쳤다. ‘나는 역도산 중심에 도달할 수 있을까?’ 흩어진 내 생각을 모아 허공에 펄쳐 보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링 위에 서 있는. 까맣고 긴 타이츠를 신은 역도산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나도 반드시 저 신기루 속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일간스포츠 | 2006.04.26 11:33 입력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