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기로 했다. 그것, `생의 지푸라기`는 역도산을 잡는 것이었다. 가능성은 거의 영에서 시작됐다. 수감 생활이 4개월째 이어지면서 무일푼 신세가 됐다. 펜과 편지지 및 편지봉투를 살 돈도 없었다. 교도관에게 구걸하다시피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구해 달라고 사정했다. 수차례 부탁했지만 교도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단식에 나섰다. 밥을 굶어서라도 필요한 것을 얻어야 했다. 교도관은 처음에는 `한두 끼 굶고 포기하겠지`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3일을 넘고 4일째를 맞이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그날 교도관은 "왜 단식까지 하는가"라며 그 이유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완강했던 교도관 의지가 한풀 꺽였음을 직감했다. 나는 "역도산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한국 고향 혹은 도쿄 쪽의 아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줄 알았던 그는 뜻밖에 역도산 선생께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말에 어이없어 했다. 교도관은 "그것 때문에 단식했느냐"라며 혀를 차더니 편지를 보낸들 답장이 없을 테니 아예 포기하고 본국으로 송환될 날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본국 송환도 거부한 상태였다. 죽든 살든 어쨌든 수용소를 탈출, 도쿄에서 내 운명을 맡기기로 작정까지 한 나의 각오가 교도관의 한마디에 꺾일 리 없었다. 교도관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편지지와 편지봉투 그리고 펜을 건네줬다.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 "역도산 선생님! 전 선생님 제자가 되기 위해 푸른 꿈을 안고 한국에서 혈혈단신 밀항한 김일이란 사람입니다. 저는 레슬링을 배우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씨름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호남 씨름대회에 나가 여러 번 우승한 경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밀항 중 체포돼 이렇게 수용소에 갇힌 채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꼭 역도산 선생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저에게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주소를 몰랐다. 겉봉에는 `東京 力道山`이라고만 썼다. 신이 있다면 편지가 역도산에게 전달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 편지를 부친 후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다. 예상대로 답장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교도관이 앞을 지나가면 "답장이 왔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인사말처럼 되어 버렸다. 처음엔 이런 모습을 비웃었던 교도관도 점차 태도가 바뀌었다. 워낙 역도산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을 안 후부터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마라며 격려까지 해 줬다. 10여 일이 흘러도 답장이 오지 않었다. `이제 모든 게 틀렸구나` 생각하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그러면서 마음속 한구석엔 `답장이 올 것`이란 기대도 품고 있었다. 역도산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안고 수감된 방에서 매일 팔굽혀펴기를 하며 체력을 다졌다. 하지만 제대로 먹지 않은 상태에서 체력 훈련은 배고픔만 더할 뿐이었다. 1957년 2월 중순 쯤으로 기억된다. 역도산에게 편지를 보낸 후 15일 정도 흘렀을까. 교도관이 느닷없이 수감 방 쪽으로 오면서 "김일 면회"라고 말했다. 난 귀를 의심했다.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교도관의 "면회다"란 소리를 들었지만 `설마 나를 부르는 것일까`란 생각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교도관이 한 번 더 "김일 면회 왔다니까"라고 말했다. 누가 면회 왔는지 몹시 궁금했다. 가족이 면회 온 것은 아닐 텐데 …. 그래서 교도관에게 물었다. "혹시 누가 면회 왔는지 아십니까?" 그는 "글쎄,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상하게 교도관이 일반 면회실로 안내하지 않았다. 특별 면회실이었다. 정병철 기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