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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8]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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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도쿄역에 도착했다. 도쿄역에 도착하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두려움 등 만감이 교차됐다. 역도산을 만날 푸른 꿈을 안고 도쿄까지는 순조롭게 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경찰관 두 명이 내게 다가오는 걸 본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직감적으로 `걸렸구나`란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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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항자 수용소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던 나는 수용소를 나온 후 샌드위치를 먹으며 즐거워했다.
그때 샌드위치 맛은 너무도 꿀맛이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경찰관 두 사람은 내게 인사를 건네며 검문에 응해 줄 것을 요구했다. 등골이 오싹하면서 등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들을 밀치고 도망갈까, 순순히 심문에 응할까`란 생각이 빠르게 교차됐다.

 

`내가 튀어 봤자 도쿄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다가 검거되면 죄만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순순히 심문에 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적미적하자 경찰관은 곧 내가 밀항자임을 눈치 챈 듯했다. 당시 밀항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쿄역에는 경찰관들의 불심검문이 수없이 이뤄졌다. 설령 밀항에 성공한 사람들도 대부분 도쿄에서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밀항하기 위해 선원증은 위조했다. 하지만 일본 신분증은 위조할 수 없었다. 경찰관들은 내가 신분증이 없는 데다 말을 머뭇거리자 밀항자냐고 물었다. 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그렇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도쿄역 파출소로 연행해 갔다.

 

순순히 따라갔다. 그들과 함께 도쿄역 파출소로 가면서 한국에서 세운 밀항 계획부터 도쿄까지 오면서 고생했던 과정이 생생히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체포되면서 모든 것이 끝날 줄이야." 절망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파출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내 옷 주머니는 물론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서 역도산 잡지와 사진이 나왔다. 그들도 역도산 팬들인 성싶었다. 자기네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역도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소학교(초등학교)때 일본어를 조금 배워 이름과 나이 등 기본적 일본어 단어는 알아들었다. 그들은 내가 밀항한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그들이 본 잡지 속의 역도산을 가리키며 "나는 저 선생(역도산) 제자가 되기 위해 밀항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지 않았다. 어이없다고 코웃음 쳤다.

 

파출소에서 조사받은 후 다시 경찰서로 넘겨졌다. 경찰서 조사는 강도가 셌다. 당시 일본 사회는 굉장히 어수선해 각종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내가 혹시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는지 집중 조사했다. 그리고 최근 발생했었던 강력 범죄와 연관성에 대해서도 추궁했다.

 

그들의 조사는 집요했고 반복적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나로부터 밀항 이외 새로운 혐의가 나오지 않자 유치장에 감금시켰다. 일본에서 첫날밤은 이렇게 해서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젠 내 몸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일본 사법부 손에 내 운명을 맡겨야만 했다.

 

유치장에서 잠이 올 리 만무했다. 고향의 가족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으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니 유치장으로 주먹밥이 나왔다. 비록 주먹밥이지만 겨우 허기를 채웠다.

3일 정도 유치장에서 보낸 나는 어디론가 이송됐다. 경찰서에서 30여 분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쿄 밀항자 수용소였다. 말항자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재판은 받지 않았다. 그곳에서 한국으로 강제 송환될 날만 기다렸다. 이곳엔 나처럼 밀항했다가 체포돼 강제 송환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수용소의 11월은 너무도 추웠다. 마룻바닥은 차가웠고 늘 배고픔을 참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자유를 잃고 갇힌 채 먹고 자는 끝이 없는 듯한 하루하루의 연속이 힘들었다.

 

기약 없는 강제 송환을 기다리며 1957년 정유년 닭띠 새해가 밝았다. 수용소에서 더 이상 허송세월을 보내기 싫었다. 탈출을 결심했다.

 

정병철 기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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